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읽기로 병을 고친다
  • 오윤현 기자 (noma@e-sisa.co.kr)
  • 승인 2000.08.3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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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요법, 우울증 · 스트레스 치료에 도움 ··· '책 읽는 모임' 통하면 효과 커
한국에서 독서는 아직까지 단순히 읽는 즐거움을 주고 인생의 길잡이 노릇을 하는 정도로만 인식되고 있다. 하지만 서양은 다르다. 꽤 오래 전부터 독서를 병이나 개인 문제를 해결하는 데 이용해 왔다.

16세기 프랑스 의사이자 풍자 작가였던 라블레(1494∼1553)는 처방전에 언제나 문학책 제목을 적어주었다. 심리 치료제의 하나로 독서라는 약을 처방했던 것이다. 미국과 영국의 병원에서는 19세기에 이미 성서나 종교 서적을 환자에게 읽도록 해 치료 효과를 높여 왔다.

그러나 한국은 아직도 독서 요법(Biblother- apie)의 불모지나 다름없다. 1970년대 후반부터 일부 병원과 학교가 독서 요법을 실시해 오고 있지만, 대부분 치료 보조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최근 대전에 사는 가정주부 이영애씨(49)가 독서 요법을 다룬 <책 읽기를 통한 치유>를 펴내 관심을 끌고 있다. 이씨는 1991년부터 독서 요법의 효과를 주부들에게 알리기 위해, 대전에서 가족의 정신 건강을 위한 모임 ‘신성회’를 이끌고 있다.

이씨가 독서 요법을 처음 안 것은 20여 년 전. 결혼 초기에 이씨는 남편과 숱한 갈등을 겪었다. 지금은 남편이 침례신학대학 교수로 있지만, 결혼 초기만 해도 남편은 열렬한 구원파 신자였다. 게다가 남편은 성격 장애까지 보였다. 왜 쓰레기통이 꽉 차 있느냐, 왜 수건이 젖어 있느냐 하는 식으로 하루 종일 잔소리를 늘어놓기 일쑤였다. 또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서 화를 내 이씨와 아이들을 자지러지게 만들었다.

가슴 졸이며 살다 보니 이씨에게도 우울증·협심증·두통 따위가 찾아왔다. 이씨는 심한 고통에 시달리다가 우연히 폴 투르니에가 지은 <인간 치유의 심리학>이라는 책을 읽게 되었다. 이씨는 그 책을 통해 자신의 병이 남편과의 갈등 때문에 생겼음을 알았다.
먼저 자신의 처지 파악해야

그 뒤 이씨는 책 속에 엄청난 힘이 숨어 있음을 알고, 책과 자주 만났다. 남편에게도 투르니에의 <여성, 그대의 사명은> 같은 책을 읽어 보라고 권했다. 그 결과 남편의 여성관에도 큰 변화가 나타났다. 아내를 동반자라고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남편은 투르니에의 <강자와 약자>를 읽고는 자신이 두려움에 직면할 때마다 화를 내고 언성을 높인다는 사실을 확인했고, 그 버릇을 고치려 노력했다. 이씨는 “25년 간 우리 부부의 갈등을 풀어주고, 서로를 이해하게 만든 것은 책이었다”라고 말했다.

이씨는 <책 읽기를 통한 치유>에서 책으로 마음의 질병을 치유한 사례를 구체적으로 소개하고 있다(왼쪽 책 목록 참조). 이씨에 따르면, 정신 질환을 앓고 있는 한 남성은 폴 투르니에의 <삶에는 뜻이 있다>와 휴 미실다인의 <몸에 밴 어린 시절>을 읽고 마음의 병을 어느 정도 치료했다.

일 중독에 빠져 아내 보기를 돌 보듯 하던 남자는 폴 투르니에의 <인간 치유의 심리학>과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존 그레이 지음)를 정독하고 가정의 평화를 되찾았다. 또 남편이 바람을 피워 마음 고생을 하던 여인은 <위장된 분노의 치유>(최현주 지음)와 <대인 공포증의 치료>(이시형 지음) <당신의 가정도 치유될 수 있다>(정동섭 지음)를 넘기며 마음의 평화를 찾았다. 뒤에 남편이 돌아왔음은 물론이다.

독서 요법의 원리는 단순하다. 책을 통해 정신 문제를 치료하는 것이다. 하지만 효과는 다양하고 엄청나다. 우선 감정적·지적 직관을 얻을 수 있다. 그런가 하면 상처를 보상해주고, 상처로 인한 울분을 발산할 기회를 준다. 또 자아의 가치를 높이고, 가치관을 확고히 할 수 있다. 미지의 세계와 연결해 주기도 한다. 새로운 관심거리를 만날 수도 있고, 소외감을 없앨 수 있다.

