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처 기업가에서 영화 배우까지
  • 金恩男 기자 ()
  • 승인 2000.03.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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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6 성골' 전대협 세대의 어제오 오늘/정계 입문 둘러싸고 찬반 논란 뜨거워
386이라고 다같은 386이 아니다. 386 내부에서도 이번 총선을 계기로 두드러지게 약진한 집단이 있다. 이른바 ‘전대협(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세대’가 그들이다.

1987∼1992년 전대협을 이끌었던 의장 6명 가운데 이번 총선에 출마하는 사람은 무려 3명. 전대협 제1기·3기 의장 이인영·임종석 씨가 집권 여당 공천을 받은 것말고도 제4기 의장 송갑석씨가 광주 남구에서 무소속 출마를 선언했다. 전대협 주요 간부 출신인 우상호씨(제1기 부의장)와 박재혁씨(1987년 경남대 총학생회장)는 각각 서대문 갑과 마산 합포에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한다.

왜 전대협 세대인가. 자의든 타의든 눈 깜박할 사이에 한국 사회를 움직이는 실세 집단으로 떠오른 전대협 세대의 어제와 오늘을 살펴본다.
전대협 의장 6명 중 3명이 총선 출마

전대협이 발족한 것은 1987년 8월18일이다. 전대협 하면 6월항쟁을 떠올리는 사람이 많은데, 6월항쟁을 이끈 것은 서대협(서울지역 대학생 대표자 협의회)을 위시한 지역 학생 조직이었다. 항쟁의 성과를 발판 삼아 전국적인 학생 조직으로 거듭난 것이 전대협이다.

초대 전대협 의장과 부의장은 각각 이인영·우상호 씨. 전대협 1기 비서실장으로 정책 브레인 역할을 맡았던 이철우씨(서울시립대)는 현재 고향인 경기도 포천에서 활발한 지역 운동을 벌이고 있다. 포천·연천 주민 공동체인 ‘한탄강 네트워크’, 농촌 소규모 학교 통폐합에 반대하는 ‘작은 학교를 지키는 사람들’이 그가 앞장서 만든 모임이다.

이밖에 월간 <말> 기자인 정지환씨(서울시립대), 올해 성공회대 중국학과 교수로 임용된 이남주씨(서울대), 국회의원 보좌관을 지내다가 최근 이인영 후보 캠프에 합류한 최종윤씨(고려대)가 전대협 1기 주요 간부 출신이다.

이듬해 출범한 전대협 제2기는 당시까지 금기로 여겨졌던 통일 문제를 정면으로 제기해 한국 사회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통일 운동에 불을 당긴 것은, 그해 3월 서울대 총학생회장 후보였던 기호 2번 김중기씨가 선거 유세장에서 읽어 내린 ‘김일성대학 청년학생에게 드리는 공개 서한’.

유세 이후 즉각 수배령이 떨어져 곤욕을 치른 김씨는 졸업 이후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을 나와 배우로 변신했다. 최근 개봉한 <신장개업>이라는 영화에서 “중국 요리의 기본이 짜장면이라면 중국집의 기본은 배달이라고 봐!”를 외치던 ‘천방지축 철가방’을 기억하는지. 이 배우가 바로 김중기씨이다. 김씨는 최근 <필름 2.0>이라는 영화 전문 포탈 사이트(5월 오픈 예정) 편집장을 맡아 또 한번 변신을 예고하고 있다.

제2기 전대협 의장은 오영식씨(당시 고려대 총학생회장), 부의장은 정명수씨(당시 연세대 총학생회장)였다. 졸업 이후 통일시대민주주의국민회의 청년위원회 부위원장·전대협동우회 회장을 맡으며 재야를 꾸준히 지킨 오씨와 달리 정씨는 1992년 세종정보기술을 설립해 정보통신 사업이라는 신천지에 뛰어들었다.

