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멍 든 역사 지우 고 ‘인권’ 피워낼까
  • 주진우 기자 (ace@sisapress.com)
  • 승인 2005.08.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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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인권기념관으로 변신하는 남영동 대공분실 현장 취재
 
“남영동 분실은 사라져야 하는 유물이라고 외쳤다. 그 때 내 말에 조금만 귀 기울였더라면 박종철을 그렇게 보내지 않았으련만….” 김근태 보건복지부장관은 남영동만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고 했다. 1985년 김근태 민주화청년운동연합(민청련) 의장은 민주 인사들의 영혼을 유린하던 남영동 분실을 최초로 문제 삼았다. 다음은 김장관의 법정 진술이다.  
“온몸을 발가벗기고 눈을 가렸습니다. 처음에는 약하고 짧게, 점차 강하고 길게, 강약을 번갈아가며 전기 고문이 진행되는 동안 죽음의 그림자가 코앞에 다가와…. 그들은 마지막 날 만신창이 몸에 다시 뭇매를 때린 뒤 알몸으로 바닥을 기면서 살려 달라 빌라고 시켰습니다. 쓰라는 대로 조서를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김장관은 ‘고문 기술자’ 이근안의 모진 고문에도 희미해진 정신을 끝내 놓지 않았다. 김장관은 이근안의 인상 착의, 고문 행위, 정황 등을 상세하게 진술해, 남영동의 실체를 세상에 알릴 수 있었다.

김근태 장관과 다른 민주 인사들에 의해 고문 기술자라는 사실이 알려진 이근안은 1988년 잠적했다. ‘안 잡는다’ ‘못 잡는다’ 논란 속에서 이씨는 도피 10년 10개월 만인 1999년 10월 검찰에 자수했다. 이씨와 관련된 사건들은 대부분 공소시효가 지나 있었다. 훗날 경찰 간부들이 이씨의 도피를 지시하고 비호했던 사실이 드러났다.

7월26일 경찰 완전 철수해 ‘남영동 시대’ 마감

민주 인사들에게 ‘악마들의 고향’으로 불리던 남영동 분실은 반(反)인권의 대명사였다. 이재오 한나라당 의원은 1979년 ‘해양연구소’라는 간판이 붙어 있던 남영동 분실로 끌려갔다. 이의원은 “남영동에서 고춧가루 고문과 전기 고문을 당하면서 사람으로 태어난 것을 저주했다”라고 밝혔다.

1983년 영문도 모른 채 남영동으로 끌려간 함주명씨(74)는 ‘고정 간첩’이 되어야 했다. 45일간 불법 구금과 이근안의 고문 때문이었다. 함씨는 “물 고문과 전기 고문이 이어지고 10일간 잠도 안 재웠다. 인간이 참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라고 말했다. 함씨는 16년간 억울한 옥살이를 했다. 결국 22년이 지나서야 함씨는 법원에서 무죄를 선고받아 간첩 누명을 벗을 수 있었다.
서울대생 박종철군은 1987년 남영동에서 물 고문을 받다가 숨졌다. 당시 경찰은 “책상을 ‘탁’ 치니 ‘억’하고 죽었다”라고 발표했다.

 
남영동에 끌려간 이상 박종철군처럼 죽지 않는 한 경찰이 불러주는 대로 조서를 적을 수밖에 없었다고 고문 피해자들은 전하고 있다. 데모하던 대학생은 물론 막걸리를 먹다가 말실수를 한 농부도 ‘간첩’ ‘빨갱이’ 딱지가 붙여진 후에야 밖으로 나갔다. 이재오 의원은 남영동에서 구치소로 옮겨지자 “천국으로 돌아온 기분이었다”라고 회고했다.

경찰청 직속 남영동분실은 가장 오래된 분실로 대공분실의 모태가 되었다. 남영동분실은 1948년 10월 치안국 특수정보과 중앙분실이 발족하며 비롯되었다. 그러다 1976년 치안본부 대공과 대공분실로 직제가 개정되었고, 같은 해 남영동분실 청사를 신축해 남영동 시대를 열었다. 남영동분실의 한 경찰은 “좌익 혁명 세력이 민주화의 탈을 쓰고 준동할 때 국가 안보의 중추 역할을 한 국가 방첩 수사기관이다. 국정원·군 기무사와 비슷한 역할을 한 곳이다”라고 말했다. 지난 7월26일 남영동 건물을 사용해 오던 경찰청 보안3과가 서울 홍제동분실로 옮기면서 남영동 시대는 막을 내렸다.

