오성홍기 들고 ''대중화''선봉에 서다
  • 홍콩·북경/글 李政勳 ·사진 李相哲 기자 ()
  • 승인 1997.10.16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반환 100일 맞은 홍콩을 가다/중 국, 일국양제로 안정과 번영 보장
홍콩 신계 북쪽의 록마차우(落馬洲)는 폭 백m쯤 되는 강가에 쳐진 철책을 경계로 하여 중국의 심천 시를 마주하고 있다. 지난 9월27일 찾아간 록마차우의 야트막한 언덕 위 전망대에는 일단의 서양 관광객들이 모여 심천 시내를 건너다보고 있었다. 전망대에서 좀더 위로 올라간 산꼭대기에는 이 지역을 경비하는 홍콩 경찰 부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취재진은 양해를 얻어 20여 분간 사진을 촬영했다.

경찰 부대 주변 초소는 텅 비어 있어 접경 지대라는 긴장감은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저 멀리 심천으로 연결된 다리 위에는 컨테이너 트럭들이 줄지어 서서 월경 수속을 기다리고 있었다. 홍콩 농민들은 철책선 바로 앞에까지 가서 농사를 짓고 있어 매우 평화로워 보였다. 철책으로 구분해 허가된 사람 외에는 통행을 금하되 경제 교류는 허용하는 것, 이것이 바로 등소평이 말한 1국가 2체제(一國兩制)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등소평은 대만과의 통일을 평화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일국양제로 홍콩과 마카오 반환을 추진했다. 일국양제는 대중화(大中華)를 향한 중국의 통일 전략이다. 우리 정부는 일국양제보다 더 느슨한 2국가 2체제(아세안처럼 남북한이 외교권과 군사권을 행사하는 국가로서 통일되는 것) ‘민족 공동체 통일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중국의 일국양제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무엇인가. <시사저널>은 홍콩 반환 100일을 맞아 일국양제 실험장에 대한 대탐험에 착수했다.

홍콩의 번영은 중국이 대만에 던지는 ‘미끼’

일국양제는 식민지로 할양된 옛 땅을 평화적으로 되찾는 방법이었다. 홍콩 북쪽 신계 지역은, 영원한 식민지인 홍콩 섬·구룡 반도와 달리 중국이 97년까지 영국에 빌려준 곳이었다. 홍콩의 급속한 발전은 신계 지역을 홍콩 섬·구룡 반도와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로 꽁꽁 묶어 놓았다. 신계는 땅값 비싼 홍콩 섬·구룡 반도를 대체한 신흥 주거 지역으로 등장했고, 식수와 농산물을 공급하는 기지로 자리잡았다.
80년대 초 영국은 신계 지역 조차(租借) 기한을 연장하기 위해 중국과 마주앉았으나, 중국의 거부로 기한 연장에 실패했다. 중국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20세기 후반에 무슨 식민지냐’는 여론을 조성해 홍콩 섬과 구룡 반도도 아예 돌려달라고 영국을 압박했다. 84년 등소평은 이러한 공세 속에 일국양제를 주창하고 반환 후에도 홍콩의 안정과 번영은 보장된다고 선언했다. 이로써 영국은 홍콩(홍콩 섬과 구룡 반도) 반환을 결정했고, 이어 포르투갈도 마카오 반환을 결정했다.

일국양제는 대만과 통일하기 위한 북경 정부의 대대적인 정치 공세이다. 홍콩이 반환 이후에도 계속 번영하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보아라. 반환 이후에도 홍콩은 계속해서 번영하지 않느냐. 대만 기업들은 홍콩에 위장 기업을 세워 대륙에 투자하지 말고 한 나라가 되어 직접 투자해라. 우리와 한 나라가 되어 같이 잘살자’는 유혹이다. 중국에 반환된 홍콩의 모습은 중국이 대만인들에게 던진 고혹적인 미끼인 셈이다.

인민폐·홍콩 달러 동일 가치로 거래

등소평은 대만을 유혹하기 위해 홍콩에 대한 일국양제를 50년간 보장하겠다고 선언했다. 강택민은 한 술 더 떠서 백년간 유지할 수 있다고 언급했다. 하루 뒤의 일도 알 수 없는데, 50∼백 년 뒤의 일을 어찌 보장하겠는가. 일국양제가 이렇게 정치적인 이유로 출발한 만큼 북경 정부는 홍콩의 일국양제를 철저히 지키려고 한다.

지난 9월25일 1년 만에 다시 찾은 홍콩은 반환 전과 비교해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다. 홍콩인들은 지금까지 써오던 화폐(홍콩 달러)와 광동어를 쓰고 있었다. 그들과 영어로 이야기하는 데도 별 어려움이 없었다. 치안 상태도 좋은 듯했다. 모양이 달라지기는 했지만 홍콩인들은 중국인과는 다른 여권으로 자유롭게 해외 여행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달라진 것도 있었다. 가장 크게 달라진 점은 관공서와 주요 호텔 입구에 펄럭이는 오성홍기(五星紅旗)와 과거에는 보지 못했던 홍콩 특구 깃발이었다. 영국군 주둔 사령부였던 ‘프린스 오브 웨일스’ 빌딩에는 인민해방군이 들어와 있었으나 밖으로는 나오지 않는다고 했다. 시내에는 북경어(일명 普通話)를 가르치는 학원이 여러 곳 생겨났다.

