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치 사료’제구실 찾는다
  • 오민수 기자 ()
  • 승인 1993.11.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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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판 사관’위치 격상…5·6공 ‘史草’는 개인이 소유

국정 최고 책임자의 일거수 일투족은 그 자체가 중요한 역사이다. 이를테면 조선 왕조 5백년 역사를 대변하는 《朝鮮王朝實錄》은 임금의 말 한마디와 몸짓 하나까지 완벽하게, 그리고 필사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 5백년 역사는 史官의 붓끝에서 완성됐다. 추호도 흐트러짐 없이 임금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을 소상히 기록한 사관이야말로 역사의 증언자이다(상자 기사 참조).

 청와대 통치사료 비서관, 옛말로 사관에 해당하는 직책이다. 개혁의 진원지인 청와대에서 요즘 ‘김영삼식 개혁’의 전후 과정을 낱낱이 기록하는 통치사료 비서관 자리는 언론인 출신 尹武漢씨가 맡아 보고 있다. 그런데 난생 처음 최고 권부 주변에 다가간 그는 얼마 가지 않아서 납득할 수 없는 상황에 맞닥뜨렸다. 전임 대통령 자료가 별로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全斗煥 盧泰愚 두 전임 대통령에 관한 자료 중 청와대 도서관과 정부기록보존소에 남겨진 자료는 대부분 지극히 공식적인 문서와 기록뿐이었다. 두 전임 대통령이 퇴임하면서 개인 기록들을 모두 연희동 사저로 갖고 간 것이다.

 “들고와서 보니까 전임 대통령 결재 서류나 보고 문서 따위 공식 자료 외에는 중요한 자료들 다 가져갔어요. 사료에 대한 인식이 정착하지 않은 까닭이죠. 요즘 새출발한다는 심정으로 일하고 있습니다.”윤비서관의 말이다.

5공 때 대통령 회고록 위해 시작
 현재 청와대 도서관과 정부기록보존소가 보관하고 있는 대통령 관련 자료는, 대통령이 주관하는 각종 공식회의를 녹음한 테이프, 결재 서류, 각종 보고 문서, 사진과 필름, 영화 필름, 방명록 등이다. 노태우 전 대통령 시절 통치사료 담당 비서관이었던 文武烘씨(현 통일연수원 교수)는 “정부기록에 속하는 자료들 중 대통령 결재문서나 지시사항은 관계 부처가 자동으로 관리하게 된다. 따라서 사료비서관은 주로 대통령의 말을 기록하는데, 이로 인해 오해가 생긴 것 같다”라고 말했다.

 통치사료 비서관이라는 직제가 청와대에 신설된 때는 전두환 대통령 시절인 83년 2월이다. 1공화국부터 4공화국까지는 역사적 고비마다 대통령이 무엇을 고민하고 어떤 결정을 내렸는지가 전혀 기록되지 않은 셈이다. 최근 10·26 사건에 관한 논란이 빚어지는 연유도 따지고 보면 다 대통령 주변에서 벌어진 일들을 기록하지 않아서 발생한 것이다. 상대적으로 후세 사가들이 6·29 선언의 진상에 접근하기는 훨씬 수월하다. 통치사료 비서관이 역사 자료를 남겼기 때문이다.

 사연이야 어찌 됐건 전두환 전 대통령은 처음으로 통치사료 비서관 자리를 만들었고, 역대 대통령 중에서 기록의 중요성을 가장 먼저 강조했다는 점에서 점수를 줄 만하다. 83년 2월 건국 이후 처음으로 통치사료 비서관 자리에 앉은 崔在旭(현 민자당 의원)는 전 전대통령이 사관을 신설한 이유를 두가지로 기억하고 있다. “각국 원수들과 정상회담을 벌이려는데 참고할 만한 전임 대통령들의 회담 기록이 없었어요. 공보비서실에 통치사료 비서관을 설치하라는 지시가 떨어졌습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그 분이 퇴임후 회고록을 쓰겠다는 생각으로 자료를 모으라고 했을 겁니다.”실제로 전 전대통령은 취임할 때부터 한국에선 최초로 회고록을 쓰는 대통령이 되겠다고 공식 석상에서 여러 차례 언급했었다.