초창기에는 시행 착오도 많았지만 오늘날 세종정보기술은 직원 18명, 매출액 23억 원에 이르는 중견 기업으로 성장했다. 연세대 학생회장 시절 관할 서대문경찰서장과 안면을 트고 지낼 정도로 친화력을 과시했던 정씨는 오늘날에도 벤처협의회나 386 세대 모임을 자유롭게 넘나든다. 그가 ‘구제’한 운동권 후배만도 부지기수이다(세종정보기술 직원 가운데 80% 이상이 전대협 출신이다).
마당발 총학생회장, 군대간 투쟁국장

서울대 총학생회장 선거 때 김중기씨의 러닝메이트였다가 훗날 전대협 2기 투쟁국장으로 임명되어 공권력을 괴롭혔던 유재석씨. 1988년 ‘전두환·이순자 체포 결사대’를 앞장서 지휘한 그는 백 명도 넘는 청년 학생의 병역을 ‘면제’시켜 준 것으로 악명을 떨쳤다(물론 현행법을 위반한 덕분이었다). 그러나 막상 그 자신은 군대에 소집되어 3년 만기를 채우고 제대함으로써 주변을 어처구니없게 만든 유씨는, 졸업 이후 대기업 계열 정보통신 회사에 근무하다가 최근 외국인 기업으로 자리를 옮겼다.

1989년 출범한 전대협 제3기에서 가장 두드러진 인물은 역시 두 임씨. 역대 전대협 회장 가운데 최장기 ‘도바리’ 신기록을 수립하며 ‘신출귀몰 임길동’이라 불렸던 제3기 의장 임종석씨(당시 한양대 총학생회장)와 ‘통일의 꽃’ 임수경씨(한국외국어대)는 대중적인 인지도에서 지금도 웬만한 사회 명사를 앞지르고 있다.

현재 임수경씨는 미국 코넬 대학에 유학 중인데, 임씨가 방북하기 1년 전인 1988년에도 전대협 대표를 북한에 파견하려고 밀항 루트를 알아 보고 후보자를 물색한 일이 있다는 것이 정명수씨의 증언이다. 이것이 실현되었다면 ‘통일의 꽃’은 임씨 아닌 다른 사람이 될 수도 있었을 노릇이다.

제3기 부의장을 지낸 문광명씨(당시 서울대 총학생회장)는 징역 3년형을 받고 출소한 뒤 사법고시에 도전해 변호사로 변신했다. 사면 복권이 되었는데도 국가보안법을 위반한 전력 때문에 바라던 검사 임용에서 탈락한 문씨는, 아픈 경험을 딛고 2년차 햇병아리 변호사로서 법조 경험을 차근차근 쌓고 있다. 문씨가 근무하는 곳은 해상 보험 관련 소송을 전문으로 다루는 세경합동법률사무소이다.

전대협 제4기가 출범한 1990년은 광주항쟁 10주년을 맞은 해이기도 하다. 이같은 상징성에 힘입어 전대협 역사상 최초로 지방대 출신이 의장으로 선출되었는데, 그가 바로 송갑석씨(당시 전남대 총학생회장)였다. 징역 5년형을 만기로 채우고 출소한 뒤 ‘미디어 메써드’라는 회사를 설립하며 벤처 기업가로 변신하는 듯했던 송씨는 올 들어 급작스럽게 정계 진출을 선언했다.
‘DJ가 공천하면 아무리 후진 정치인이라도 당선될 것으로 자만하면서 호남 정치를 10년 전, 100년 전 수준으로 후퇴시키는 집권 여당에 본때를 보이고자’ 인생 설계를 수정하게 되었다는 것이 송씨의 설명이다. 송씨는 전남 지역 시민단체가 꼽은 공천 부적격자 명단에 오르고도 재공천된 임복진 의원을 상대해 광주 남구에서 한판 승부를 펼칠 계획이다.

이밖에 전대협 5기 의장 김종식씨(당시 한양대 총학생회장)는 현재 ‘무쇠다리’라는 유통업체에서 근무하고 있다. 실물 경제를 2∼3년간 경험한 뒤 대학원에 진학해 경제학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겠다는 것이 김씨의 구상이다. 당시 부의장 이철상씨(당시 서울대 총학생회장)는 ‘바이어블 코리아’라는 유망 벤처 기업을 운영하고 있다. 이번에 민주당 공천 후보로 이름이 오르내리기도 했던 이씨는, 서울 동작 갑에서 끝내 쓴잔을 마셨다. 5기 대변인을 맡았던 허동준씨(당시 중앙대 총학생회장)는 동작 을에서 무소속 출마를 준비하고 있다.

