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가 한국 정치인 놀이터냐”
  • 발렌시아 · 진창욱 해외 편집위원 ()
  • 승인 2005.07.08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교민들, 정계 인사 ‘줄방문’에 넌더리…준비도 없이 “고위 인사 만나게 해달라”

 
노무현 대통령이 지난해 11월 워싱턴 한·미 정상 회담 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들렀을 때 일이다. 소규모 한인 단체의 장 자리에서 물러난 ㅈ 아무개씨(여)는 교포 간담회 초청장을 받아들고 쓴웃음을 지었다. 그녀의 반응은 “나한테까지 이런 초청장이 왔네”였다. 로스앤젤레스 한국 총영사관이 한인 인사 간담회를 준비하면서 보낸 초청장이었지만, 그녀는 이 모임에 참석하지 않았다.

예전 다른 대통령의 경우라면 감히 초청을 받을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이라고 그녀는 말했다. 그러면서도 대통령 간담회 초청장이 왜 자기한테까지 올 수 있었는지에 대해 도대체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이다. ‘나는 변한 것이 없는데, 대통령 간담회 초청 대상 기준이 많이 내려간 탓인가 보다’ 정도가 그녀가 찾아낸 답이었다.

미국 로스앤젤레스 한인 단체의 한 유력 인사인 ㄱ씨는 “요즘 LA 한인 사회는 웬만한 한국 정치인 간담회 초청장은 거들떠 보지도 않는다”라고 전한다. 그는 또 “한국 대통령의 간담회 초청까지 묵살될 정도면, 초청 대상 기준이 내려간 것이 아니라, 한국 정치인에 대한 식상함이 더 큰 이유일 것이다”라고 풀이했다. ㄱ씨는 최근 한나라당 박근혜 총재의 LA 방문 때에도 간담회에 초청받았으나, 바쁜 일을 핑계로 거절했다.

로스앤젤레스 한인회 하기환 전 회장은 한술 더 뜬다. 박근혜 총재 간담회에 역시 불참했던 그는 “이젠 한국 정치인이 와도, 들을 말은커녕 나눌 말도 없다”라고 말했다.

로스앤젤레스 지역 지도급 한인 인사들의 말은 단순한 오만이 아니다. 이들이 최근 한국 정치인들과의 만남에서 겪은 실망감에 따른 반응인 것이다. 한인 사회에서 가장 잘 조직된 단체로 꼽히는 한미연합회 찰스 김 사무국장은 “한국 정치인들이 무더기로 LA를 찾아오는데, 도대체 왜 오는지 정말 이해할 수 없다”라며 혀를 찼다.

왜일까. 로스앤젤레스를 찾는 정치인들의 꼴 사나운 행태 때문이다. 미국 정부 인사나 정치인을 만나게 해달라고 해서 어렵사리 면담이나 회의를 주선하면, 한국 정치인들은 회의 내용이나 전략을 준비하지 않기가 예사다. 그저 상대방 주장을 ‘아니다’라고 부정 또는 부인만 한다고 그는 전한다. 한 386 정치인은 미국 인사들과의 면담이 의사 소통 기술이 미흡한 탓에 성과 없이 끝나자 ‘한국말로 토론했더라면 상대방 코를 납작하게 해주었을 것’이라며, 오히려 큰소리를 친 일도 있다.

하루 1명꼴로 들러…영사관 업무 마비 지경

젊은 정치인들만 아니다. 한국에서 이름을 대면 누구나 알 만한 중진 정치인이자 정부 내 주요 부처의 수장을 지냈던 ㅎ씨는 한· 미 경제 현안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논리와 증거를 ‘제대로 갖춘’ 상대방의 공격에, 변변한 반격 한번 못하고, 작은 목소리로 ‘그건 아닌데..,’만 중얼댄 일도 있다.

ㅈ씨도 낯 뜨거운 경험을 했다. 로스앤젤레스의 전 시장 리어던 씨가 현직에 있을 때, 어렵사리 만들어진 한국 정치인들과의 만남 자리에서였다. 이 면담에 참석한 한국 정치인들이 횡설수설을 계속하자 리어던 시장은 잠깐 자리를 뜨는 것처럼 하더니, 회의장에 다시 들어오지 않았다. 한국 정치인들은, 이같은 리어던 전 시장의 행동이 모욕에 가까운 것임을 눈치채지도 못했다고 ㅈ씨는 전했다. ㅈ씨는 그러나, 리어던 시장을 이해하는 입장이었다. 그가 보기에 모욕을 먼저 준 쪽은 준비 없이 면담 신청을 한 한국 정치인들이었다는 것이다.

