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은 텔레비젼이 만든다
  • 金恩男 기자 ()
  • 승인 1997.07.3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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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토론회, 후보 자질 판단에 지대한 영향… 중립 기구가 주관, 사회자·토론자 공정 선정 등 제도 개선 시급
한언론학자는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는 모택동의 말은 수정돼야 한다’고 선언했다. 권력은 이제 텔레비전에서 나온다. 대선을 앞두고 벌어진 텔레비전 토론은 그 위력을 이미 실감나게 보여주었다. 신한국당 대선 후보가 확정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고 있는 텔레비전 토론의 현황과 문제점들을 긴급 점검한다. <편집자>

풍경 하나. 95년 프랑스. 텔레비전 토론 사회자 후보에 오른 언론인 15명은 대선 1차 투표 결과가 나오기만을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1차 투표가 끝난 뒤 결선 투표에 진출할 1·2위 후보 간에 텔레비전 토론회를 치르는 것은 프랑스의 오랜 전통이었다. 4월23일 뚜껑이 열렸다. 1차 투표의 승리자는 우파의 자크 시라크(공화국연합당)와 좌파의 리오넬 조스팽(사회당) 후보였다. 방송위원회는 언론인 15명의 명단을 즉각 이들에게 전달했다. 한쪽이 누군가를 고르면 다른 한쪽은 거부하는 우여곡절 끝에 이들은 알랭 뒤아멜과 기욤 뒤랑 두 사람을 사회자로 선정했다.

풍경 둘. 97년 한국. 국내 굴지의 언론사들이 5∼6월에 대선 예비 주자들을 불러 토론회를 벌이던 도중 예기치 않은 일이 벌어졌다. 몇몇 예비 후보가 ‘(질문이) 지나치지 않느냐’‘무슨 근거로 그렇게 말하는가’‘인신 공격이나 다름없다’고 반발하는 사태가 속출한 것이다. 심지어 질문자(패널리스트)에게 사과를 받아낸 후보도 있다.

언론사, 토론회를 사세 과시로 악용

사태가 이렇게 된 데는 일부 사회자와 질문자의 책임이 컸다. ‘빚쟁이치고는 얼굴이 너무 좋은 것 같다’‘인기만 따라가다 보면 국정 수행에 차질이 있을 수도 있다’(이상 박찬종 토론회), ‘민주계 인사의 국정 수행 능력이 의문시된다’‘세계화 시대에 풍기는 인상과 경력을 봐서 국제 감각에 문제가 있지 않나 하는 염려가 있다’(이상 김덕룡 토론회) 같은 대목이 문제를 일으켰다.

프랑스와 한국의 대조적인 풍경은 단순히 사회자·질문자 선정에 국한한 것은 아니었다. 30회에 걸친 대선 예비 주자 토론회를 비교·분석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언론위원회 모니터 팀은 △이미 대선 후보로 확정된 야당 대표들과 경선을 앞둔 여당 예비 주자 전원(이른바 ‘8룡’)을 2:8로 출연시킨 불균형 구도 △‘누구는 청문회, 누구는 간담회’ 식으로 난이도가 고르지 않고 정치적 중립을 잃은 질문 내용들을 토론회의 문제점으로 지적했다.

‘바른언론을 위한 시민연합’(바른언론, 공동대표 김성수 외 6명)은 아예 절차 자체를 문제삼고 나섰다. 토론회가 선거 운동 기간 전에 열렸으므로 선거법 위반이라는 것이다. 선거법 제82조 1항은 ‘언론 기관은 선거 운동 기간중 대담·토론회를 개최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바른언론은 나아가 이들 토론회가 일부 언론사의 사세 과시와 영향력 확대 수단으로 악용되면서 대선 구도를 왜곡하고 대선 분위기를 조기에 과열하고 있다고 비판했다(35쪽 상자 기사 참조).

