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년-그 때 그 사람들-의병장 최익현
  • 박성준 기자 (snype00@sisapress.com)
  • 승인 2004.08.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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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늑약을 당할 당시, 일본측에서 보자면 조선에서 가장 요주의 인물 중 한사람이 바로 의병장 최익현이다. 그는 이미 1876년 이른바 '운양호 사건'의 결과로 일본과 '병자수호조규' 이른바 '강화도 조약'을 맺을 때부터 '척화소'를 올린 것을 비롯해, 갑오경장/명성황후 시해 사건/단발령 등 일본이 한반도에 할걸음씩 발걸음을 들여놓을 때마다 일본 또는 친일파와 정면으로 부딪쳤고, 그때마다 귀양/자택 감금 등의 박해를 받았다.
그는 정치적 대담성으로도 이름이 높았다. 대원군이 나는 새도 떨어트릴만큼 권력의 절정기를 누리던 시절인 1860년대말, 그는 시폐4조 소를 올려 대규모 토목 공사(경복궁 중수를 말함), 당백전 유통 등 대원군의 실정을 정면 공격해 관직을 삭탈당하기도 했으며, 1873년에는 대원군의 비정을 또 한번 공격해 대원의 10년 세도를 붕괴시키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기도 했다.
1905년 최익현의 나이는 73세. 말하자면 이 무렵 그는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들고 있었으며, 국가적 차원에서 보면 '원로'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생애 어느 때보다 이 한해를 바쁘고 고달프게 살았으니 조선 속국화에 저항하기 위한 마지막 몸부림을 쳤기 때문이다. 이 해 그는 체포와 압송, 석방과 구금을 거듭했다. 발단은 1904년 12월에 궁궐에 입대하여 고종에게 제출한 정무 5조와 관련된 건의서였다. 여기서 특히 문제가 된 것은, 대외 정책과 관련된 내용으로, 그는 조정이 섣불리 '자주(自主) 외교'와 '교린 외교' 펼치는 바람에 온 나라의 재원과 이것을 '저들'(여기서는 일본)에게 탈취당하게 됐다며 이를 원상으로 되돌릴 것과, 국가 전례의 잘못된 것으로 1894년 갑오개혁 때 중국이 내리를 시호 제도를 폐지한 것을 대표적인 예로 들어 이의 부활을 촉구했다. 이후에도 그의 '상소 투쟁'은 계속되어, 1904년 12월부터 이듬해 정월까지 그는 친일파를 찢어죽일 것과 덕망 있는 인재를 등용할 것을 요구하는 상소문을 4번에 걸쳐 올렸다.
이를 빌미로 그는 1905년 이토 히로부미가 고종에게 을사늑약 체결을 강압할 때 이토를 대동해 무력 시위를 벌었던 당시 한국 주둔 일본 군 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에게 체포되어 감금됐다가 포천으로 압송당했다. 최익현은 다시 포천에서 상경해 상소를 준비하다 또 한번 일본 헌병대에 체포 감금된 뒤 이번에는 정산으로 압송됐다. 이해 11월 을사늑약 체결 이후, 최익현은 또 한번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늑약 체결에 참여했던 '을사 5적'을 처벌할 것을 주청하는 '청토오적소(請討五賊疏)'를 올리는 한편, 의병 궐기를 위한 준비에 본격적으로 팔을 걷어붙였다.
이 때 올린 상소문의 내용은 앞서 위암 장지연이 황성신문에 발표한 '시일야방성대곡'과 대동소이하다. 심지어 상소문 내용 중에 병자호란의 주전파 김상헌(호 청음)이 조약문(병자호란 강화 조약문)을 찢고 결사 항전을 주장했던 전례를 언급한 것까지 같다. 장지연이 '시일야방성대곡'을 발표한 것이 11월20일이요, 최익현이 상소문을 쓴 것이 11월3일이었으니, 기세상으로 보아서는 오히려 최익현의 상소문이 장지연 논설에 영감을 준 듯한 흔적마저 느껴진다.
