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이 주도하는 국제 협력틀 필요"
  • 도쿄·김용기 (자유기고가) ()
  • 승인 1992.05.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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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혁신계 대부 사카모토 요시카즈 교수


 

 일본 혁신주의의 대부인 사카모토 요시카즈(?本義和 ·65) 교수는 동경대에서 은퇴한 후 현재 명치대학 교수 겸 국제평화연구학회 사무총장으로 일하고 있는 군축과 환경문제에 조예가 깊은 세계적인 석학이다. 1964년 창설된 국제 평화연구학회는 유네스코의 재정지원을 받아 25개국 68개 연구소가 가맹해 있다.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태어난 사카모토 교수는 동경대 법학부 출신. 1990년 '지구 민주주의의 조건'이라는 국제 심포지엄을 도쿄에서 개최한 것을 비롯, 지난 3월 고려대 부설 평화연구소가 주최한 국제 심포지엄에 참가하여 국내 학자들로부터 절찬을 받은 바 있다.

 

 한반도 통일도 국제 협력틀의 형성이란 차원에서 보아야 한다고 했는데 유럽처럼 여러 민족국가가 헙력틀을 모색하는 것과 두개의 국가로 나뉘어진 남북한이 서로 합치려는 것은 서로 다른 문제 아닌가?

내가 지역화시대를 강조한다고 해서 한민족이 하나가 되려 하고 있고 또 그럴 권리를 갖고 있다는 점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2차대전의 책임을 져야 할 독일과는 달리 한반도는 그야말로 억울한 분단을 당했다. 유럽지역 통합과 한반도 통일의 공통점은 둘 다 지역 내전의 극복이라는 점이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은 사실 유럽지역의 내전이었다. 특히 독일과 프랑스의 뿌리 깊은 대립이 직접적인 계기였다. 그런데 유럽지역 통합의 원동력은 앙숙지간이던 독일과 프랑스의 노력에서 만들어졌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전쟁물자인 철강과 석탄을 둘러싼 쟁탈전을 중지하고 공동관리에 의해 자원을 평화산업에 돌리려는 노력 속에서 상호신뢰를 형성했다. 이는 가장 적대적 관계에서 신뢰와 협력을 보장하는 훌륭한 지혜가 창조되었다는 점에서 역설적이다. 내가 강조하려는 것은 남북한이 지금까지 냉전의 첨병으로 대립해왔지만 이제는 동아시아의 새 지역 협력틀을 만드는 데 지혜를 발취할 수 있으리라는 점이다.

 

 남북한이 협력하는 과정에서 꼭 북한이 동유럽처럼 급변할 가능성은 없는가?

재미있는 것은 역사는 반복되기 어렵다는 사실이다. 소련과 동유럽이 급속히 붕괴했다고 해서 중국이나 북한이 같은 길을 걸을지는 의문이다. 중요한 것은 중국과 북한의 지도자들이 동유럽의 경험을 알고 그 전철을 밟지 않으려 노력한다는 점이다. 중국 지도자들은 꼭 북측이 서구식 민주주의의 기계적 적용을 중국에 강요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물론 중국식 민주주의라 해도 인권존중과 같은 보편적 가치를 무시할 수는 없다. 그러나 사회주의권의 급격한 체제변화만이 능사라는 사고방식은 잘못된 것이다. 독일은 베를린장벽이 무너질 때의 기쁨이 채 가시기도 전에 경제침체로 곤욕을 치르고 있다.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인종적 편견과 차별이 강화되는 것이나, 나치주의 지지자가 급증하는 현상은 급격한 통일에서 생긴 부작용이다. 북한 지도부가 이 같은 타국의 경험을 자신의 지혜로 얼마만큼 살려갈지는 두고 볼 일이지만 적어도 종전보다는 유연한 태도를 취할 것이 분명하다. 그만큼 남북한이 협력의 지혜를 발휘할 기회는 커진 셈이다.

 

 당신이 말하는 지역협력이란 어떤 것인가?

지역협력이라 하면 2차대전 이전에 나타났던 지역경제 블록과 같은 폐쇄적인 틀을 떠올리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오늘날의 세계는 이미 지구적 규모의 자유로운 교류와 협력 없이는 유지되기 어렵다. 유럽과 북미에서 만들어진 지역협력체제는 그 지역의 평화와 번영을 보장하면서도 세계를 향해 열린 체제이다. 아시아도 탈냉전 이후에 이 같은 체제를 형성할 필요가 있다.

 

 그 같은 지역협력은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가?

중요한 것은 지역협력을 정부에만 맡겨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아시아 개도국에 진출한 일본 기업이 환경파괴나 각종 사회문제를 일으킬 때 일본 정부는 물론, 심지어는 개도국 정부조차 다국적기업의 편을 드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민간 시민 차원의 국제적 연대와 협력이 필요하다. 이 같은 운동의 원동력은 특정 이념이 아니라 안전하고 살기 좋은 환경을 지켜가겠다는 일반적인 생활인들의 바람에서 나온다. 이는 일국 차원에서는 불가능하다. 예를 들어 일본의 반핵평화 운동은 세계적인 반핵여론 형성에 기여해왔다. 또 오는 6월 브라질에서 열리는 유엔의 환경문제 국제회의는 각국 정부대표가 참여하긴 하지만 그 주축은 오히려 세계 각지 시민이 만든 환경보호단체이다. 시민운동도 민족주의 차원을 뛰어넘어 국제적 연대를 지향해야 한다. 시민운동의 궁극적 목표는 세계적 규모의 협력체제이며 세계시민으로서의 연대와 협조이다. 지역협력체제의 구축은 이 같은 이상을 향한 준비단계에 불과하다.

 

 아시아에서의 시민연대가 일본을 포함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할 때 과거의 피해자·가해자로서의 응어리를 풀어야 하지 않겠나?

일본은 2차대전의 전승국인 미국 소련 등에 대해서는 전쟁책임을 인정했지만 아시아의 피해국에 대해서는 자신의 책임을 진정으로 인정한 적이 없다. 이 같은 일본의 태도가 아시아의 연대형성에 있어서 큰 장애임에 틀림없다. 지금 일본에서는 거액의 국제경제원조 자금 공여, 유엔 평화유지군에의 자위대 파견 등 국제사회에 대한 '공헌'문제가 중요한 사회적 이슈가 되어 있다. 문제는 '국제사회에 대한 공헌'이라고 할 때 구체적으로 누구를 대상으로 하느냐하는 점이다 일본은 미국이나 서유럽을 의식할 뿐 중국이나 한국이 어떤 반응을 보이는가에는 크게 구애받지 않는 것 같다.

 

 자위대 파견에 대한 일본사회의 여론은 어떤가?

일본에도 대국주의를 찬양하는 사람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전후일본의 젊은 세대 중에는 과거와 같은 국수주의의 색채를 찾아보기 어려운 사람이 많다. 일본의 보수층이 대국주의를 추진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이 같은 전후세대의 의식구조에 대한 초조감의 산물이다.

 

 국제적 시민연대운동의 장래를 어떻게 예상하는가?

무엇이든 첫술에 배부른 법은 없다. 여기저기에서 생활의 안전을 확보하려는 시민들의 움직임이 조금씩 축적되고 있다. 조만간 이들은 국경 너머에도 같은 문제와 씨름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평화와 생활의 안전을 보장하는 진정한 국제협력은 이 같은 기초 위에 마련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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