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성장 ‘양수겸장’이룰까
  • 김방희 기자 ()
  • 승인 1993.06.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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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모판’바꾸는 신경제 계획, 박재윤 경제팀 조급증이 복병

“신경제와 관련한 정부의 발표문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칼 마르크스의《자본론》을 읽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된다.” 경제 전문가들이 모인 한토론회 자리에서 한국개발연구원(KDI)원장과 상공부 차관을 역임했던 金基直박사는 이같은 촌평으로 좌중을 웃겼다.  신경제론에는 공감할 부분이 적지 않지만, 지나치게 추상적인 논리와 용어로 일관하고 있어 그 실체를 파악하기가 어렵다는 뜻이었다. 

 한국 경제가 뭔가 달라져야 한다는 공감대는 널리 형성돼 있다.  이런 느낌을 자연스럽게 전달해 주는 신경제라는 용어는 거부감없이 받아들여진다.  한국 경제가 처한 현실을 직시하면 더욱 그렇다.  한국 경제는 유례없이 긴 경기 침체를 맞고 있다.  시각에 따라 침체 기간이 달라지긴 하지만 89년 하반기부터 침체가 시작됐다고 보는 재계의 견해를 받아들이면, 벌써 4년째 침체가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전국경제인연합회의 李龍煥이사는 “기업들이 요즘보다 더 깊은 침체에 빠진 적은 있지만 더 긴 침체에 빠져 본 적은 없다”라고 주장한다.

“5개년계획과 1백일계획은 전혀 다른 것”
 모든 경제 전문가들은 신기하게도 장기적인 경기 침체의 원인이 구조적인 요인에 있다는 점에 동의한다.  그 때문에 경제에 대한 불안감은 더욱 커져가고 있다.  앞으로 2~3년 간이 한국이 선진국으로 도약하느냐 아니면 현상태에서 정체하느냐를 결정짓는 중요한 시기라는 것이다. 

 신경제론은 경제 개발을 시작한 이래 한국 경제에 누적돼온 구조적 비효율을 고치지는 새로운 접근법이다.  朴在潤대통령 경제수석 비서관이, 신경제론은 김영삼 대통령이 민자당 대통령후보로 선출된 90년 5월 이후 구체화했지만, 실제로는 40여 년 동안 형성된 것이라고 자부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이다.  이런 점에서 대통령선거 기간에 신경제는 분명 매력적인 ‘정치 구호’였다. 

 대통령선거가 끝난 시점에서 신경제는 우리에게 무엇인가.  한국 경제를 되살릴 처방전인가.  아직 이름에 걸맞는 구체적인 정책 수단이 개발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신경제는 정치 구호의 인상을 다 벗어나지는 못했다.  김영삼 대통령이 재임 5년 동안 추진할 경제 발전에 관한 청사진과 정책 방향을 제시할 ‘신경제 5개년계획’은 아직 확정되지 않은 것이다.  신경제 5개년계획은 ‘신경제계획위원회’와 ‘경제사회발전계획심의회’를 거쳐 오는 6월 말에야 최종 확정된다. 

 신경제 5개년계획이 마련되기까지 잠정적으로 채택한 ‘신경제 1백일계획’도 신경제의 정체를 모호하게 하고 있다.  경제 활성화 조처와 정부 행정규제 완화, 각 경제 주체의 고통 분담을 골자로 하는 이 정책은 과거의 인위적인 경기부양책을 답습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金泰東 교수(성균관대. 경제학)는 지난 5월26일 한국정학연구소가 주최한 토론회에서 신경제는 “노태우 정부 정책보다 못하고, 유신시절과 비슷한 인위적 통제 정책이다”라고 평가했다. 

 신경제를 주창한 사람들도 1백일계획이 급조됐다는 것을 감추려 하지는 않는다. 장기적인 경제 정책을 수립하는 데 걸리는 시간을 벌어주기 위해 20여일 만에 만든 정책이라는 것이다.  더욱이 지난해 4/4분기 경제성장률이 2.8%에 머무를 정도로 경제 상황이 급속히 악화돼 부득이 경제활성화 조처를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신경제의 이론적 주창자인 姜光夏 교수(서울대∙ 경제학)는 “열띤 토론끝에 일단 숨통부터 틔우자는 쪽으로 결론을 내렸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신경제 5개년계획은 1백일계획과 근본적으로 성격을 달리할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시운 타야 성공”비관론도
 이미 발표한 신경제 5개년계획 작성 지침과 각 분야의 시안을 살펴보면 개혁 과제에 비중이 많이 실려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에는 세제 재정 금융 행정규제 경제행정조직 등 5개 부문에 걸친 대폭적인 개혁방안들이 포함돼 있다.  금융실명제를 포함하여 80년대초 이래 두 정권이 시도했다 실패한 거의 모든 분야의 경제 개혁이 다 망라된 것이다.  이 가운데 금융 개혁과 행정규제 개혁은 이미 몇 번 시도했지만 제대로 시행되지 않았던 것이고, 세제. 재정 개혁과 경제행정조직 개편은 그동안 말만 분분했던 개혁 과제에 해당한다. 