어쨌거나 최익현은 조국의 속국화에 온몸으로 저항했지만 상황은 상소나 단기필마 식 의병 활동으로 사태를 되돌리기에는 가능성이 없는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게다가 최익현은 시대의 변화를 민감하게 받아들이고 이에 합당한 해결책을 제시하기에는 너무 나이가 들어 있었으며, 세계관 또한 지나치게 전통 지향적이었다. 가령 국가 전례에 관한 항목만 하더라도, 그는 여전히 종묘에 명나라 시호를 부활할 것 등 '전통'에 매달리고 있었다. 그의 천하관은 동아시아 질서가 이미 깨졌음을 극명하게 보여준 사건, 즉 청일전쟁을 경과한지 10년이 경과한 마당에도, 여전히 중국을 종주로 한 유교적 천하관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수많은 소를 올렸지만, 여기에 일본이든 유럽이든 미국이든 장기 10년~20년 앞을 내다보고 한국의 젊은이들을 외국에 유학시켜 서구의 앞선 문물, 국제 감각 등을 익히게 하고, 이를 통해 조국의 앞날을 새롭게 설계하자는 식의 적극적인 발상은 찾아볼 수 없다.
반면 최익현이 무기력한 고종을 상대로 친로파와 친일파를 척결하라는 소를 무수히 올리고 급기야는 빈약한 무기를 들고 의병 활동에 나설 무렵,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는 러일 전쟁 협상을 유리하게 이끌고, 한국에 대한 지배권을 확실히 보장받기 다각도의 채널을 통해 주변에서부터 유리한 환경을 조성하는 치밀하고 용의주도한 외교 술책을 성공적으로 펼치고 있었다. 가령 이토는 미국을 자기네 편에 서도록 하기 위해 러일 전쟁 막바지에 미국에서 수학한 가네코 겐타로를 미국에 보내 시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 등 미국의 정치 지도자들에게 줄을 대고 로비를 펼치게 했다. 당시 일본은 종전 협상이 속히 이뤄지지 않을 경우, 오히려 러시아에게 되치기를 당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적절한 시점에 이뤄진 대미 설득은 효과를 거두어, 미국은 이후 종전 협상의 중재자로 적극 나서게 되고, 1905년 7월에는 아예 '가스라-테프트 조약'을 통해 한국에 대한 일본의 지배권을 인정해주는 '보증 수표'까지 받아냈다. 이와 동시에 일본은 고무라 주타로 당시 외무대신을 대표로 러일 전쟁의 승전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중국의 위안스카이 등을 상대로 하여 만주 관할권에 대한 협상을 개시하고 있었다. 을사늑약의 강제 체결은 바로 이같은 일본의 외교 분야 성과를 바탕으로 아무도 일본에게 시비를 걸 수 없는 상황에서 이뤄진 결과다. 한국 속국화의 대세는 국내 정세와는 무관하게 이미 한반도 바깥에서 결판 나고 있었다.
의사늑약 체결 후 늑약의 부당성을 알려 국제 사회의 지지를 얻어내려는 외교 노력이 한국의 조정에서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08년 영국인 토마스 베델이 발행하는 대한매일신보에 의해 폭로된 이른바 '고종 친서 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을사늑약의 부당성에 대한 국제 사회의 지지를 호소한 고종의 친서는 한일 협약 체결 뒤, 고종이 일본의 눈을 피해 러시아 독일 미국 프랑스 정부에 몰래 보낸 것으로, 통감부 당국의 조사 결과 호머 헐버트라는 미국인이 고종으로부터 건네받아 루즈벨트에게 전달했던 문서인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당시 루즈벨트 대통령은 이 친서가 보호 조약 체결 이전에 작성된 것이며, 대한제국측이 공표하지 말아줄 것을 희망해 공문서로 취급할 수 없다며 접수를 거부했다는 사실도 아울러 밝혀졌다. 미국은 이미 1905년 일본과 필리핀/한국의 관할권을 맞교환하며 서로를 봐주기로 약속한 상황이었으니, 고종의 친서가 제 아무리 명분과 호소력이 있었어도 미국에 의해 받아들여지기는 만무한 상황이었다.
최익현은 구국의 수단을 위한 최후 선택지로 죽음을 선택했다. 1906년 쓰시마에서의 그의 죽음은 의롭고 떳떳하다. 하지만 한 나라의 존엄과 주권이 억울함에 대한 비분 강개나 대의 명분에 대한 확신, 또는 이에 대한 절절한 호소만으로 지켜질 수 없음을, 우리는 최익현의 최후에서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정도의 차이와 표현 방식은 다를 지언정, 강대국이 자국의 이해를 관철하기 위해 약소국을 억압하고, 때로 저희들끼리 작당하여 타국의 운명을 농단하는 방식은 제국주의 시대가 거하고, 세계화 시대가 도래한 오늘날에도 변함 없는 국제 정치학의 속성이다. 과연 이것이 맞다면, 우리는 최익현의 비장한 최후에서 무엇을 구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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