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리 잃어버린 여성주의 저널리즘
  • 이효성 (성균관대교수· 언론학) ()
  • 승인 1990.06.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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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학자가 분석한 5월호 여성지- “여성현실 왜곡, 수단화”

남성을 대상을 하는 잡지들은 다양하다. 그리고 ‘남성지’라는 이름이 붙지도 않는다. 그러나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잡지는 ‘여성지’라는 이름이 붙는 여성 종합지들이 거의 전부다. 여성지는 그 이름과 형식에서 여성이 지배당하는 특수한 일부임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그 특수한 일부는 인구의 반이어서 많은 여성지를 구독하고 있다. 따라서 여성지를 주의깊게 분석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여성지가 경우에 따라서는 전 지면의 반에 육박하는 과다한 광고를 게재한다든지, 광고와 기사가 잘 구별되지 않는다든지, 기사 사이에 광고가 끼어 있는 것이 아니라 광고 사이에 기사가 끼어 있는 경우가 많다든지, 목차를 찾기가 힘들다든지, 특정신문사에서 발행하는 여성지들이 여성지를 지배하고 있다든지 하는 외적인 특성은 접어두고 그 기사 내용만을 문제삼기로 하자.

 이 분석을 위해 여성잡지 5월호를 택했다. 그리고 여성주의적 저널리즘의 입장에서 그것들을 살펴보았다. 여성주의적 저널리즘이란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선 저널리즘을 뜻한다. 여기서 저널리즘이 무엇이고 여성주의적 관점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가 대두된다.

 저널리즘은 시사적 관심의 문제를 신문이나 잡지와 같은 정기간행물을 통해 사람들에게 전하기 위해 그 문제에 관한 사실이나 의견을 수집하고 편집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여성주의적 관점이란 사회현실의 속성을 경험하고 관찰하는 데 있어서 性을 기본적인 범주로 보는 것이다. 말하자면 여성의 처지를 비판적인 반성과 분석의 출발점으로 삼는 것이 여성주의적 관점이다. 그러나 여성주의적 관점은 단순히 성적 문제만을 고려하자는 것이 아니라 성에 기초한 억압적 사회질서를 이해하고 변화시키려는 것이다. 결국 여성주의적 관점은 여성이 억압당하는 남성주의적 또는 남성지배적인 사회현실을 비판적으로 보고 그런 비판적 현실이해를 통해 그 현실을 변화시키고 개혁시키려는 관점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여성주의적 저널리즘은 성에 기초한 억압적 사회현실을 이해하고 변화시키려는 관점에서 시사적 관심의 문제를 정기간행물을 통해 사람들에게 전하기 위해 그 문제에 관한 사실이나 의견을 수집하고 편집하는 일이 된다. 이런 여성주의적 저널리즘은 여성을 구속하는 물리적·제도적 억압으로부터 여성을 자유롭게 하려는 것이다. 따라서 여성주의적 저널리즘은 여성을 위한다는 정기간행물로서의 입장이 마땅히 되어야 한다. 거꾸로 여성주의적 저널리즘은 여성잡지를 분석·비판하는 적절한 기준이 될 수 있다.

 이제 여성주의적 저널리즘을 기준으로 여성지 금년 5월호를 분석·비판하기로 하자.

여성지에 저널리즘이 없다
 첫째, 여성지에는 진정한 시사적 관심의 문제가 없다. 4월에는 KBS사원과 정부의 대결로 KBS방송이 장기간 비정상적으로 운용되었다. 그러나 거개의 여성지들은 이 중대한 시사적인 문제를 다루지 않았다. 겨우 《여성동아》와《샘이깊은물》만이 KBS사태를 다룬 기사를 게재했다. 여성들이 방송을 더 많이 보거나 듣는다는 점을 감안하면 KBS사태는 여성지가 다뤄야 할 대단히 중요한 시사적 관심의 문제였다. 따라서 KBS사태에 대한 여성지들의 침묵은 여성지가 저널리즘다운 저널리즘을 행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대변해준다 하겠다.

