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핵1
  • 박성준 기자 (snype00@sisapress.com)
  • 승인 2005.03.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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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핵, 역사와 현실의 굴레1
-다시 월포위츠로1.

한동안 뜸했습니다. 2월부터는 다시 바지런을 떨려고 마음먹고 있었는데, 저희 잡지가 마감 시간을 옮긴다, 홈페이지를 개선한다, 컴퓨터를 교체한다 해서 거의 두달 가까이 북새통이었고, 개인적으로도 해외 출장이다 뭐다 해서 씨줄날줄을 개점 휴업 상태로 방치해놓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의 보잘 것 없는 글을 잊지 않고 읽어주시는 애독자 여러분께 다시 한번 머리 숙여 사과드리며, 새출발하려고 합니다. 능력은 미치지 못하지만 애독자 여러분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도록 깜냥껏 최선을 다해볼 작정입니다.


  제가 이 핑계 저 핑계로 집 나간 아이새끼마냥 씨줄날줄을 비운 사이, 참 많은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불행하게도 이 중 상당수가 과거 제가 연재하면서 나름으로 걱정하거나 예상했던 일과 상당히 겹칩니다. 얼마 전 미 국무부 군비통제 담당 차관 존 볼튼이 유엔 대사로 내정되더니, 곧이어 국방 부장관 폴 월포위츠가 세계은행 총재로 내정되었습니다. 미 국무장관 자리에는 파월의 뒤를 이어 콘돌리사 라이스가 장관이 되어 벌써 한국을 다녀가기도 했습니다.


   그 사이 북한은 핵 보유를 선언했습니다. 북한의 핵 보유 선언은 그 자체로 매우 당혹스럽게 여겨집니다. 그런가 하면, 일본 대사가 주재국의 수도에서, 독도는 자기네 땅이라고 대놓고 주장한 이후 교과서 개정 문제까지 겹쳐 한일 관계는 아예 수라장이 되었습니다.


  그러는 한켠에서는 또 미국과 일본의 동맹이 한층 강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현재의 추세로 보아 부시 정부가 공언했던 ‘미일 동맹 수준을 과거 영미 동맹 수준으로 격상시키겠다’는 다짐은 결코 허언으로 끝날 것 같지 않습니다. 더욱 전율할만한 것은, 미국이든 일본이든 냄비처럼 끓었다가 곧 사그러드는 우리네와 달리, 한번 방향을 잡았다하면 4년 이고 5년이고 긴 안목으로 차근차근 밀어붙인다는 것입니다. 지난 4년간은 테러와의 전쟁이다 이라크 침공이다 하여 동북아 정세의 변화 속도는 느렸습니다. 그런데 2기 부시 정부 들어서면서, 동아시아 정세는 유속이 빠른 여울목으로 급격히 빨려드는 듯한 느낌입니다.


  그러고 보니 문득 나름대로 짚이는 바가 있습니다. 제가 오래전 씨줄날줄을 시작하면서 폴 월포위츠에 대해 소개한 바 있지만, 그 뒤 제가 새로 접한 자료를 통해서 보니 월포위츠는 생각보다 훨씬 더 동북아 국제 정치, 그리고 한국과 관련이 깊은 사람이었습니다. 과거 제가 떠들었던 것은 뭘 몰라도 한참 모르고서 주제 넘게 떠든 것이 아닌가 자괴감이 들 정도입니다.


  알고 봤더니 그는 이미 1974~75년 경부터 한반도 사무를 처리해왔던 사람이었습니다. 요새 특히 문제가 되고 있는 바로 그 핵 확산 방지 관련 업무를 통해서였습니다. 그 뒤로도 중요한 고비 고비 때마다 월포위츠는 한반도에 등장합니다. 오늘날 대외적으로 ‘핵 확산 방지’ 하면 유엔 대사로 내정된 존 볼턴이 유명하지만, 그 전문성/연속성/경륜으로 따질 것 같으면 월포위츠가 훨씬 더 윗길입니다. 월포위츠가 이라크 침공의 설계자라 하는데, 이는 괜히 나온 게 아니고 40년 묵은 내력이 있습니다. 말하자면 그는 지난 40년간 핵 문제와 씨름해오며 잔뼈가 굵어 마침내 오늘의 위치에 오른 베테랑이라는 겁니다. 콘돌리사 라이스가 미국 외교의 사령탑이 됐다고는 하나, 진짜 큰 줄기를 잡고 움켜쥐고 있는 사람은 월포위츠입니다.


   미국 <로스앤젤리스 타임스>에서 오랫동안 활약했던 저널리스트이자 미국 외교 전문가인 제임스 만이 지난해 미국 부시 외교팀의 실체를 파헤친 바에 따르면, 월포위츠는 1973년초 미국 관가에 발을 들여놓습니다. 이 일이 있기 전 미국 닉슨 대통령과 키신저 국무장관이 소련과 데탕트를 추구하는데, 그 때 양측 주요 논점의 하나가 전략 무기 협상이었습니다. 이 때 닉슨 정부는 무기 협정을 승인받기 위해 의회에 정치적 양보 제스처를 취하는데, 그 중 하나가 소련과 협상을 벌였던 군비 통제 및 축소국의 주요 스텝들을 물갈이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때 의회에서 닉슨 정부를 압박했던 핵심 인물이 헨리 잭슨 의원이었으므로, 닉슨 정부는 그의 의중에 있는 인물을 새 국장에 앉혔는데 이가 바로 프레드 이클이라는 인물이었고, 월포위츠는 바로 이클의 가장 믿음직한 보좌관 중의 한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이클은 월포위츠를 곧바로 데려다 앉혔는데, 당시 예일대에 강의를 나가던 월포위츠의 나이는 갓 30살이었습니다.


  1974~75년. 한국은 프랑스로부터 플루토늄 재처리 시설을 들여올 궁리를 합니다. 소련과 중국의 지원을 받은 북한의 핵 프로그램이 한 단계 진전한 데 대해 불안감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냄새를 맡은 미국의 한국의 핵 개발 야심을 저지하기 위해 직접 개입합니다. 이 때 월포위츠의 그림자가 한반도에 쓱 비칩니다. 왜냐? 앞서 말한 프레드 이클 국장이 재처리 시설 수출을 막기 위해 프랑스와 벨기에 당국을 설득하러 돌아다니는데, 월포위츠는 바로 이를 실무적으로 뒷받침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제가 과문한 탓인지 몰라도 최근 수년간 월포위츠를 다루는 국내 언론의 기사에 이처럼 중요한 과거 경력이 숨어 있다는 사실을 자세히 보도한 경우를 눈 씻고 찾아봐도 찾지를 못하겠더라는 겁니다. 웬만큼 부지런 떨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공개된 사실인데도 말입니다.


  이후 월포위츠의 행적을 추적해보면 놀라울 정도로 일관성을 보입니다. 월포위츠의 행적은 미국의 오늘을 이해하는데 대단히 중요해보입니다. 그가 오늘날 미국의 대외 정책을 대표한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의 행적은 미국 대외 정책의 진화 과정과 변천 과정을 이해하는 데 매우 핵심적인 실마리를 던져줍니다. 워낙 중요한 인물이라는 점과, 앞으로 저의 글의 전개를 위해 다음 회에도 그의 행적을 좀 더 소개해올리기로 하면서 오늘은 여기서 신고를 마칠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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