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다녀온 문정인 연세대 교수 "북한, 국제 사회 참여 의지 강하다"
  • 南文熙 차장대우 ()
  • 승인 2000.06.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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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통령은 노동당 규약의 대남 적화통일 노선을 삭제하지 않는 한 국가보안법의 일방적 폐지는 어렵다는 입장을 전달했고, 북측은 이 문제에 대해 상당히 전향적인 반응을 보인 것으로 압니다.”
남북 두 정상이 합의한 6·15 남북 공동선언은 세계의 관심과 이목을 집중시켰다. 특히 제1항 자주의 원칙과 제2항 통일 방안에 대한 합의는 예상을 뛰어넘는 수준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 항목들에 대한 문제 제기도 적지 않아서 당분간 논란이 일 것으로 보인다. 대통령 특별수행원 자격으로 남북 정상회담에 동행한 문정인 연세대 교수를 만나 이번 6·15 남북 공동선언의 내용에 초점을 맞추어 얘기를 들었다. 문교수는 한·미 관계에 정통한 국제정치학자로 그동안 김대중 정부의 햇볕 정책을 지지해 온 몇 안 되는 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이번 6·15 남북 공동선언의 제1항에서 통일 문제를 우리 민족이 자주적으로 해결해 간다고 한 것을 두고, 북측의 반외세 주장이 반영됐다면서 북측에 너무 양보한 게 아니냐는 지적도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북측에 양보했다고 하는 것은 전혀 잘못된 해석입니다. 통일 문제는 남북 당사자가 자주적으로 해결해야 합니다. 그러나 외세를 배격하고 우리 남과 북이 협력한다고 되는 일이 아닙니다. 미·일·중·러 주변 4강의 공조와 협력, 즉 국제 공조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김대통령은 이번 회담에서 ‘반외세 자주’를 주장하는 북측에 이 점을 집중적으로 설득했습니다. 민족 공조와 국제 공조라는 두 개의 바퀴로 한반도 통일이라는 수레를 전진시키자는 것이죠. 지난 50년 동안 반외세 자주를 줄기차게 주장해 온 북측이 이번에 반외세를 뺀 채 자주 원칙에 합의한 것은 획기적인 변화라고 봐야 합니다. 예기치 않은 성과를 얻은 것이지요. 이것은 통일 문제에서 주변국들이 건설적으로 기여할 여지를 만들어 놓았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북측이 공동선언의 1항을 근거로 주한미군 철수를 주장할 가능성이 있으므로 공동선언이 한·미 공조를 위협할 수도 있다는 지적이 있는데요.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는 반외세가 아니라 남북의 화해·협력·재결합입니다. 남과 북은 지금 그 목표를 향해 거대한 전환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의해야 할 점은 항상 대전환기, 과도기에는 국가 안보에 위기가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는 점입니다. 한·미 동맹의 균열은 남한 내에 심각한 국론 분열을 일으킬 수밖에 없어 한반도 상황을 매우 불안하게 만들 것입니다. 이러한 불안정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주한미군이 한반도의 군사적 안정을 유지하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동북아 질서의 안정을 위해서도 주한미군의 균형추 역할이 필요합니다. 이번 정상회담에서 김대통령은 이 점을 충분히 설명했고, 김정일 위원장도 상당히 이해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북측의 주한미군 철수 주장에 변화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인가요?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 봅니다. 북측은 그동안 모든 대화에서 주한미군 철수 주장을 가장 앞세웠습니다. 그러나 이번 회담에서는 그런 자세를 보이지 않았는데, 이는 매우 중요한 변화라고 봅니다. 특히 동북아 지역의 안정과 관련해서 주한미군이 차지하는 역할을 북측이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습니다.