홍콩에서 만난 중국 전문가 김광석 박사(53)는 반환 이후 가장 두드러진 점은 중국 인민폐의 유통이 늘어난 점이라고 지적했다. 공교롭게도 홍콩 달러와 중국 인민폐는 환율이 거의 비슷하다(1 홍콩달러가 인민폐 1.07원). 때문에 홍콩 상점들은 인민폐를 홍콩 달러와 동일한 가치로 받아 주고 있었다. 오랫동안 홍콩에 거주해 온 교민들은 인민폐가 몇년 전부터 홍콩에서 통용되어 왔으나 반환 후 약간 더 늘어났다고 말했다.

홍콩 경제가 편해야 중국 경제도 ‘편안’

<중앙일보> 논설위원을 지낸 구종서 박사는 통일을 정치·경제·사회 통일로 분류한 바 있다. 정치 통일이란 독자적으로 외교권을 행사하고 군대를 운영하던 분단 국가가, 외교와 국방 면에서 한 체제로 통합하는 것이다(기타 내정 부문은 예외일 수도 있다). 경제 통일이란 화폐 통합을 이루고 관세가 없는 하나의 경제권을 형성할 때까지 경제 교류를 확대해 가는 과정을 말한다. 사회 통일이란 교육·사회 복지 등 양쪽이 내정 체제를 통일하고 양쪽 주민의 자유 통행을 허용하는 것이다.

일국양제는 경제 통일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나온 정치 체제이다. 중국 접경 지역에 있는 홍콩의 로우(羅湖) 역은 심천에서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홍콩인과, 홍콩에서 돈벌이를 하고 심천으로 가려는 중국인으로 붐비고 있었다. 이미 두 지역은 하나의 경제권으로 묶여 있었다.

지난 8월 태국에서 시작된 외환 위기는 홍콩에도 영향을 미쳐 3일 사이에 홍콩의 주가가 무려 18%나 하락했다. 위기에 빠진 홍콩 증시를 살린 것은 홍콩에 진출한 중국계 기업들이었다. 중국계 기업들이 엄청난 자금력으로 주식 매집에 나섬으로써 정상을 되찾은 것이다. 중국이 홍콩의 경제 안정에 앞장서는 것은 중국이 과거 종주국인 영국보다 못하지 않다는 경쟁 심리 때문일 수도 있다.
성석주 홍콩 한인상공회 회장과 조영복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 홍콩관장은 “홍콩과 대륙은 경제로 밀접하게 묶여 있어, 홍콩 경제가 요동치면 대륙 경제 역시 몸살에 걸린다. 대륙이 불황이면 홍콩 역시 위기를 맞을 수밖에 없다. 때문에 대륙 정부는 홍콩의 경제 하강을 막는 데 최선을 다할 것이다”라고 전망했다. 홍콩의 경제 전문가들은 이러한 이유로 일국양제에서의 홍콩 경제가 당분간 안정적으로 발전하리라고 전망했다.

일국양제는 사회 통일을 뒤로 미룬 것이 특징이다. 로우 역 바로 전에 있는 판링(粉嶺) 역 부근은 땅값이 비싼 홍콩 섬과 구룡 반도 지역을 대체한 신흥 아파트 단지로 각광받고 있다. 이 역에서 백m쯤 떨어진 곳에 도교 계열로 보이는 ‘봉영선관(蓬瀛仙館)’이라는 선원이 있었다. 선원 건물들은 대부분 새것이고 한쪽에서는 건물 공사가 진행되고 있어, 신흥 주거 단지가 형성되는 것에 맞추어 사원을 확장하는 듯했다.

이 선원 본관 건물 뒤쪽에는 사자(死者)들을 모신 납골당이 있었다. 납골당을 둘러볼 즈음 사제 두 사람이 올라와 유족들과 함께 위령제를 올렸다. 사제들은 한 움큼은 됨 직한 향을 피우고 제상 위에 종이 돈을 펼치고 유기(놋그릇)로 만든 악기를 두들기며 축문을 읽었다. ‘산 자는 살고 죽은 자는 죽는다.’ 자연스럽게 진행된 위령제는 반환 100일을 맞아 사회적으로 뭔가 달라졌기를 기대한 취재진에게 신선한 충격이었다.

