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지역사회에 뿌리내려야”
  • 괌·김춘옥 국제부장 ()
  • 승인 1992.06.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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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선. 1939년 생이니까 올해 만 쉰세살이다. 독일로 유학갔다가 공부보다는 사업이 적성에 맞아 전쟁중인 월남을 승부처로 정하고 74년 사이공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월남 곳곳에 산재한 사원에 방치된 골동품 가치가 있는 물건을 나름대로의 방법으로 수집해 큰돈을 만질 기회가 오자마자 월남은 패망했고 그는 다시 빈손이 돼서 마지막 미국 헬리콥터로 빠져 나온 후 군함으로 괌까지 실려왔다.

 그후 17년. 이씨는 괌 교민사회에서 첫째가는 부자로 통한다. 그는 자신의 재산이 달러로 억대라고 한다. 생존을 위해 일본인 호텔에서 접시닦이로 괌 생활을 시작해 호텔수리와 건설 하청을 맞아 사업을 일구어 왔다. 그동안 몇번이나 알거지가 될 뻔했으나 전에 사 놓았던 땅이 그를 구해주었다. 83년 투몬만에 40만 달러를 주고 산 3천평이 85년부터 일기 시작한 땅 투기 바람을 타고 그에게 2천7백만달러를 현금으로 안겨주었던 것이다.

 6천여 괌 교민 가운데는 이씨처럼 건설업이나 부동산으로 기반을 닦은 사람이 많다. 교민이 운영하는 건설업체는 줄잡아 2백여개. 교민건설업회에 등록된 건설회사만 해도 1백개가 넘는다. 수십명이나 되는 백만장자 대부분이 건설업 종사자들이다. 그 배경은 괌 이민사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괌이 본격적으로 관광개발을 시작한 70년대 초. 이곳에 진출한 현대건설, 중앙건설 등의 기능공들이 아예 이곳에 정착하면서 괌 이민사는 시작됐다. 90년 10월~91년 8월 한국의 쌍용건설, 럭키개발, 한일개발이 맡았던 공사액만 해도 4억4천8백38만달러. 도로에서 호텔, 감옥에 이르기까지 한국인이 건설한 것은 숱하게 많다. 건설경기가 한창이던 1978년에는 파견 근로자 수가 2천명에 달했다.

 ‘경기가 좋다’고 소문이 난 80년대에 한국인들은 더 몰려들었다. 최근에는 대학입시에 떨어져 괌대학으로 유학온 학생도 30~40명이나 된다.

 건설업 다음으로 많은 직업이 요식업과 슈퍼마켓 경영이다. 한국과 괌의 교역량이 1984년 2백10만달러에서 1991년 6천5백73만달러(이중 대 괌수출은 6천3백75만달러)로 늘어남에 따라 한국음식점은 20여개로 늘어났다. 김치전문 슈퍼마켓에서 현지 주민을 대상으로 한 슈퍼마켓까지 모두 80여개(전체의 60%)에 달한다. “괌의 한인사회는 어느 지역의 한인사회보다 성공적인 집단이 되었다”고 안정길(52) 한인회장은 말한다. 71년에 결성된 한인회는 2년마다 새회장을 뽑는다. 토요일과 일요일에 열리는 한인학교는 학생수가 1백20명이다. 대한항공이 1주일에 세 번 직항하고 있어 서울의 일간지를 하루 지나면 받아볼 수 있?. 하루 2시간씩 방영되는 한국어 텔레비전 방송의 ‘통일전망대’를 통해 북한소식도 잘 알고 있다.

 문제가 있다면 윤락행위의 대명사인 술집과 마사지업소의 90%(40여개)를 한국인이 경영한다는 점. 그러나 이것도 이민 1세가 점차 줄어감에 따라 해결될 문제라는 것이 崔勇 총영사(예비역 대령·54)의 말이다. 정작 이들이 안고 있는 문제는 교민 수에 비해 지역사회에서의 영향력이 미진한 점. “한국인 신혼부부가 어떤 주에는 150쌍이나 오는데도 한국인이 경영하는 일류 호텔 하나 없습니다. 또 미국 시민권 소지자가 1천여명밖에 안되는데 그나마도 투표하러 가지 않습니다.”

 로스앤젤레스 흑인 폭동 사건으로 한인들이 크게 피해를 입은 것을 본 이들은 경제적 윤택함만을 추구해오던 삶을 반성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억만장자 이호선씨는 “우리도 영향력을 키워야 한다는 사실을 절감했다”고 되풀이했다. 그가 모스크바와 사할린에 도서관을 짓고 괌과 호주에 원주민 민속촌을 건립하겠다는 야심을 품은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잘 살아보려고 고국을 떠난 지 20년이 지나서 이들은 개인과 민족과 국가의 명예가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기 시작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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