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1번지'기획원에 해 떳다.
  • 김방희 기자 ()
  • 승인 1994.01.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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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총리·한차관 입성으로 해체설 딛고 재기…'안정화'반대세력 전면 포진


 '부총리 姜慶植, 재무부 장관 李炯九, 재무부차관 李楊采' 지난해 12월 개각이 있기 전 재무부에서 떠돌던 '최악의 시나리오'였다. 이 세사람의 공통점은 경제기획원 출신 '안정화 세력'이라는 점이다(강경식 의원은 61년 재무부 사무관으로 출발했으나 64년부터 줄곧 경제기획원에서 일해 왔다).

 전총적으로 경제 정책 주도권을 놓고 경제기획원과 미묘하게 대립해온 재무부가 특히 안정화 세력을 두려워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80년대 초반 한때 이들이 재무부를 '점령'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당시 경제기획원 차관보였던 강경식 의원이 재무부 차관으로, 경제기획국장이었던 이형구 산업은행 총재가 재무부 이재국장으로 옮겼다. 그후 강의원은 재무부장관으로 승진했으나 정통 재무부 관료들과 심각한 갈등을 빚었다.
 재무부 관료들이 걱정했던 시나리오는 시나리오로 끝났다. 안정화 세력이 끝내 재기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이들 안정화 세력은 지난해 2월 金泳三 대통령이 조각할 때도 이번처럼 경제팀을 이끌 세력으로 지목됐으나, '5공화국 당시 총해받던 관련집단'이라는 멍에를 벗기 힘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대신 안정에 비판적이었던 사람들이 자리를 차지했다. 김영삼 정부 경제팀 2기를 이끄는 丁渽楊 부총리는 경제기획원 차관 시절안정화 정책에 대해 비교적 비판적인 자세를 취했었다. 지금도 관련 사이에 희자되고 있는 79년 6월의 '경제 쿠데타'는 그의 성향을 잘 보여준다. 경제기획원 차관이었던 정부총리는 당시 崔珏圭 상공부장관과 함께 안정화 정책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수출금융 확대 정책을 발표했다. 그때 안정화 세력의 든든한 후원자였던 申鉉碻 부총리와 안정화 세력의 선봉장이었던 강경식 경제기획원 차관보는 대한국제경제협의체(IECOK)에 참석하기 위해 프랑스 파리에 가 자리를 비우고 있었다. 경제 팀장이 자리를 비운 사이 전격적으로 안정화 정책의 토대를 흔들어버린 것이다. 신혁확 부총리가 귀국해 발끈한 것은 당연했다. 최각규 상공부장관이 실각하고 관료 생활에 종지부를 찍게 된 것은 이 사건 때문이었다(그는 91년 부총리로 복귀했다). 경제기획원 차관이었던 정재석 현 부총리와 관계가 좋지 않었던 그는 새 정권에 참여하라는 신군부의 권유를 뿌리쳐 5공 내내 관직과 멀어졌다.

차관급 관료도 4명이나 배출
 정부총리는 강한 소신파이다. 그는 취임후 앞뒤를 재지 않는 파격적인 발언과 행동으로 화젯거리를 만들어내고 있다. 또 그는 자기와 호흡을 맞출 차관으로 韓利憲 공정거래위원장을 골랐다. 한차관은 김영삼 대통령의 경제 교사로 항상 눈길을 끌어온 인물이다. 그는 정부총리가 경제기획원 차관으로 쿠데타를 일으킬 당시 경제기획원 기획국장으로 재직했다.
 정재석 부총리와 한이헌 차관은 원리원칙을 꼼꼼히 따지고 저돌적으로 밀어붙인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두 사람 모두에게 원리주의지나 '터프가이'라는 별명이 따라붙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나 2기 경제팀의 경제 철학은 안정화 세력처럼 분명하지는 않다.

 각 경제 부처의 기능을 조정하는 역할을 맡고 있는 경제기획원은 팀장이 누구냐에 따라 부처의 위상이 달라지곤 했다. 정재석 부총리 - 한이헌 차관의 등장으로 자연히 경제기획원의 입김은 강해질 수밖에 없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차관 인사에서 경제기획원은 차관급 관료를 4명이나 배출했다. 한이헌 공정거래위원장이 차관에 임명된 것 외에도 康奉均 대외경제조정실장이 노동부 차관, 吳世玟 기획관리실장이 공정거래위원장에 기용됐다. 李經植 부총리와 함께 경지팀을 이끌었던 金英泰 차관은 토지개발공사 사장이 됐다.

 경제기획원은 새 정부가 출범하면서 때 아닌 해체설로 곤욕을 치렀지만 정부총리의 등장과 함께 재기에 성공했다. 이것은 다른 경제 부처에게 최악의 시나리오는 아니라 하더라도 악몽의 시나리오로 남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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