그럼에도 ‘텔레비전 토론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는 의견 또한 만만치 않았다. 방송·신문 3사 토론회가 끝난 직후(6월16∼17일) 한국기자협회가 4년제 대학 언론학과 교수 1백7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 조사에 따르면, 선거 운동 기간 이전이라도 텔레비전 토론이 가능해야 한다고 응답한 이는 전체의 63.6%에 달했다. 이에 비해 선거 운동 기간에만 해야 한다는 응답자는 30.8%에 불과했다.
안병찬 교수(경원대·신문방송학)는 아직 여당의 대선 후보가 확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열린 토론회의 긍정적인 측면으로 ‘키질 효과’(winnow effect) 방지를 들었다. 군소 후보가 원천적으로 배제될 수밖에 없는 구조, 곧 언론 매체나 기자가 자기 입맛에 맞는 후보만을 ‘겨 까불 듯’ 가려내 보도하는 관행에서 벗어나 유권자 스스로 후보들의 자질을 판단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했다는 것이다.

텔레비전 토론을 둘러싼 이같은 논란은 새로운 전환점을 맞고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지난 7월15일 KBS MBC SBS 방송 3사가 대선 후보 텔레비전 토론을 공동 주최하기로 최종 결정했다는 사실이다.

선거관리위원회가 ‘특정 후보를 지지하거나 당선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보도를 위해서라면’선거 운동 기간 전에도 텔레비전 토론이 가능하다는 해석을 내린 만큼 법적인 문제 또한 해결된 상태이다. 신한국당 경선이 끝난 뒤 있을 방송 3사 공동 주최 토론회의 첫 제작은 MBC가 맡는다(7월 말 예정).

언론은 중계·보도만 맡아야

이번 토론회가 이전과 크게 달라진 점은 사회자와 질문자를 선정하는 방식이다. 방송 3사는 방송협회(회장 홍두표 KBS 사장) 아래 텔레비전 토론 자문위원회(가칭)를 새로 두기로 합의했다. 경실련·방송위원회·전경련 등 시민·사회 단체 관계자 10명 안팎으로 구성될 자문위원회는, 방송 3사가 추천한 사회자 1명과 질문자 5명을 심사할 권한을 갖는다.

두말할 나위 없이 이는 텔레비전 토론의 공정성을 담보하기 위한 장치이다. 그럼에도 문제는 남아 있다. 텔레비전 토론 주최자가 언론사라는 한계가 그것이다. 최근 신문협회(회장 방상훈 <조선일보> 사장)가 대선 후보 초청 토론회를 공동으로 주최하자는 공문을 방송협회에 띄우면서 이에 대한 우려는 더 커지고 있다. 바른언론 정탁영 사무총장은 ‘중계·보도만 맡을 뿐 절대로 개입해서는 안될 언론이 오히려 자기들끼리 손을 맞잡고 텔레비전 토론을 좌지우지하는 꼴’이라고 비판했다.

그 부작용은 벌써부터 드러나고 있다. 지난 7월18일 새정치국민회의 당직자들은 격앙된 분위기였다. 지역 방송국마다 돌아가며 주최하고 있는 대선 후보 텔레비전 토론을 전면 중지하라고 방송협회가 명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방송사간 과잉 경쟁과 후보들이 당할 ‘시달림’을 막자는 것이 그 취지였다. 그러나 국민회의는 방송협회의 이같은 결정이 지방화 시대에 역행할 뿐더러 텔레비전 토론 정착으로 고비용 정치 구조가 개선되기를 바라는 국민 여망을 저버리는 ‘횡포’나 다름없다고 비판했다.

이를 극복할 방법은 간단하다. 언론사 아닌 중립적인 제3의 기구가 텔레비전 토론을 주관하면 된다. 미국에서는 지난 87년 설립한 ‘대통령 후보 토론위원회’가 토론회를 개최하고 방송사는 단지 이를 중계하는 형식으로 텔레비전 토론을 운영하고 있다. 위원 10명, 사무총장 1명, 자문위원 50명으로 구성된 이 민간 상설 기구에는 양당 정치인, 노조·경제계 대표, 시민 단체 등이 참여하고 있다. 토론위원회가 생기기 전까지 텔레비전 토론을 주관한 것은 민간 단체인 여성유권자연맹이었다.

