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쟁의 땅 아일랜드 평화의 꽃 피려나
  • 한종호 기자 ()
  • 승인 1994.01.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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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에이레 비밀협상, 급진파 반발로 앞날 험난

 “큰 쇠망치로 무장한 남자들이 조선소를 습격했습니다. 그들은 입구를 가로막고는 잡히는 대로 우리들의 옷을 벗겨 바다에 처넣고 쇳조각들을 던져댔습니다. 우리는 피로 얼룩진 바다를 몇 킬로미터나 헤엄쳐 간신히 뭍으로 기어올라갔지만 곧 경찰에 끌려가 벌거벗은 채 두들겨 맞아야 했습니다.”(1920년 7월19일 북아일랜드에서 개신교도에게 습격 받은 카톨릭 노동자의 회고)

 세계 지도를 보면 유럽 대륙 왼쪽 위로 영국이 있고 그 왼쪽으로 아일랜드가 영국에 끌어안기듯 놓여 있다. 얼핏 사이좋은 형과 동생처럼 보이는 이 두 땅덩어리는 1백여년 동안이나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벌여왔다. 특히 68년 이래 악화된 분쟁으로 지금까지 약 25년간 3천여 명이 희생됐다. 지난 12월15일 영국의 존 메이저 총리와 아일랜드공화국의 앨버트 레이놀즈 총리가 자칭 ‘획기적인’ 평화선언을 발표하자 전세계 언론은 이를 대서특필했다. 그러나 아직은 평화라는 말이 영국과 아일랜드에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분쟁의 무대인 북아일랜드는 영국이 건너다보이는 아일랜드 동북지방을 가리키는 공식 명칭이지만 대개 ‘알스터’라는 옛 지명을 사용한다.

 인구 1백60만명인 북아일랜드 사회는 두 세력으로 쪼개져 있다. 다수파인 개신교도(95만명)는 영연방에 통합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연방주의를 지향한다.

‘영연방 최후의 식민지’
 소수파인 민족주의 성향의 카톨릭계 주민(65만명)은 전아일랜드의 통일을 지지한다. 개신교도들은 자기들이 17세기에 아일랜드 카톨릭을 제압하기 위해 영국에서 이민온 조상의 후예로서 아일랜드인이 아니라 영국인이라고 주장한다. 반면 카톨릭계는 자기들이 영국의 정복에 고통받아 온 피정복민의 후손인 아일랜드인이라고 생각한다. 개신교계는 북아일랜드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고 본토의 보수당과 연계되어 있다. 북아일랜드 분쟁은 이 두 세력의 대립을 기본 축으로 해서 △카톨릭과 개신교의 종파 대립 △카톨릭계 시민들의 민주화 운동 △북아일랜드 귀속을 둘러싼 연방주의와 민족주의의 정치적 대립 △아일랜드공화군(IRA)?알스터방위협회(UDA) 등 좌우 테러 조직의 대립이 여러 겹으로 얽혀 복잡한 양상을 보인다.

 아일랜드 사람들은 원래 카톨릭을 믿어 왔다. 17세기 공화주의 혁명에 반대하는 왕당파와 카톨릭 세력 토벌에 나선 크롬웰은 아일랜드를 정복하여 대부분의 토지를 몰수하고 이곳에 본토의 개신교도를 이주시켰다. 아일랜드인은 빈농으로 전락했고, 토지 몰수와 참혹한 정복 정책은 이들에게 개신교도에 대한 깊은 원한을 심었다. 당시의 아일랜드 문제는 외래 부재지주에 대한 아일랜드 소작인의 투쟁을 기본 골격으로 하고 여기에 종교 갈등이 중첩된 형태였다. 장로파 개신교도와 일부 카톨릭 신자들은 18세기 영국의 탄압이 심해지자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민을 가 미국 독립전쟁의 주역이 되었다.

 18세기 말 아일랜드에서는 미국 독립전쟁과 프랑스 시민혁명에 자극 받아 도시 중산계급을 중심으로 혁명 운동이 일어났다. 산업화에 따라 북아일랜드 주요 도시에 공장이 들어서면서 가난한 카톨릭계 농민들이 대거 도시로 몰려들었다. 자연히 이들 사이에서는 급진 민족주의가 싹트게 됐다. 위기감을 느낀 영국 본토의 보수파와 북아일랜드의 개신교계 급진파는 실력으로 이런 움직임을 저지하기 시작했다.

 20세기에 들어 영국에 민주주의가 정착하고 아일랜드 민족주의가 고조되면서 아일랜드 자치 문제가 대두했다. 아일랜드인들의 독립 열기는 대단했고 이는 독립전쟁(1919~1921)으로 발전했다. 앞에 소개한 한 노동자의 회고도 이 무렵의 체험담이다. 이를 무력으로 진압하는 데 실패한 영국 정부는 아일랜드를 남북으로 나누어 별도의 자치국을 세우도록 했다. 이렇게 해서 아일랜드 민족운동 우파의 주도로 남부 아일랜드에 생긴 나라가 바로 에이레이다. 좌파는 북아일랜드까지 완전 독립하기를 주장하며 아일랜드공화군을 조직하여 무력 투쟁에 나섰다.