 예를 들어 신경제 5개년계획에는 두 번에 걸쳐 좌절한 역사를 지닌 금융실명제를 5년안에 실시하겠다는 의지가 확고하게 반영될 방침이다.  경제기획원의 고위 관계자는 “그동안 재무부와 금융실명제에 대한 실무 협의를 계속해왔으며, 준비는 끝난 상태”라고 밝혔다.  실명계좌를 의무화하는 것과 이자소득. 배당소득∙주식양도차익에 대한 종합과세는 분리해 실시한다는 방침이 정해져 전 단계에 해당하는 실명계좌 의무화 실시 시기만 정치적으로 결정하면 된다.  금융 자율화를 기본으로 한 금융 계획이나, 관료집단을 손대는 경제행정조직 개편도 쉽지 않은 개혁이다. 

 결국 신경제의 목표는 그동안 미뤄 왔던 경제 개혁을 실행해 성장 잠재력을 확충하자는 것이다.  기존의 경제성장 전략은 주로 돈을 푼다든지 해서 총수요를 자극하는 것이었다.  이 정책은 환부가 생기면 항생제를 투여하는 처방에 비유할 수 있다.  반면 신경제는 썩은 부위를 도려내는 새로운 성장 전략을 채택하고 있다.  경제 개혁을 통해 경제 전반의 효율을 높이고, 민간 부문에서 ‘경제하려는 의지’를 높여 성장 잠재력을 확대하려는 것이다.  신경제 5개년계획의 총량 부문 전망을 담당했던 한국개발연구원의 左承喜 연구위원은 “신경제는 실질 국민총생산(GNP) 증가율(경제성장률)을 높이는 대신 잠재 성장률을 높이겠다는 전략으로 볼 수 있다”라고 말한다.  신경제의 새로움이 돋보이는 측면이다. 

 그러나 새로운 성장전략 아래서 성과를 확인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새 살이 돋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과 마찬가지다.  김영삼 대통령의 임기가 끝나는 98년을 기준으로 한 신경제 목표가 너무 조급한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가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총량 전망에 따르면 98년까지 연평균 경제성장률은 7%에 이르고, 물가는 3%선에서 안정된다.  경상수지 흑자는 GNP의 1~2%에 달하고, 1인당 국민소득도 1만4천5백달러이다.  장밋빛에 가까운 이 청사진에 대해서는 대선 기간에도 말이 많았다.  실현 가능성이 희박한 국민당의 경제공약이 발표된 후에 김영삼 대통령 후보가 발표하면서 부풀려졌다는 지적이 많았던 것이다.  재계에서 20여년간 조사업무를 담당해 온 한 연구자는, 이 목표가 결코 달성할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80년대 중반처럼 엄청나게 좋은 시운을 타야 가능할 것이라고 비관적으로 본다. 
 경제가 회복돼 목표에 도달하기까지 회복속도가 눈에 띄게 더딜 경우 신경제는 5공화국 경제 개혁의 전철을 밟을 수도 있다.  5공 당시, 유신체제에서 빚어진 경제사회적 문제와 제도적 유산을 척결한다는 차원에서 불가피했는데도 금융 개혁은 이뤄지지 않았다.  정권 출범 초기의 경기 침체에서 빨리 벗어나려는 단기적 정책 목적 때문에 금융에 대한 간섭과 통제를 강구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현 경제팀이 경제 활성화에 대한 부담 때문에 개혁을 늦추는 것도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원래 자율과 민간주도를 내세웠던 5공 정부가 강력한 관치경제로 방향을 선회한 것도 음미해볼 만한 대목이다.

“경제 회생 기대 부풀린 것은 잘못”
 이것은 또 ‘시간 기준’이란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다.  기업과 국민은 적어도 한 세대를 기준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며, 대통령도 5년이라는 비교적 긴 시간 기준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경제 정책을 실질적으로 주도하는 경제부처 장∙차관이나 청와대 경제수석비서관은 다르다. 김태동 교수는 “평균 수명을 고려할 때 그들의 시간 기준은 1년이 채 안된다”라고 주장한다.  1년 안에 경제가 눈에 띄게 좋아지지 않으면 자리가 보장되지 않기 때문에 무슨수를 쓰든 그 기간 내에 경제성장률을 높여보자는 궁리를 하게 된다는 것이다. 

 신경제의 운명은 경제회복 속도와 관련이 깊다.  집권후 1백일의 절반 이상을 보낸 지금거시 경제지표는 그다지 좋아지지 않고 있다.  외부적 요인 때문에 수출은 좋아지고 있지만, 성장의 원동력이 되는 설비투자는 지난해 4/4분기에 이어 10% 이상 감소했다(도표 참조).지난 5월17일 청와대에서 열린 ‘신경제 1백일계획 중간 점검회의’에서 李經稙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은 이와 같은 상황을 “움직이는 경제로 되어 가고 있다”라고 궁색하게 묘사했으나, 김영삼 대통령은 경제팀의 지나치게 낙관적인 태도를 나무랐다. 

 1백일계획을 통해 빠른 경제 회생에 대한 기대를 심어놓은 것 자체가 신경제론에 어울리지 않는 조급한 결정이었다는 지적도 나온다.  서울대 경제학과의 한 교수는 “만일 박수석이 뚝심 있는 경제학자가 아니라 정치가였다면 책임을 뒤집어쓰기 딱 알맞은 ‘1백일계획’과 같은 표현은 쓰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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