 
최근까지 남영동에는 경찰청 보안3과 직원 50여명이 근무했다. 총경이 책임자인 보안3과는 경정을 계장으로 하는 3개 팀이 운영되었다. 보안3과장은 “1987년 박종철군 사건 이후 남영동에서 단 한 건의 고문 사건도 일어나지 않았다. 다른 부서에 비해 피의자의 인권에 각별히 신경 쓰고 있다”라고 말했다.
‘고문실’로 불리던 조사실은 5층에 15개, 3층에 한 개 있다. 조사실마다 두터운 방음벽이 눈길을 끌었다. 방음 처리에 각별히 신경 쓴 흔적이 보였다. 경찰청은 2000년 조사실을 리모델링했다. 하지만 박종철군이 숨진 509호실은 과거를 반성하는 차원에서 원형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물 고문을 위한 욕조와 전기 고문을 위한 철제 침대가 놓여 있다. 또 자해를 방지할 목적으로 책상과 의자 등 모든 집기는 굵은 나사로 고정되어 있었다.
맨 구석에 있는 915호실은 김근태 장관이 고문을 당한 방이다. 3층에는 ‘사장실’이라고 불리는 넓은 방이 있다. 고위급 인사들을 조사하던 13평 정도 되는 조사실이다. 이 방은 고춧가루 고문 등 더욱 악랄한 고문을 하는 곳으로 주로 이용되었다고 한다.

기념관 세워져도 고문 도구 등은 못볼 듯

국가 안보 수호를 목표로 설립된 남영동 분실은 대간첩 수사 업무를 당당했다. 하지만 제구실을 해내지는 못했다. 남조선민족해방전선(남민전)과 민청련 사건 등 남영동분실이 수사한 대표적인 사건들은 고문 조작 사건으로 판명되었다. 남영동분실 소속인 한 경찰은 “남영동분실은 고문으로 얼룩져 1980년 후반부터는 별다른 기능을 하지 못했다. 특히 박종철 사건에 발목이 잡혀 수사하는 데 제약이 컸다”라고 말했다.

 
경찰청은 인권 경찰로 거듭나기 위해 남영동 대공분실을 ‘경찰 인권의 메카’로 만들겠다고 공언했다. 허준영 경찰청장은 “경찰 창설 60주년을 맞아 과거사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인권 수호를 위한 경찰의 결연한 의지를 상징하는 경찰인권기념관을 남영동 보안분실 자리에 건립하게 되었다”라고 밝혔다.
기념관은 민주화 과정에서 부당한 공권력 행사로 희생된 인사들을 추모할 공간과 인권사 전시관, 인권 체험 공간 등으로 꾸며질 방침이다. 경찰은 인권신고센터와 인권상담센터가 들어서고, 인권도서관과 인권아카데미도 설치하겠다고 한다. 이곳은 동학혁명, 일제 군위안부, 부마항쟁, 광주민주화운동 등 국내외 인권 관련 자료로 채워질 전망이다.

경찰이 과거를 반성하고 거듭나겠다는 자세는 분명 검찰이나 국정원과 대비되는 부분이다. 하지만 친일 경찰부터 내려온 인권 탄압에 대한 통렬한 반성은 경찰에게서 보이지 않는다. 청와대·검찰·국정원 등 권력의 하수인 역할을 했던 부끄러운 과거에 대한 고백도 없다. 정작 인권기념관에 놓여야 할 남영동 관련 자료도 거의 없다. 언론에 보도되어 문제가 된 사건말고는 남영동에 다른 고문 사건도 없었다고 말한다. 남영동의 악명 높았은 전기 고문 도구 등 고문 기구도 없다. 대신 일제 시대 감옥을 꾸며 형틀을 설치하고 고문 기구들을 진열할 것이라고 한다. 경찰의 인권기념관이 이벤트로 의심받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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