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야도 컴퓨터로 '운동'한다
  • 허광준 기자 ()
  • 승인 1993.10.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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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단체 연합해 통신망 개설…전교조 '참교육' 등 사설 게시판도

지난 10월6일 서울 시내 ㅅ음식점에서 나이 지긋한 사회 원로들과 새 세대 문화의 첨병으로 꼽히는 컴퓨터 통신이 만나는 색다른 자리가 마련되었다. 정의로운 사회를 위한 시민운동협의회(정사협)?흥사단 등 시민단체 아홉 개가 모인 '온라인정책협의회'(회장 손봉호 정사협 집행위원장)가 한국PC통신과 정보서비스 계약을 체결한 것이다. 이 계약을 통해 온라인정책협의회에 소속된 9개 단체는 한국PC통신의 컴퓨터 통신망인 하이텔에 협의회 이름으로 게시판을 개설하고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현재 이 협의회에 속한 단체는 정사협?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기독교윤리실천운동?나라정책연구회?노동인권회관?동방문화경제교류협회?한국여성정치연구소?환경운동연합?흥사단 등이다.

 하이텔 안에 있는 협의회 몫의 정보서비스에는 '열린 정책회의'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 난을 통해 협의회에 소속된 단체들은 자신의 활동을 국민에게 알리고, 자기네 정책과 연구자료를 일반 이용자에게제공한다. 국민은 이에 대한 의견과 건의를 이 공간에서 펼치는 것이다. 협의회는 이같은 온라인 정책 교류가 정당을 통해 국가 정책에 반영되어야 한다고 본다. 협의회가 열린 정책회의에 민자당과 민주당이 참여하기를 바라는 것은 그 때문이다.

 열린 정책회의는, 지난 6월 시민단체 대표들이 모인 자리에서 효율적인 정책안을 교환하는 방안으로 컴퓨터통신을 이용하자는 의견이 제안되어 개설되었다. 현재 게시판을 짜는 작업을 하고 있으며, 11월 중순이면 시험 가동할 수 있게 된다. 협의회는 앞으로 10여 단체가 더 가입해 함께 활동할 것으로 전망한다. 온라인정책협의회 운영위원회에서 운연간사를 맡고 있는 정사협 최연식 간사는 열린 정책회의에서 논의된 정책 내용이 정당정책에 반영될 수 있고, 대중이 토론에 참여함으로써 시민 의견을 수렴할 수 있는 통로가 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최간사는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컴퓨터 통신을 통해 바른 토론 문화를 이끌 수 있다는 점이다"라고 말한다.

'열린 정책회의' 통해 정책교류?토론 유도

 그동안 컴퓨터 통신은 '해커'들의 전유물인 것처럼 인식되어왔다. 컴퓨터를 통해 낯선 상대방과 대화하고 대규모로 축적된 정보에 접근하는 일은 알리바바의 주문처럼 비밀스러운 열쇠를 가져야만 가능하다고 여겨졌다. 그들이 형성하는 여론은 오로지 그들만의 것으로 치부되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외면되었다. 그것은 의도적인 것이라기보다 무지와 몰이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통신 매체로서 컴퓨터 통신의 중요성이 널리 알려지고, 매일 밤을 새워 키보드를 두들겨대는 30만에 가까운 이용자들이 나름대로 독특한 여론 문화를 만들어 나간다는 점이 인식되면서, 정치권과 사회단체들이 컴퓨터 통신을 적극 활용하려는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이미 지난 대통령선거 때 민자?민주당이 컴퓨터 통신을 선거 운동에 활용한 경험이 있고, 양당은 지금도 하이텔 안에 자기 자리를 마련하고 있다. 지난 6월부터는 청와대 정무수석실에서 통신 가입자들 대상으로 여론 수렴란을 개설해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정당이나 청와대, 열린 정책회의 등은 모두 하이텔과 같은 대규모 통신망에 셋방을얻는 형식으로 게시판을 개설한다. 그러나 아예 개별적으로 독자 통신망을 만들어 운영하기도 한다. 흔히 사설 BBS(전자게시판)로 불리는 이 통신망은 필요한지식과 시설만 있으면 누구나 쉽게 열 수 있다. 컴퓨터 통신망을 통해 목소리를 내려고 하는 사회단체의 처지에서는 대형 통신망에 게시판을 열게 되면 기술적인 고민을 할 필요가 없고 기존 가입자들 모두 사업 대상으로 삼을 수 있게 된다. 반면 사설 BBS로 독자 통신망을 운영하면 회원들끼리만 폐쇄적으로 통신망을 활용할 수 있으며 무엇보다 경비가 적게 든다.