한국에도 이같은 독립 기구가 생겨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 것은 92년 대선 때부터였다. 문제는 ‘총대를 멜 만한’ 집단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선거관리위원회나 방송위원회는 공정성 시비에 휘말릴까 눈치를 보고, 민간 단체는 아직 역량이 미치지 못했다. 그러던 차에 언론사가 주도권을 행사하게 된 형국이다. 텔레비전토론위원회(가칭) 구성과 관련해 그나마 구체적인 안을 내놓은 것은 권혁남·김승수 교수(이상 전북대)와 바른언론 정도가 고작이다.

텔레비전 토론을 진행하는 데 필요한 형식이나 절차는 토론위원회 안에서 웬만큼 결정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토론위원회 구성 자체가 불확실한 상황에서 전문가들은 이에 대한 논의를 따로 진행하고 있다.

첫째는 어느 후보까지를 토론에 참여시킬지 결정하는 문제이다. 프랑스처럼 결선 투표 제도가 있다면 모를까 무소속 후보가 난립하게 되어 있는 한국 현실에서 이는 민감한 쟁점이다. 민주주의 원칙에 따른다면 모든 후보를 토론에 참여시켜야 옳다. 그러나 후보가 많으면 토론 자체가 불가능하고 유력한 후보자들이 군소 후보와 토론하기를 기피할 우려가 있다는 것이 이효성 교수(성균관대·신문방송학)의 지적이다.

미국에서도 무소속 후보가 텔레비전 토론에 참여한 것은 80년 앤더슨이 처음이었다. 당시 여성유권자연맹은 무소속 후보가 토론에 참여하려면 국민 지지도가 15%를 넘어야 한다고 못박았다. 그러나 92년 선거 당시 이 기준은 △전국적 조직이 있다는 증거 △후보가 전국적 뉴스 가치가 있고 경쟁력이 있다는 증거 △후보에 대한 전국적 관심도가 있다는 증거를 갖출 것으로 더욱 세분화되었다. ‘미국, 뭉치면 산다’ 진영의 대통령 후보 로스 페로가 토론회에 참가할 수 있었던 것은 이 기준에 따른 것이었다.
토론 방법, 두 후보간 정면 대결이 이상적

권혁남 교수는 한국의 경우 텔레비전 토론 개최 5일 전을 기준으로 △국회 안에 원내 교섭 단체를 구성한 정당의 공식 후보 △군소 정당이나 무소속 후보의 경우 공신력 있는 기관이 행한 여론 조사에서 원내 교섭 단체를 구성한 정당의 공식 후보 가운데 가장 낮은 지지도를 얻은 후보를 기준으로 이보다 지지도가 높은 후보를 토론에 참여시키자고 제안했다.

두 번째는 어떤 대결 방식을 택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60년 케네디-닉슨 토론은 가장 흥미있었던 토론회 가운데 하나로 미국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 있다. 지스카르 데스탱과 미테랑이 맞붙은 프랑스 최초의 텔레비전 토론(74년)은 71.4%라는 경이적인 시청률을 남겼다.

이 두 토론회의 공통점은 후보 두 사람이 정면으로 대결하는 방식을 택했다는 것이다. 정면 대결 방식은 긴장감과 현장감, 흥미를 불러일으키므로 텔레비전 토론에 가장 이상적이라는 것이 연구자들의 지적이다. 그러나 이 방식을 택할 경우 후보들이 서로 약점이 될 만한 주제를 아예 건들지 않아 토론 내용이 빈약해질 우려도 있다.

지난 92년 대선 당시 정주영 후보처럼 ‘영향력 있는 무소속 후보’가 언제라도 나올 수 있는 한국 현실에서는, 후보가 3명 이하면 2명 또는 3명씩 토론회를 진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권혁남 교수는 제안했다. 4명이 넘을 경우에는 3명씩 조합을 이루어 고르게 대결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세 번째는 사회자·토론자의 선정과 역할을 둘러싼 문제이다. 바른언론 정탁영 사무총장은 사회자·토론자 명단에서 언론인을 아예 빼야 한다고 주장한다. 언론의 매개 없이 후보와 유권자가 직접 만난다는 텔레비전 토론의 정신을 살리기 위해서이다. 이에 반해 국회 입법조사분석실 김영일 연구관은 ‘현장 감각이 뛰어난 언론인 집단이 토론 진행을 주로 맡고 각 분야 전문가가 보조 역할을 맡는 것이 세계적 추세’라고 반박했다.