하기환씨의 문제 의식은 이와 좀 다르다. 언어 문제나 준비 부족은 정치인 개개인의 역량 문제라고 치더라도, 본국 국민 혈세를 염출한 출장비로 멀리 로스앤젤레스까지 와서, 친지를 만나거나 골프를 즐기는 등 사적인 행사에만 관심을 쏟아서야 쓰겠느냐는 것이다. 공사 구분이 불분명한 정치인에게 더 기대할 것이 없다는 말이 그의 신랄한 비판의 핵심이다. 하회장은 개탄했다. “한국 정치인 대다수가 영사관에 근무하는 외교관들을 불러내 밤늦도록 사적인 술자리를 위해 자동차를 몰게 한다. 아무리 정치인일지라도, 공무가 아닌 사적 용무에는 개인적으로 차를 빌려 이용하는 분별력은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ㅈ씨도 자신의 경험담을 털어 놓으며, 비슷하게 반문했다. 그는 출장비를 타서 온 한 한국 정치인으로부터 자녀의 미국 조기 유학을 알아보러가는 데 따라가 달라고 부탁받았을 때 정말 난처했다고 말했다. ㅈ씨는 한국 국회에서 국적 이탈 재외 동포에 대해 ‘동포 자격 박탈’ 등을 내용으로 하는 법안이 발의된 사실에 대해, 한국 정치인들의 표리부동한 행동에 식상함을 넘어 환멸까지 느꼈다고 말했다.

하기환, 찰스 김, ㅈ씨, ㄱ씨 등은 이구동성으로 ‘그런데 한국 정치인들이 왜들 이렇게 몰려오는지 도무지 알 수 없다’며 의아해했다.

로스앤젤레스 한국 총영사관 집계에 따르면, 로스앤젤레스를 방문하는 한국 정치인 수는 한해 평균 4백명에 이른다. 지난 1/4 분기에만 100명이 로스앤젤레스를 다녀갔다. 매일 정치인 한 명 이상이 미국 로스앤젤레스 공항에 내리는 셈이다. 영사관으로서는 연거푸 찾아오는 이들 정치인들을 한 사람도 소홀히 할 수 없다.

한국 정치인 접대에는 불문율이 있다. 국회 상임위원장이 방문할 경우, 총영사가 직접 공항에서 영접하며, 만찬을 주최한다. 일반 국회의원은 영사들이 책임진다. 또 정치인들이 무리를 지어 한꺼번에 찾아올 경우, 총영사관측은 아예 다인승 밴을 대기해 놓는다. ‘방문단’을 위한 관광 코스는 기본이기 때문이다. 총영사가 공항 영접을 하루에 두 번씩 나가는 경우도 있고, 다른 영사들도 거의 매일 공항 출영과 환송에 ‘동원’된다. 이 쯤 되면, 로스앤젤레스 총영사관은 한국 정치인의 ‘공식 여행사’인 셈이다.

이정관 부총영사는 ‘정치인들의 잇단 관할 지역 방문에 공무 수행이 어렵다’고 시인한다. 그는 또 ‘그래서 최근 본국에 국회 사무처 요원 파견관 임명을 공식 요청했다’고 밝혔다. 한국 국회가 사람을 직접 보내 국회의원들의 편의를 전담해 달라는 뜻이다.

한국 정치인 등살에 힘겨워하는 사람들은 총영사관 외교관들만이 아니다. 한국 정치인의 거칠고 세련되지 못한 행동에, 민간인들까지 질겁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찰스 김 사무국장은 자신이 안내했던 박 아무개 의원이 미국 정계· 학계 중진들이 참석한 한 공식 만찬에서, 주요리로 커다란 스테이크가 나오자 갑자기 포크로 ‘콱’ 찍어 통째로 뜯어먹는 모습을 보고 기겁했던 경험을 전했다. 식탁에 동석한 미국인을 보기가 너무 민망해 진땀이 흐를 정도였다는 것이다.

재미 한인 사회가 한국 대통령의 간담회 초청에 등을 돌리게 된 것은, 따지고 보면 한국 정치인에 대한 실망감이 누적된 결과라는 것이 한인 사회의 공통된 의견이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