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해물질 분석 못하는 법정 측정기관들
  • 박성준 기자 ()
  • 승인 1992.08.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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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반이 부적격…직업병 조기발견 ? 예방 못해 신경마비 ‘중금속?유기용제’는 측정 않기 일쑤


 

서울 구로공간의 장난감 제조업체 삼홍사에서 일하는 허세창씨(21)는 지난 3월초 직업병 전문 취급병원인 구로의원(원장 박계열)을 찾았다. 입사 3개월째부터 원인 모르게 두통이 계속되고 작업이 끝나도 술취한 듯 몽롱하며 쉬어도 피로가 회복되지 않아 “직업병이 아닐까”하는 의심이 들었기 때문이다. 병원측은 허씨가 유기용제의 일종인 톨루엔에 중독됐을 것으로 판단했다. 허씨는 톨루엔 발생 가능성이 높은 도장계에서 일하고 있었으며 작업 도중 의식을 잃고 쓰러지기도 했다. 병원은 허씨의 소변검사를 전문기관의 의뢰했다.

산업보건협회의 소변검사 결과는 오히려 오히려 병원측의 판단을 흐려 놓고 말았다. 마뇨산 측정으로 알아본 결과 허씨의 체내에 있는 톨루엔 농도는 중독 여부를 가리기 애매한 수치인 l당 1.76g(톨루엔 중독의 선별한계는 l당 2.0g)으로 나왔기 때문이다. 더욱이 허씨의 작업장에서 실시된 지난 5월의 작업환경 측정결과를 알아보니 정상수준인 것으로 나와 병원측은 더욱 난감한 상태에 빠졌다. 병원측은 여전히 허씨가 톨루엔에 중독됐다고 믿고 있지만, 입증할 근거가 없어 이렇다 할 보상도 받지 못하고 있는 허씨를 안타깝게 바라보고만 있다.

경기도 반월공간의 자동차 부품 제조업체 ㅅ 강업에서 일하는 김야무씨도 허씨와 비슷한 처지이다 지난 4년 동안 줄곧 자동차용 판스프링에 페인트 스프레이 작업을 하는 속칭 ‘하도치기’를 해온 김씨가 자신의 몸에 이상이 있다고 느낀 것은 올봄 무렵부터였다. 만성 두통과 소화불량에 시달리기 시작한 김씨는 자신이 “작업용 페인트에 섞인 유해물질에 중독됐을 것”으로 의심해 노동부에 요양신청할 것을 고려중이지만, 회사측이 작업병 관련 여부를 밝혀줄 작업환경 측정 결과를 공개하지 않아 애만 태우고 있는 상태이다. 이 회사 노조간부 최민석씨는 “현재 1차검진 결과를 기다리고 있으나 정확한 결과가 나올 것으로 기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말한다.

한국의 근로자들이 직업병의 위험으로부터 무방비 상태에 놓여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는 이밖에도 얼마든지 있다. 국내의 직업병 환자수는 지난 90년의 노동부 통계만 보더라도 1천 6백 38명에 이른다. 이들 가운데 23.49%는 각종 유해물질 농도가 노동부의 허용기준을 훨씬 넘는 유해작업장에서 일한 근로자들이었다. 작업환경 측정이 제대로 이뤄지면 이들 환자는 조기발견 또는 사전예방이 가능하다. 그러나 소음이나 조명불량, 유기용제 그리고 특정 화학물질과 중금속 등 작업장 내 각종 유해인자를 측정하는 작업환경 측정실태는 여전히 수박 겉핥기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특히 소음이나 분진과는 달리 측정 ? 분석이 까다로운 중금속, 유기용제는 그나마 형식적인 작업환경 측정에서마저 빠져버리기 일쑤여서 더욱 걱정스럽다.

