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왜 ‘거짓말쟁이’가 되었나
  • 안은주 (anjoo@sisapress.com)
  • 승인 2002.02.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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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광옥·이형택·유승준 등 ‘대표 선수’ 6명의 심리 분석
정치인이나 연예인에게 적당히 숨기고 가장할 줄 아는 능력은 오히려 ‘프로로서의 자질’로 평가된다. 그러나 요즘 정치인과 연예인의 거짓말 퍼레이드는 그렇게 너그럽게 보아 넘길 수위를 넘어섰다. ‘할복 자살하겠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다’는 말을 서슴없이 공언하는 그들을 보면서 사람들은 의문을 갖는다. ‘나중에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고 저렇게 큰소리치는 것일까’ ‘평소에 어떤 생각을 갖고 있었기에 저런 표현이 튀어나오는가’ 등등.


대부분의 거짓말은 ‘자기 보호 본능’에서 나온다. 미국 심리학자인 찰스 포드 교수에 따르면, 어린 시절에 과보호나 학대를 받은 사람은 그 때의 상처를 잊기 위해 어른이 된 뒤에도 거짓말을 지어낸다. 상처가 드러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거짓말로 대처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부 병적인 거짓말쟁이들만 자기 보호 수단으로 거짓말을 선택하는 것은 아니다. 세 살 난 아이부터 여든 된 노인까지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기 보호 본능에 사로잡혀 거짓말을 한다. 특히 위기에 처하면 사람은 거짓말을 해서라도 자기를 보호하려는 본능을 강하게 나타낸다. 위기 때에는 뇌에서 충동조절 물질인 세로토닌이 적게 분비되기 때문에 앞뒤 분간 없이 감당 못할 거짓말이 튀어나오기도 한다. 그래서 정신분석학자들은 거짓말 속에서 그 사람의 ‘무의식적 욕구나 진실’을 엿보기도 한다.
그렇다면 최근의 거짓말 퍼레이드 속에서는 어떤 ‘본능적 진실’을 찾아볼 수 있을까. 세상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던 대표적인 거짓말을 정신과 전문의의 도움을 받아 분석했다.

"한푼이라도 받았다면 할복 자실하겠다"
신광옥 전 법무부 차관




이처럼 극단적인 표현이 나올 가능성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평소 그런 표현을 자주 사용했기 때문이고, 또 다른 가능성은 내면적 욕구가 자신도 모르게 드러난 것이다. 신씨의 경우에는 ‘뇌물 안 받으며 청렴 결백하게 살고 싶었던’ 잠재적 소망이 반영된 표현일 가능성이 높다. 깨끗하게 살지 못할 바에야 ‘사무라이’처럼 깨끗하게 죽고 싶었는데, 그렇게 살지 못한 자신이 원망스러워 부지불식간에 ‘할복 자살’이라는 말이 튀어나온 것이다.


특히 과거에 억울한 일을 많이 당한 사람일수록 이런 극단적인 표현으로 잠재적 소망을 표현하기 쉽다. 정신과 전문의들은 인지 기능이 발달하지 않은 어린아이에게서 욕구나 본능이 현실과 뒤섞여 나오는 것처럼, 신씨도 이 말을 할 당시 인지 기능에 혼란이 온 것으로 본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도 없다."
대통령 처조카 이형택



이 표현에도 ‘말한 대로 살고 싶다’는 이씨의 잠재적 소망이 일부 담겨 있다. 그러나 신광옥씨와 달리 이씨의 이 표현에는 ‘자기 믿음’도 중첩되어 있다. 정신분석학자들은 이씨가 이번 사건과 관련해 비난받는 것을 억울하게 느낄 수 있다고 본다.


인간은 어떤 일을 추진할 때 자기 나름의 명분과 논리를 세우게 마련이다. 이씨는 보물 발굴 사업을 추진할 때 국익을 위한다는 명분을 갖고 있었다. 자신이 받기로 한 수익 15%는 ‘나랏일’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얻은 사소한 보상에 불과하다. 그래서 이씨는 국정 감사 때까지만 해도 자신은 부끄러운 일을 전혀 하지 않았다고 자신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경제수석을 오래 하니 누군가 모함을 하는 것 같다."
이기호 전 청와대 경제수석