 현재 몇몇 사회단체나 대기업 노동조합에서도 사설 BBS를 운영하고 있다. 대우자동차 노동조합은 조합원들과 노동계 관계자를 대상으로 사설 BBS '대자보'를 개설중이다. 대자보에는 알림판 구실을 하는 게시판, 회원들끼리 전자 편지를 주고받는 편지차림표, 컴퓨터 자료와 노동관련자료가 들어 있는 자료파일 창고 등의 항목이 열려 있다. 게시판란은 정치?경제?산업 소식, 노동정책, 노조운동 소식, 토론광장 등으로 꾸며져 있다.

젊은층이 주고객…'여론 편중' 단점

 곧 정식 개통을 앞두고 준비중인 전국교직원노동조합 BBS는 '참교육'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 회원은 조합원과 일반 교사, 학생과 학부모까지도 포함할 예정이다. 게시판 내용은 알림판?편지쓰기?공지사항?묻고 답하기?동호회 등 다른 BBS와 크게 다르지 않다. 참교육 BBS를 담당하고 있는 전교조 서울시지부 정진문 총무부장은 "'참교육'을 통해 여러 연구 성과나 강좌, 상담 자료를 활용할 수 있을 뿐 아니라, 학생이나 교사들끼리 정보를 나누고 고민을 함께 해결하는 터가 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진보적 관점에서사회에 대한 과심을 컴퓨터 통신을 통해 드러내는 사설 BBS도 개설되었다. 컴퓨터 정보 통신 업체인 '바른정보'가 연 '참세상' BBS는 '내일을 향한 열린 마음으로!'라는 슬로건으로 진보진영에서 싹트는 컴퓨터 통신에 대한 관심을 체계화한다. 이 BBS의 초기 화면에는 게시판?전자우편?만남과 나눔?공개자료실?여론광장 같은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만남과 나눔'란으로 들어가면 노동, 민주?여성?인권, 정당?정치, 언론?신문?잡지, 문화?예술?학술 등 여러 분야의 정보를 만날 수 있다. 현재 이곳에 자료를 올리며 활동하고 있는 단체는 한국사회과학연구소?한국과학기술청년회?인권하루소식?전교조신문?서울지역출판노동조합?서울영상집단 등 다양하다.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 소식을 알리는 공간도 있다.

 바른정보의 김형준 대표는 "컴퓨터 통신은 이미 나와 있는 어떤 매체보다 우수한 점을 갖고 있다. 단수한 음성, 화상 정보를 뛰어넘어 멀티미디어가 가능하고, 정보의 상호 소통을 기대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세분화된 의견을 모아 정책에 반영하기가 쉽고, 조직을 효율적으로 운영하는 데도 편리하다. 참세상은 이같은 컴퓨터 통신의 장점을 활용하여 일반인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진보진영의 목소리를 알리고자 한다."라고 말한다. 개설된 지 2개월 정도 된 참세상은 앞으로 충실한 자료 축적을 위해 유료 서비스로 바뀔 예정이다.

 사회단체나 시민운동 기구에서 컴퓨터통신에 관심을 기울이는 모습은 사회 전체의 변화 속에서 새 매체로서 잠재력을 키워 나가는 컴퓨터 통신에 다가서려는 능동적인 노력으로 볼 수 있지만, 이에 따르는 문제점도 있다. 중요한 것은 컴퓨터 통신을 통해 수렴되는 여론을 보편적인 것으로 보는 데에 한계가 있다는 점이다. 현재 컴퓨터 통신 이용자는 중고등학생과 대학생 등 청년층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따라서 '젊은 매체'인 컴퓨터 통신으로 표출되는 여론이란 사실은 시간적?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젊은층의 여론이라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컴퓨터 통신은 본질적으로 정보의 민주화를 지향한다. 데이터베이스에 저장된 많은 정보는 컴퓨터 통신망을 통해 독점의 울타리를벗어나 필요한 사람의 손에 들어온다. 사회?시민 단체에서 기울이는 컴퓨터 통신에 대한 관심은 이같은 정보 민주화와 사회 민주화를 결합하려는 적극적인 노력으로 파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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