독서 요법 대상자는 광범위하다. 심리적 갈등과 일상 생활에서 겪는 각종 스트레스를 극복하고 예방하는 데 이용한다면, 모든 사람이 해당한다. 강약의 차이는 있지만, 대부분의 현대인이 신경증이나 불안·공포·조급증·강박증 따위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책을 읽는다고 무조건 병이 치유되거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본인의 환경·의지·저항력·체질·경제력을 감안해 적절한 책을 읽어야 효과가 있다. 자신의 문제나 병에 알맞는 책을 고르려면 우선 자신의 처지를 정확히 파악할 필요가 있다.
<독서요법>(범우사) 저자 황규백씨는, 만약 삶을 괴롭게 생각하고 매사에 자신이 없는 상황에 처해 있다면, 정신 건강에 관한 책이나 이것을 극복하는 데 도움을 주는 철학·문학 책을 읽으라고 권한다. 기분 전환이나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서라면 수필 종류도 괜찮다. 자신의 문제가 무엇인지 모르거나, 안다고 해도 그 해결 방법을 모르는 사람은 자신이 현재 처해 있는 상황을 이해하고 자신이 목표에 도달하는 통로를 전망할 수 있는 정보를 담은 책을 보면 된다.

신체적 질병을 오래 앓고 있는 환자에게는 같은 병을 극복한 환자의 체험기나 투병기 그리고 위난을 극복하고 성공한 사람들의 전기나 기록담이 이롭다. 오래 병을 앓은 사람은 알겠지만, 때로는 그 같은 책이 의사가 주는 약보다 건강에 더 도움을 준다.

한 가지 문제에 집착해 정신적 안정이 필요한 경우, 그 문제와 전혀 관계가 없으면서 흥미를 끌 수 있는 책을 보면 정신 건강에 도움이 된다. 그 책을 통해 자신의 문제에서 떠나 공상 세계에서 거닐다 보면, 정서적 안정을 회복하고 적응 이상에 빠지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

학생이나 어린이에게도 독서 요법은 유용하다. 어린이를 위해 독서 요법을 시도할 때는 절대 강제로 해서는 안된다. 잘못하면 어린아이가 장차 독서의 즐거움을 전혀 못 느낄 수도 있다. 어린이의 경우 스스로 책을 읽으면서, 받아들이고 반응하고 평가하게 해야 한다. 청소년의 경우에는 독서를 통해 비행이나 탈선을 막고, 시험·수업 노이로제를 예방할 수 있다. 다만, 책 선정은 전문적인 지식을 가진 교사가 각별히 선정해야 한다.
말보다 글로 표현해야 효과 더 커

책을 읽을 때 주의할 점은 가급적 자신과 같은 문제를 경험한 사람의 이야기를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책 속의 인물이나 이야기에 애정을 갖고 동화되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 자신의 문제를 쉽게 깨닫고, 문제의 원인이 무엇인지 상세히 알 수 있다. 병도 마찬가지이다.

독서 치료 효과를 높이려면, 독서 모임을 만들거나 그 모임에 참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위 상자 기사 참조). 독서 모임에 참여해 자신이 책에서 보고 느낀 감정이나 욕구 등을 고백해야 비로소 마음에 변화가 찾아온다. 말로 표현할 수도 있으나, 될 수 있으면 글을 이용하는 것이 낫다. 문장을 통해 자신의 느낌을 표현하면 더 정확하고 강하게 자신의 생각을 점검할 수 있어서, 내면을 체계화하는 효과를 볼 수 있다. 형제나 친한 친구들과 편지 형식으로 교환할 수도 있고, 독서 기록을 교환할 수도 있다.

하지만 독서 요법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리라 믿어서는 곤란하다. 정신 의학자들은 같은 책이라도 읽는 사람의 감정이나 처지에 따라 느낌이 다를 수 있으므로, 남이 어떤 책에서 특별한 효과를 보았다고 해서 같은 효과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라고 지적한다.

독서 요법에서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언제 치료를 멈출 것인가 하는 점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치료 단계에서 목표를 세워야 한다. 즉 자신이 어느 정도까지 바뀌었을 때 멈추어야 할지 미리 계획을 세우고 추진하는 것이 좋다.

바람이 선선해 책 읽기에 좋은 계절이다. 이때 읽는 책이 인생의 모든 것을 바꾸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이영애씨 사례에서 보듯, 책은 불행을 행복으로 바꿀 수 있다. 그같은 점을 상기하며 책을 읽는다면 글자 한 자 한 자가 새롭게 보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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