전대협의 마지막 의장 태재준씨(당시 서울대 총학생회장)는 현재 미국 유학을 준비 중이다. 1995년 출소한 뒤 성남 외국인 노동자의 집에서 자원봉사자로 일하던 중 ‘새 시대의 진보 운동은 볼론티어 방식으로 진행될 것’이라는 깨달음을 얻고 사회복지로 전공을 바꾸었다는 그는 지난해 서울대 보건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유학을 마치고 유엔이나 국제노동기구(ILO) 같은 국제기구에서 경험을 쌓은 뒤 ‘한국판 베버리지 보고서’를 작성하는 것이 그의 꿈이다(2차 세계대전 직후 영국 정부는 베버리지 보고서를 토대로 사회안전망을 확충했다).
전대협 상종가, 時運인가 역량인가

송갑석씨는 ‘전대협 세대야말로 시운(時運)을 잘 만난 세대’라고 표현한다. 실제로 전대협 세대는 ‘정권을 상대로, 한국 현대사에서 최초로 승리를 전취한 세대’이며, ‘이기는 싸움에 익숙한 세대’이기도 하다. 하다못해 출판사말고는 취업할 길이 막막하던 선배 운동권 세대와 달리 정보통신 부문이라는 새로운 가능성에 도전할 수 있었던 것도 이들 세대에 주어진 시대적 행운이었다.

그러나 거듭된 행운은 주변의 질시를 낳는 법. 2000년 총선시민연대가 불붙인 정치권 물갈이 요구의 최대 수혜자로 전대협 세대가 떠오르면서 ‘전대협이 386 세대의 성골(聖骨)이냐’는 비아냥마저 나오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전대협 세대 내부에서마저 비판이 만만치 않다. “전대협은 백만 청년 학도를 대표하는 이름이었다. 몇몇 개인이 그 이름을 도용해도 좋다고 누가 허락했는가.”(이화여대 84학번 ㅇ씨)
‘준비 없는 진출’은 동세대가 전대협 출신의 정계 입문을 가장 극렬하게 비판하는 대목이다. “격렬한 생존 경쟁에 뛰어든 것도 아니고, 사회운동에 새로운 비전을 제시한 것도 아닌 채 10년 가까이 주변부를 맴돌았던 이들이 정치판에 들어간들 제목소리를 낼 수 있을 것인가.”(89년 ㅇ대 총학생회장) “전국 대학에서 한 해 백 명이 넘는 총학생회장이 쏟아져 나온다. 이러다가 총학생회장이 ‘예비 정치꾼’을 양산하는 자리가 될까 두렵다”는 냉소적인 전대협 전직 간부도 있다.

이와 달리 전대협 세대가 갖고 있는 내부적 특성에서 정계 진출의 당위성을 찾는 시각도 있다. “민주화가 이만큼이나마 확장되는 데 전대협이 기여한 몫을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전대협 세대의 정계 진출은 과거와 다르다. 이미 짜인 정치 판에 자기를 끼워 맞춰야 했던 선배 세대와 달리 전대협 세대는 일정 부분 스스로 싸워 쟁취한, 바로 그 공간에 들어가려 하고 있다.” 서울대 총학생회장 출신 문광명씨의 주장이다.
김종식씨는 또 이렇게 말한다. “새로운 철학과 세계관으로 무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전대협 세대가 현역 의원보다는 100배 가량 낫다. 전대협 세대는 정치판 물갈이라는 국민적 요구를 수행할 수 있는 최적임 집단이다.” 송갑석씨는 대중 운동 경험을 전대협 세대의 주요 자산으로 꼽았다. “전대협 간부는 고비마다 백만 청년 학도와 조국의 운명에 영향을 끼칠 중차대한 결정을 내려야 했다.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이같은 경험 속에서 우리는 현실에 기반을 둔 정치적 판단 능력을 키워 왔다.”

어느 쪽이 옳든 선택은 이제 유권자의 몫이다. 전대협 ‘불패(不敗) 신화’는 과연 21세기에도 이어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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