 굳이 초법적 정치 용어인 ‘통치 사료’란 이름을 지은 점에서 그의 정치관을 엿볼 수 있는데, 여하튼 이 직책명은 현 김영삼 정부에서도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 몇몇 5공화국 인사들은 전 전대통령이 군 시절부터 유별나게 말과 행적을 기록하는 데 집착을 보였다고 한다. 5공 당시 통치사료 비서관들은 “대통령의 술자리까지 배석하기도 했다”라고 말한다. 이런 곡절 때문에 탄생한 책이 바로 최재욱 후임 金聲翊 전 비서관(현 언론사 근무)이 쓴《全斗煥 육성증언》이다. 김씨는 자기가 간직하고 있는 노트를 바탕으로 《월간 조선》 92년 1~2월호에 6·29 선언이 전두환씨의 작품이었음을 밝혀 화제가 되었다.

 전씨는 아마 민간단체였던 일해재단에 자신의 집권 시절 기록을 보관할 작정이었던 것 같다. 전씨는 집권 말기에 ‘전직 대통령 예우에 관한 법률’을 뜯어고쳐 ‘전직 대통령을 위한 기념사업을 민간단체 등이 추진하는 경우에는 관계 법령이 정하는 바에 따라 필요한 지원을 할 수 있다’는 내용의 제5조 2항을 신설했다. 그러나 전씨의 의지는 노태우 정권이 들어서고 5공 청문회 바람이 일자 좌절됐다.

미국, 임기 끝나면 정부에 자료 이관
 전임 대통령의 연설문집을 발간해 주는 것이 새 정부의 임부인데, 6공화국 정부는 전 전대통령의 마지막 1년간 연설문집을 발간하지 않고 차일피일 미뤘다. 이 연설문집은 노대통령 임기말에야 책으로 엮여 나왔다. 국가 원수인 대통령의 연설문은 국가 기록의 으뜸에 속하는 것인데, 정치적 상황을 의식해 이를 미룬 관료들의 발상도 문제인 것이다. 전씨측은 이 문제에 관한 한 아직도 노씨측에 서운한 생각을 갖고 있다고 한다.

 전 전대통령이 공·사석에서 한 말을 모두 기록하려고 노력한 반면 노 전대통령은 그러지 않았다. 문무홍 전 비서관은 이렇게 회고한다. “노대통령은 우리에게 ‘회고록 기초 자료를 준비하는 것은 공무가 아닌 사적 영역이니 사료비서관은 국가의 공식 기록을 모으는 직책으로 하라’고 지시했습니다. 사료비서관 업무를 공식화한 셈이죠.”그러니까 노대통령이 특정인과 독대하는 자리나 술자리 등 밀담은 나누는 자리에서 오고간 말은 사료비서관 선에서는 기록하지 않은 것이다.

 역사 자료를 잘 챙기는 미국에서는 대통령 관련 자료를 체계적으로 관리한다. 미국은 백악관에 있는 기록관리사무실(Office of Records Management·약칭 ORM)에서 모든 통치 사료를 관리한다. 임기를 마치면 ORM에 보관한 자료는 자동으로 정보기록보존소에 이관된다. 정부기록보존소는 퇴임후 12년이 지난 대통령 관련 자료를 일반인들에게 공개한다. 다만 보안이 요구되는 자료는 따로 절차를 밟아 공개하지 않도록 조처한다.

 김영삼 대통령은 취임후 공보비서실에 있던 통치사료 담당 업무를 비서실장 직속으로 옮겼다. 청와대내 각 비서실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위치인 비서실장 밑에 통치사료 비서관을 앉힌 까닭은 좀 더 수월하게 체계적으로 사료를 정리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황폐한 기록 문화에서 어렵게 길러진 사료비서관 제도는 아직 걸음마 단계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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