자신이 결백하다는 사실을 확인시키기 위해 끌어온 논리이다. 이씨는 진실이 드러나기 전에 “보물선 발굴과 같은 건의나 제안은 지금도 사무실에 계속 오고 있다. 그런 내용을 보면 사기꾼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얘기를 듣고 내가 어디에 전화를 하고 그러겠는가”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자신이 보물선 사업처럼 황당한 일에 관여하지 않을 정도로 얼마나 이성적인 사람인가를 논리적으로 강조했던 것이다. 의심받는 처지에서 ‘모릅니다’ ‘기억 안 납니다’와 같은 수동적인 답변으로 상대의 공격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논리적인 거짓말로 상대를 설득하려 했던 이씨는 ‘탁월한 거짓말쟁이’로 평가받을 만하다. 누군가 자신의 진실을 의심하는 상황에서 상대의 공격을 피하며 완벽하게 속일 수 있는 사람은 흔치 않다.



"정치인은 한 명도 모른다. 정치인에게는 단돈 10원도 준 적이 없다."
이용호 전 삼애인더스 회장



궁지에 몰렸을 때 내놓기 쉬운 전형적인 변명이다. 이씨는 최근 거짓말 퍼레이드에 출전한 ‘선수’ 가운데 가장 수준이 낮은 거짓말을 구사했다. 이씨는 처음에는 ‘모르쇠’로 일관하다가 증거가 나올 때마다 말을 바꾸었다.


정치인을 한 명도 모른다고 했다가 증거를 들이대면 ‘돈 준 정치인이 한두 명 있다’고 말을 바꾸고, 누구에게 주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가 정황 증거가 나오면 실토하는 식이었다. 그러다가 더 버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면 “동문회에는 갔어도 동창회에는 간 적이 없다”는 식으로 스스로 거짓말의 단서를 드러내기도 했다.


“1억5천만원을 재형저축에 가입해 돈을 불렸다”고 했다가 “고금리 금융상품과 주식 등에 투자해 원금을 불렸다”고 말을 바꾸었던 안정남 전 국세청장의 거짓말도 비슷한 사례로 꼽을 수 있다.



이씨는 비밀이 끝까지 밝혀지지 않을 수 있다는 희망 때문에 드러난 사실만 인정하고 나머지는 부인하는 태도를 보인 것이다. 또 나중에 거짓말이 탄로난다 해도 그 거짓말 때문에 가중 처벌되는 경우가 거의 없었던 탓이기도 하다.



"사랑하는 사람과 성관계를 맺는 데 뭐가 어려워서 그런 것(필로폰 투약)을 하겠습니까?"
탤런트 황수정


이 말 자체만 놓고 보면 논리적이어서 황씨가 진실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정신과 의사들은 애초에 ‘최음제인 줄 알았다’고 진술했던 만큼 이 말은 거짓이라고 본다. ‘필로폰일 줄 모르고 먹었다’는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만들어 낸 논리 가운데 하나라는 것이다. 황씨는 검찰 조사 과정에서 했던 말을 법정에서 대부분 뒤집었다.


“기억 안 나요”로 일관하다 간간이 “검사님은 집에서 옷 벗고 다니세요?”(강씨의 몸에서 주사 자국을 보지 못했느냐는 질문에)라는 식으로 받아치며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다.


‘모른다’를 고집하면서 간간이 검사를 공격했던 것을 전략적인 행동으로 보기는 어렵다. 사적인 문제를 놓고 법정에서 설전을 벌여야 하는 상황에 화가 나 검사에게 화풀이를 했던 것으로 보는 편이 옳다.



"미국 시민권 신청 이후에야 한국에서 병역 의무 대상자가 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가수 유승준


최근 거짓말쟁이로 몰린 유승준씨의 경우에는, ‘군대에 가겠다’고 했던 과거의 발언보다는 요즘의 변명이 거짓일 가능성이 높다고 정신과 전문의들은 말한다. 지난해에는 징집 영장을 받은 상태가 아니어서 깊이 고민하지 않고 막연하게 ‘군대에 갈 수 있다’고 생각했고, 그 생각을 말로 표현했던 것뿐이다.


그러나 미국 시민권을 취득함으로써 과거의 발언이 거짓말로 둔갑한 최근에는 그 파장을 최소화하기 위해 여러 가지 논리를 끌어들여 변명하고 있다는 것이다. 병역 의무 대상자가 된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는 말은 그 변명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도움말:김병후 원장(김병후정신과), 정혜신 원장(신경정신과 마음과마음), 하지현 과장(용인정신병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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