공동선언 제2항에서는 남북이 통일 방안에 공감대를 형성했는데,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이번 공동선언에 긴장 완화와 평화 정착 문제가 포함되어 있지 않다고 문제를 삼는 이도 있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통일의 한 과정으로 남북 연합 단계에 대해 남과 북이 서로 공감하고 이를 위해 노력하기로 합의한 것 자체가 사실상 남북이 긴장 완화와 평화 체제 구축에 근본적으로 뜻을 같이한 것입니다. 그동안 북측은 중앙 정부가 외교권과 군사권을 갖는 연방제 통일을 줄기차게 주장해 왔습니다. 그러나 이번에 김정일 위원장은 이 문제에서 매우 신축적인 입장을 보여주었습니다. 놀라운 것은 김위원장이 예멘의 사례를 들면서 급격하게 연방제 통일을 하면 예멘처럼 내부에서 대립과 충돌이 일어나 바람직하지 않다고 얘기한 점입니다. 통일에 이르는 중간 단계를 현실적으로 인정하는 태도를 보인 것인데, 이는 매우 중요한 변화입니다.
일각에서는 이 문제에 대해 남측의 국민적 합의가 없었다는 점을 문제 삼기도 하는데요.

그것은 전적으로 오해입니다. 일부에서는 남측의 연합 제안이 김대중 대통령이 주장해온 3단계 통일 방안 중 1단계인 국가연합안을 의미하기 때문에 김대통령의 개인 의견이라고 보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연합 제안은 노태우 정부와 김영삼 정부가 각각 제안한 한민족공동체 통일 방안에서 중간 단계로 설정한 남북연합을 의미합니다. 김대통령은 통일 정책에서 과거 정권과의 연속성을 유지해야 한다는 전직 대통령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남측의 역대 정부가 주장한 남북연합안을 가지고 북측을 설득해 합의를 이끌어낸 것입니다.

공동선언 제3항에서 이산 가족 상봉과 미전향 장기수 송환 문제를 연계한 것은 어떻게 해석해야 합니까?

두 문제가 서로 연계된 것이 아닙니다. 이산 가족 문제는 김대통령의 집요한 설득이 주효해서 합의가 이루어진 것이고, 미전향 장기수 문제는 별도 사안입니다. 북측이 이번 회담에서 전향적이고 적극적인 자세를 보인 것에 대해 김대통령이 인도주의 차원에서 화답한 것입니다.

공동선언 제4항에서는 민족 경제를 균형 있게 발전시키자고 했는데, 남측의 일방적 경제 지원과 이에 따르는 비용 문제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습니다.

이번에 민족 경제 균형 발전에 합의한 것은 과거와 같은 일방적 시혜 방식의 경제 협력에서 벗어나겠다는 얘기입니다. 김위원장도 전력 문제를 거론할 때 북측이 전력을 거저 달라는 것이 아니라 여유 분이 있으면 나눠 가지자는 얘기라고 하면서, 일방적이고 무리한 지원을 원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또 남북 경제 협력에서 핵심은 민간 기업이 북측에 진출하는 것이 될 텐데, 이를 위해서는 투자보장협정 등 북측의 제도 정비가 필요합니다. 이는 북측을 국제 사회의 책임 있는 일원으로 이끌어 내는 효과가 있습니다. 김위원장이 경의선 철도 복구 문제를 남북이 같이 해결하자고 제안하자 김대통령이 이 사업을 위해 국제 컨소시엄을 구성해 국제 공조를 하자고 제안했고, 이에 대해 김위원장도 상당히 긍정적으로 반응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국가보안법 개정 문제에 대해서도 두 정상 사이에 논의가 있었다고 하더군요.

얘기된 것으로 압니다. 김위원장이 국가보안법 문제를 꺼내자 김대통령이 이 문제는 남과 북이 상호주의에 입각해서 풀어야 할 문제라고 얘기했다고 합니다. 북쪽의 노동당 규약에 있는 대남 적화통일 노선을 삭제하지 않는 한 남쪽에서 일방적으로 국가보안법을 폐지하기는 어렵다는 것이지요. 이번 정상회담에서 북측은 이 문제에 대해 상당히 전향적인 반응을 보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북측의 입장이 상당히 변화했다고 볼 수 있는데, 그 배경이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북측이 이번 선언에 합의한 것은 그야말로 역사적 사변입니다. 이러한 변화를 보인 것은 북측이 국제 사회에 참여하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또한 경제 상황에 대한 자신감도 반영되었다고 봅니다. 경제 위기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고 있는 상황인 만큼 이러한 기조를 유지·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외부의 수혈이 필요하고, 미국과 일본보다는 남측에서 수혈받는 것이 더 빠르다고 판단한 것 같습니다. 아울러 김위원장이 권력을 완전히 장악한 점도 이러한 변화를 가져온 배경이 되었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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