 북아일랜드에서는 개신교가 정권을 잡았다. 이들은 독립이나 자치를 거부하고 영국과 통합할 것을 주장하며 실력 행사에 나섰다. 모든 제도를 개신교도에 유리하게 조작해서 거의 모든 공직에 카톨릭계가 발을 못 붙이게 했다. 또 B 스페셜이라는 이름의 악명 높은 치안 경찰을 동원하여 카톨릭계를 무차별 탄압했다. 근래 북아일랜드 사태가 악화된 것은 주로 이 때문이다. 지독한 억압에 대항하여 북아일랜드의 카톨릭계는 67년 ‘북아일랜드 시민권협회’를 조직하여 민주화를 요구하고 나섰다. 당시 그들의 주장은 ‘영국=민주주의’로 생각하고 있던 세상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그들의 요구는 기껏해야 평등한 투표권, 차별적 취직?주택 할당제 폐지 등 기본 수준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IRA, 협상 앞서 수감 조직원 석방 요구
 69년 1월 시민권협회의 시위를 개신교 급진파 조직인 알스터방위협회가 습격하는 사건이 터졌다. 이를 계기로 그 해 여름 내내 북아일랜드 전역에서는 카톨릭계 주민들에 대한 습격이 이어졌고, 재조직된 아일랜드공화군이 이에 반격함으로써 내전이나 다름 없는 혼란이 일어났다. 당황한 영국 정부는 테러진압부대(SAS)를 파견하고 두 세력 사이에 ‘평화라인’이라 불리는 경계선을 만들어 억지로 싸움을 뜯어말렸다. 처음에는 카톨릭측에 약간 양보를 해보려 했지만 개신교측의 격렬한 반대로 모두 무산되자 영국은 아예 직접 통치를 시작했다.

 79년 집권한 대처 총리는 북아일랜드에 더욱 강경한 정책을 폈다. 그럴수록 아일랜드공화군은 강도 높은 테러로 맞대응했고, 영국 테러진압부대는 개신교 급진조직 알스터방위협회와 함께 수많은 아일랜드공화군 대원 및 카톨릭계 주민을 체포?구금?살해했다. 영국 직접 통치 아래서도 상황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가령 81년의 경우 영국 본토의 실업률이 11.3%, 북아일랜드 개신교도의 실업률이 12.4%인 반면 카톨릭계는 30.2%였다.

 영국 정부는 그동안 ‘테러 조직인 아일랜드공화군과는 어떤 협상도 있을 수 없다’는 원칙을 고수해 왔다. 이에 따라 영국의 방송사들은 아일랜드공화군의 정치담당 기구인 신-페인당 관계자들의 육성을 내보낼 수 없었다. 그런데 이번 공동선언을 통해 영국?아일랜드공화국(남아일랜드)?북아일랜드 3자 협상이라는 모양을 갖추게 된 점은 분명한 진전이다. 그동안 영국은 신-페인당이 테러 조직과 관련되어 있다는 이유로 아예 말도 걸지 않았고 북아일랜드 귀속 문제를 둘러싼 협상에 끼워주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신-페인당 지도자 게리 아담스도 지난 12월21일 ‘영국 및 아일랜드공화국과의 조건 없는 대화’를 제안하여 참여 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협상의 장래를 낙관하지 못하고 있다. 영국 정부는 ‘최소한의 대화를 위한 대화만 성사시키는 데도 넘어야 할 장애가 많다’고 말했다. 보수당 우파와 알스터 개신교도들은 공동성명의 어디에도 북아일랜드에 대한 영국의 권리를 주장하는 대목이 없다며 반발하고 있다. 아일랜드공화군측도 수감된 조직원 1천6백여명을 석방하라고 요구하지만, 영국은 ‘정치범은 1명도 없다’고 일축함으로써 거리를 좁히지 못하고 있다.
 이번 선언이 나오게 된 배경을 놓고 분석이 다양하다. 11월28일자 《옵서버》는 영국 정부가 아일랜드공화군과 수개월간 비밀 대화를 해왔다고 폭로했다. 경기 침체로 인기가 계속 떨어지고 있는 데다 비밀 대화 폭로에 따른 의회 보수파의 공격에 직면한 메이저 총리가 실속 없는 평화안을 내놓아 깜짝 쇼로 위기를 벗어나려 했다는 분석도 있다.

 미국의 아일랜드 문제 전문가 신 크로닌은 《아일랜드 민족주의》라는 책에서 북아일랜드를 ‘영연방 최후의 식민지’라고 했다. 북아일랜드 문제가 국제적 관심을 끌지 못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영국이 이를 철저히 국내 문제로 취급하며 뒷전에 감추어 왔기 때문이다. 영국 정부도 최종적으로는 아일랜드의 통일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북아일랜드에서 발을 빼지 않고 있다. 그같은 정책에 편승하여 북아일랜드의 집권 개신교계는 기득권 수호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있다. 새로운 돌파구를 찾지 못한다면 민주주의의 본산임을 자처해온 영국은 21세기 최악의 정치 후진국이라는 손가락질을 피하기 힘들 것이다.
韓宗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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