50년간 대륙인 홍콩 진입 제한

정치적으로 어떤 결정이 있었든 그것은 최고위층 사람들이 할 일이고, 홍콩 서민들의 일상 생활은 달라진 것이 없었다. 홍콩이 사회주의 국가에 반환된 것은 ‘혁명’이 아니었고, 홍콩은 ‘해방구’도 아니었다. 바로 이 점이 일국양제의 묘미이다.
북경을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취재진이 한국 영사처를 찾았을 때 조선족 여인 2백여 명이 줄지어 서 있었다. 그들은 ‘모범 답안’를 펼쳐 놓고 즉석에서 한국 남성과 결혼했다는 증명서를 작성하고 있었다. 위장 결혼 여부는 판별할 수 없었지만, 여인들은 결혼 증명서가 있어야 한국행 비자를 받을 수 있다. 이처럼 잘사는 곳으로 옮겨 가려는 것은 사람의 욕망이다. 중국의 일국양제는 잘사는 곳으로 인구가 이동하는 것을 제한한다.

홍콩은 금융과 무역의 중심지로 변모한 만큼 생산 공장은 별로 없는 편이다. 때문에 대륙의 중국인들이 대거 홍콩에 몰려들면 강도·절도 같은 사회 문제가 많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중국은 홍콩 반환 이전부터 대륙인이 불법으로 홍콩에 이주하는 것을 극력 억제해 왔다. 홍콩 총영사관 이상식 치안관은 이미 재작년부터 홍콩으로 불법 이주하는 대륙인들이 급격히 줄었으며, 반환 이후 그 수가 더욱 줄었다고 말했다.

중국의 일국양제란 앞으로 최소 50년간 사람들의 자유로운 이전을 제한하겠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대륙에서 홍콩을 향하는 이촌향도(離村向都)를 막기 위해 중국과 홍콩 접경 지역에 설치된 철책이 계속 유지되는 것이다.

또한 일국양제는 사실상 자본주의로 전환한 대륙 정부가 살아 남기 위한 비책이라고 할 수 있다. 김광석 박사는 “50년대 말의 대약진운동과 60년대의 문화혁명 때 수천만 중국인이 죽었다. 계급 투쟁을 전제로 한 사회 개조가 대륙 경제의 쇠락과 사회 위기를 초래한 것이다. 공산주의로는 대륙을 강국으로 만들 수 없다고 진단한 등소평은 흑묘백묘론을 외치며 개혁·개방에 착수했다”라고 말했다.

중국이 일국양제로 통일과 부국 강병을 추구하는 동안 경쟁국인 미국과 일본은 일국일제로 발전을 계속할 것이다. 두 마리 토끼를 쫓는 중국이 한 마리 토끼를 잡으려는 경쟁국들보다 앞설 것인가. 일국양제는 중국이 택한 최선의 선택이지만 결코 황금빛 미래를 보장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중국은 고민하고 있다.

개혁 개방을 표명한 대륙 정부가 50여 년간 일국양제를 제대로 유지하려면 강력한 리더십이 있어야 한다. 이 과정에서 대륙의 젊은이들은 홍콩과 구미로부터 유입된 자유로운 분위기를 타고 천안문 사태와 같은 민주화 요구 시위를 벌일지도 모른다. 따라서 일국양제는 북경의 지배 세력에게 내우외환(內憂外患)을 초래하는 요인이 될 수도 있다. 결국 일국양제의 성공 여부는 앞으로 50여 년간 중국 지도부가 얼마나 센 ‘맷집’을 발휘하느냐에 달려 있을 것이다.
일국양제가 우리에게 던지는 시사점은 수없이 많다. 전문가들은, 북한이 담판에 의해 돌려 받을 수 있는 식민지가 아닌 만큼 우리는 더 구체적으로 정치 통일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한다. 또 정치 통일을 이룩한 후 몇 년 동안 2체제를 유지할 것인가에 대해 국민적 합의를 이끌어내야 한다.

독일은 동독인의 민중 봉기로 통일이 되었기 때문에 빠른 시간 내에 동서독 주민 간에 자유 왕래가 실현되었다. 때문에 통일 독일은 지금 과거 동독 지역의 재산권 문제가 불거져 골치를 앓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남한의 실향민이 갖고 있는 북한의 재산권을 동결하고 상당 기간 자유 왕래를 제한하는 데 대해 국민적 합의를 도출해야 할 것이다. 또 정치 통일로부터 몇년째 되는 해에 사회 통일을 이룩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국민적 합의를 구해야 한다.

정치 통일과 별도로 경제 통일을 위해 남북 경협을 적극 추진해야 한다. 경제 교류 활성화는 남북 간의 이해를 높여 군사 긴장을 완화하고 정치·사회 통일로 가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다.

통일을 혁명적인 대사건으로 보지 않는 사회 분위기를 만드는 것도 중요하다. 통일을 ‘사건이 아니라 남북이 서로 번영하는 정책적인 결단’으로 이해하고 북한 인민을 잡아끌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중국은 군사·외교 분야의 우위를 이용해서 경제가 월등히 우세한 홍콩과 통합한 데 이어 대만과의 통일을 계획하고 있다. 북한보다 훨씬 더 우위에선 우리는 어떤 방안으로 통일을 할 것인가.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