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년-미국3
  • 박성준 기자 (snype00@sisapress.com)
  • 승인 2004.12.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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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저술가 사상가는 어느 정도는 그가 사는 시대에 의해 형성된다Every writer and thinker is to some extent shaped by times in which he lives.
별로 새로운 것 없는 얘기지만 미국의 마한 연구가 중 한사람인 미국의 프랜시스 셈파라는 사람이 마한의 동아시아 전략을 논한 논문집 서문을 쓰면서 한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사상은 시대의 반영입니다. 마한도 예외가 아닙니다.
마한은 1840년에 나서 1914년, 즉 1차 대전이 난 뒤 4개월 후에 죽었습니다. 1840년이면 조선 땅에서 정조가 죽었을 때이고, 다산 정약용 선생이 중년에 접어들 때입니다. 그는 본격적인 저술 활동을 1890년대에 시작했습니다. 해군 출신이서 바다에 괸심이 많았고, 미국은 바로 이 때 영통 팽창을 거의 마무리지을 때, 즉 국경선이 태평양 연안까지로 확장했을 때입니다. 1890년대에 접어들어 미국인에게는 바다가 보였습니다. 이 바다를 어떻게 할 것이냐. 진출할 것이냐 말 것이냐. 당연히 미국은 진출하기로 결정했고, 그 논리를 뒷받침한 것이 바로 마한의 3부작입니다. 제국주의에 본격적으로 합류한 것입니다.
마한의 머릿속에는 항상 유럽이 있었습니다. 저 놈들이 힘이 센데, 미국이 제국주의를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우선 직접적으로 부딛치면 안된다, 가장 센 놈이 영국이므로, 영국에는 철처히 협조하는 모습을 보이자. 영국도 해양 세력이고, 우리도 따지고 보면 해양 세력이니 해양 세력끼리 손잡자. 마한은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이 때 동아시아에 새로운 해양 세력으로 떠오른 것이 일본. 결국 미국은 같은 해양 세력인 일본과 손을 잡기로 합니다.
20세기에 들어서자마자 마한은 동아시아 문제에 관심을 기울입니다. 그는 하퍼스가 펴내는 뉴 먼슬리 매거진에 3월부터 미국의 대 아시아 전략을 담은 일련의 논문을 발표하고, 이것이 나중에 <아시아 문제 designtimesp=29665>라는 책으로 묶입니다.
1870년대까지 마한은 미국의 전통적인 고립주의자였습니다. 그런데 1893년, 즉 청일 전쟁이 발발하기 한해 전 마한은 이미 중국을 미국과 유럽의 잠재적 위협이라고 규정하기에 이릅니다. 왜 약 20년 뒤 마한의 생각이 바뀌었을까. 미국의 영토 확장이 대강 마무리됐기 때문입니다. 미국은 1803년 루이지에나를 사들인 것을 필두로, 플로리다, 텍사스, 뉴 멕시코, 아리조나, 알래스카를 사들이거나 합병합니다. 미국의 영토 팽창이 순조롭게 진행되자, 마한은 미국의 힘의 투사를 '명백한 운명manifest destiny이라는 용어로 포장하기에 이릅니다. 이때부터 해외 진출의 기회를 엇보았던 것인데, 1985년 청일전쟁의 결과가 일본의 승리로 돌아가자 마한은 충격을 받습니다. 아니 중국이 그렇게 허약하게 무너지다니.
1897년 마한은 루즈벨트에게 편지를 보냅니다(당시 루즈벨트는 대통령이 아니었음). '유럽이 아닌 아시아가 바로 우리한테 밀접한 이해의 최대 위협이다'. 그 때 마한이 가장 두려워 한 것이 러시아였습니다. 이를 제어할만한 대안은 영국이었습니다. 그러나 마한은 영국만으로는 러시아의 남하를 막지 못할 것이라고 내다봤습니다. 그러면서 제안하기를, 미국이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영국 독일 일본 미국이 손을 잡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카터 정부 시절(이미 25년 전 얘기입니다) 안보담당 보좌관을 지냈던 즈비그뉴 브레진스키는 <거대한 체스판Great chess game designtimesp=29669>에서 유라시아 장악을 주장해 유명해졌습니다. 그러나 '유라시아 세력 균형'의 원조는 마한입니다.
그는 장차 세계 분쟁의 핵심 지역(international flash points)으로 러시아의 주변부를 꼽았습니다. 그게 바로 어디냐, 소아시아를 포함한 중동과, 중국을 포함한 동아시아입니다. 아프가니스탄, 이란, 이라크, 그리고 요새 아주 골치 아프게 돌아가는 우크라이나, 그리고 한반도. 공통점이 뭐냐. 마한이 말한 플레쉬 포인트라 이겁니다.
1898년 3월, 루즈벨트 대통령은 마한의 주장에 공명한 나머지 그에게 직접 편지를 띄웁니다. '당신 편지가 나로 하여금 머릿 속에만 뱅뱅 돌던 문제들을 얼마나 명쾌하게 정식화시켜줬는지 당신은 아마 잘 모르실 거요' 하면서 말입니다.
약 10년간 세계 동향을 파악하며 머리를 굴린 끝에 아시아 전략의 핵심을 담은 <아시아 문제problem of Asia designtimesp=29673>는 1904년 완전히 책으로 엮여져 나옵니다.
안중근 김 구 이런 분들이 풍전등화와 같은 국운을 걱정하며, 그 대안을 찾아나설 무렵, 미국은 이미 아시아를 어떻게 다뤄야 할지를 알려주는 '지도'를 손 안에 쥐고 있었습니다. 요새 유행하는 말로 '컨샙'이 잡히면, 그 다음 행동은 '땅 짚고 헤엄치기'입니다. 그 발빠른 대응이, 윌리엄 하워드 테프트와 일본의 당시 총리 카스라 다로간 밀약을 순발력 있게 탄생시켰고, 러일 전쟁 때 서둘러 전쟁을 종결지으려는 일본 편을 들어 강화 협상 중재를
서게 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이 때 미국 내에서는 미국의 제국주의화에 대해 반대 여론이 없었느냐. 조지 부시 정부가 이라크 침공을 결정할 때 미국 안에서 상당한 반전 여론이 있었듯이, 그 당시에도 반대 여론이 드높았습니다. 마크 트웨인 잘 아시죠. 그 이가 미국이 필리핀을 집어 먹으려 하자(1898년 파리 조약), 약 2년 뒤인 1900년경 대대적인 반대 운동을 벌인 것이 대표적입니다. 당시 미국 기업을 대표하는(오늘날 조지 부시의 일방주의 대외 정책을 노골적으로 반대하는 사람으로는 조지 소로스가 대표적이지요) 산업 자본가로는 앤드류 카네기를 꼽을 수 있습니다. 정계에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카네기는 '필리핀 독립'을 1900년의 민주당 강령에 집어넣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오늘날 '이라크 해방' 이후, 이라크 조기 철수를 주장하는 민주당과 사뭇 닮아 있습니다.
100년 전 필리핀 합병을 둘러싼 전략적인 배경, 그 전략의 실행 과정을 면밀히 들여다 보면, 앞으로 한반도 장래가 어떻게 풀릴지 대강 감을 잡을 수 있습니다. 1905년 무렵에 형성된 정세는 1914년까지 갑니다. 그리고 멀리는 2차 세계 대전까지 영향을 끼칩니다. 2차 대전 이후는 우리에게도 아주 친숙합니다.
다음 회에 1905년 이후 미국의 변화와 국제 정세를 좀 더 자세히 실펴볼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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