구성보다 중요한 것은 이들이 토론을 이끌어 나가는 방식이다. 지난 5∼6월 토론회에서 일부 질문자는 자신을 청문회 스타로 착각한 것이 아니냐는 혹평을 받았다. 호전적이고도 일방적인 질문으로 예비 후보들을 몰아세웠기 때문이다. ‘공중 조기 경보기 값이 정확히 얼마인지 아는가’‘전체 여성 인구 중 유흥업계 종사 여성 인구 비율이 얼마냐’처럼 퀴즈형 질문도 난무했다.

질문자가 제 역할을 못할 경우 오히려 토론의 밀도를 떨어뜨린다는 지적 때문에 프랑스는 처음부터 질문자 없이 사회자 두 명만으로 텔레비전 토론을 진행해 왔다. 미국도 점점 질문자를 없애가는 추세이다. 92·96년 미국의 대선 후보 토론은 질문자 없이 사회자가 진행했다.

토론 문화가 정착하지 않은 한국에서는 각계 각층을 대표하는 질문자를 두는 편이 오히려 토론 분위기를 활기차게 만들 것이라는 지적이 우세하다. 문제는 후보자 간의 정책 차이를 끌어내고 이를 집요하게 추적하는 기술이다.

네 번째는 청중이다. 외국에서는 질문자의 역할이 축소되는 반면 청중의 비중은 날로 커지는 추세이다. 미국도 92년부터 이른바 ‘공회당 토론회’(town hall meeting) 방식을 도입하고 있다. 갤럽 여론 조사에서 지지 후보를 정하지 않았다고 응답한 유권자 가운데 일부를 청중으로 데려다놓고 이들이 후보에게 직접 질문을 던지는 방식이다. 이는 직접 민주주의의 이상을 부분적으로 실현할 수 있는 방식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그러나 지지 후보가 없는 유권자들인 만큼 후보들의 정책에 대한 관심이 적고 질문 또한 특정 후보에 치중되기 쉽다는 점에서 문제를 안고 있다.

TV 토론은 생방송이 원칙

다섯 번째, 텔레비전 중계를 둘러싼 기술적인 문제들은 대부분 토론에 참여한 후보와 방송국이 합의해 해결해야 한다. 이미지 조작을 막고 객관적인 거리를 최대한 유지하기 위해 클로즈업을 피하고, 한 후보가 얘기하는 동안 다른 후보의 반응을 카메라에 담지 않는다는 합의 등이 그것이다. 토론 장소의 배경 색깔, 카메라 대수, 카메라 설치 장소, 조명 색깔 및 광도까지도 합의 대상이다.

프랑스에서는 각 후보가 아예 보조 연출자를 지목할 수 있다. 주 연출자가 화면을 새로 조작할 때는 이들 보조 연출자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 어느 나라나 텔레비전 토론은 생방송으로 진행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으며, 어쩔 수 없이 녹화를 해야 할 경우에도 편집은 허용되지 않는다.

그러나 언론사가 텔레비전 토론을 주도하고 있는 한국의 현실에서 이같은 논의는 공허할 뿐이다. KBS의 한 관계자는 ‘공정성 시비가 계속될 것을 생각할 때 부담스럽기는 우리가 오히려 더하다. 하루 빨리 이를 전담하고 조정할 기구가 생기기를 바랄 뿐이다’라고 말했다.

올해를 흔히 ‘대선 텔레비전 토론의 원년’이라 부른다. 92년 당시 김영삼 민자당 후보는 ‘일정이 촉박하다’며 텔레비전 토론을 거부했다. 그러나 방송사들은 이번에도 토론을 거부하는 후보가 있다면 명패가 놓인 빈자리를 그대로 두고서라도 텔레비전 토론회를 강행하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토론회 참여 의무화 조항은 아직 법제화되지 않았다). 그 의지를 받쳐줄 제도 개선이 절실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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