측정?분석 둘다 합격한 기관은 31%

지난 7월 중순 산업보건 연구단체인 ‘노동과건강연구회’(이하 노건연. 회장 양길승)는 경인지역의 제조업체 42곳의 작업환경 실태를 측정해 발표했다. 이에 따르면 톨루엔 벤젠 트리클로로에틸렌 등 각종 유기용제를 쓰는 사업장 32곳 중 5개 사업장 (15.6%)이 작업환경 측정 과정에서 유기용제를 빠트린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노건연은 작업환경 측정기관들이 유기용제를 측정하면서 시간과 횟수, 방법 등 측정에 따른 세부 규정을 지키지 않고 있음도 밝혀냈다. 중독이 심할 경우 신경마비 증세와 죽음까지 초래할 수 있는 유기용제가 감시망을 벗어나 시각지대에 방치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조사에 참여했던 장지혜씨(노건연 연구간사)는 “유기용제와 같은 물질은 작업시간별로 농도가 일정치 않아 보통 6시간 이상 연속 측정해야 하는 등 까다로운 규정을 두고 있으나 지켜지는 일은 극히 드물다. 그 결과 유해물질 농도가 실제보다 훨씬 낮게 나타나는 사례가 많다”고 밝힌다.

작업환경 측정이 부실한 이유는 측정기관 수와 전문인력이 절대적으로 모자라기 때문이다. 91년 현재 작업환경 측정기관의 수는 사업장 자체 측정기관을 제외하면 불과 50개. 전문인력은 모두 2백여명으로 하루 3.2개 사업장을 측정하고 있다. 일본의 경우 측정기관수는 6백20여개, 등록된 측정인력은 1만4천5백여명에 이른다.

그러나 무엇보다 문제가 되는 것은 측정과정이나 측정기관 수가 아니라 측정된 시료가 얼마나 정확하게 분석되고 있는 가 하는 것이다. 아무리 완벽하게 작업환경을 측정했더라도 분석능력 수준이 낮으면 직업병의 조기발견, 예방 ? 치료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현재 작업환경 측정기관으로는 종합병원급 의료기관, 교육법에 의한 대학 또는 그 부속기관, 사업장 자체 측정기관 등이 있다.

지난 7월29일 산업보건연구원이 서울에서 열린 한 국제 학술세미나에서 발표한 보고서(‘작업환경 측정기관의 정도관리 실시 결과’)는 충격적이다. 작업환경 측정기관으로 지정됐던 대부분의 기관(지정 측정기관)이 정확성은 물론 분석능력 자체에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음을 구체적으로 입증했기 때문이다.

정도관리란 벤젠 톨루엔 등 유기용제와 납 카드뮴 따위 중금속이 든 시료를 각 실험실에 보내 이를 분석하게 한 뒤 분석 방법과 결과를 평가해줌으로써 작업환경 측정의 정확도를 관리하는 제도이다. 산업안전보건법은 작업환경 측정기관에 대해 의무적으로 정도관리를 받도록 하고 있으나 체계적으로 실시돼 결과가 나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보고서에 따르면 유기용제 분야에서는 30개 가입기관 중 43.3%인 13개 기관이 합격했고 금속분야에서는 51.7%인 15개 기관이 합격했다. 두 분야 모두 합격한 기관은 29개 중 9개에 지나지 않았다(도표참조). 유기용제는 12개 분석치 가운데 9개 이상, 금속분야는 8개 분석치 가운데 6개 이상이 합격해야 각각의 분야에 합격하는 것으로 했다.

산업보건연구원은 이번에 실시된 정도관리가 “작업환경 측정기관의 ‘자격시험’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에 각 기관이 사전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을 것이라는 점”에서 이와 같은 결과를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특히 이번 시험에 쓰였던 시료들은 비교적 분석하기 쉽고 그 도안 각 기관에서 많이 분석해 오던 물질이었기 때문에 놀라움이 더욱 크다. 작업환경 측정 감독기관인 노동부는 정도관리 결과가 불러올 파장을 우려해 보고서 공개를 꺼린 채 쉬쉬하고 있다.

지난 90년 한국통신의 전람원이던 정태문씨가 납중독으로 죽어갈 때 회사측은 돼지고기 값으로 1주일에 6천원씩 지급했다. “돼지고기가 납을 씻어 낸다”는 근거없는 속설에 따른 일종의 배려였다. 중독물질이 무엇인지 조차 밝혀지지 않는다면 이같은 배려마저 사라질 것이다. 작업환경 측정실태를 개선하는 일이 중요한 까닭은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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