 그리고 금년 5월은 광주항쟁 10주년으로 대대적인 행사가 있었다. 그렇다면 여성지도 광주항쟁 그 자체나 10주년 기념행사 등을 다루었어야 했다. 광주항쟁이야말로 5월의 중요한 시사적 문제이다. 여성지이기 때문에 광주항쟁에서의 여성의 역할이라든가 광주항쟁 희생자의 어머니 얘기라든가 하는 얼마든지 발굴하고 다룰 수 있는 내용들이 있다. 그러나 우리 여성지들은 한결같이 광주항쟁과 관련된 기사를 게재하지 않았다.《여원》의 “광주, ‘아빠 영정든 그아이’의 그날 이후 10년”이 고작이다.이런 여성지의 편집태도는 어떤 형태로든 광주항쟁을 다룬 일반 시사잡지의 태도와는 대조적이다. 저널리즘이 시사적인 관심의 문제를 다루는 행위라면 우리 여성지에는 저널리즘이 없다. 여성주의적 저널리즘은 말할 것도 없다.

 둘째, 여성지는 중요한 ‘시사적 관심’의 문제는 다루지 않는 반면 ‘시시한 관심’의 문제는 지나치게 많이 다룬다. 재벌·명사·연예인 등의 사생활에 관한 얘기는 넘쳐흐른다. 현대그룹 명예회장 넷째 아들 정몽우씨의 자살얘기, 정일권씨의 사생아 장병열씨와 그의 어머니에 관한 얘기, 김옥길 전이화여대 총장의 투병기, 마광수교수의 이혼얘기, 박정희씨의 여자얘기, 민주당 허탁의원 부부얘기, 가수 김학래씨의 결혼얘기 등이 5월호의 주요 메뉴였다. 이중 정몽우씨의 자살얘기는 무려 9개지의 지면을 장식하였고 장병열씨의 이야기는 7개지에 올랐다.김옥길씨의 얘기는 6개지, 박정희씨와 마광수씨의 얘기는 각각 4개지에서 다루어졌다.

명사 사행활 얘기로 사회적 관심 차단시켜
 이 얘기들을 보면 여성지들의 주된 관심사가 무엇인지 알 수 있다. 그것은 다름아닌 명사들의 결혼·이혼·애정행각·죽음 등이다. 이런 기사들은 독자들에게 심심풀이를 제공하고 유명한 사람들도 똑같은 인간이라는 사실을 확인시켜주는 긍정적인 역할을 한다. 그러나 이런 긍정적인 역할에 비해 그 부작용은 훨씬 더 클 것으로 추정된다. 이런 기사들은 첫째로 독자들의 귀한 시간을 앗아간다. 몰라도 그만인 시시한 얘기를 길게 부풀려놓은 기사에 빼앗기는 시간에 다른 생산적인 일을 하거나 자기실현을 위한 일을 한다면 더 큰 보람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둘째로 이런 얘기들은 독자들의 관심과 사고의 폭을 줄인다. 쓸데 없는 남의 사생활 얘기만 읽다보면 더 중요한 사회적 관심사에 신경을 쓸 수 없게 되고 종국에는 아예 다른 중요한 사회적 관심사가 있는지조차 모르게 된다.

 셋째, 여성지들은 성공담을 많이 다룬다. 예를 들면, “김우중 秘자서전-신문팔이 소년, 냉차장사에서 재벌회장되기까지 고백”(주부생활), “학사자격증, 나는 이렇게 땄다-난관이긴 여덟명의 입지 스토리”(여성동아), “빨랫비누장사 20년만에 여성재벌 1인자 된 애경유지 총수 장영신 ‘나는 이렇게 일어섰다”(여성중앙),“무일푼 상경, 연간 50억 매출 영등포문구 사장된 이강산:무일푼 촌놈의 끈질긴 구애에 비정한 서울도 손을 내밀었다”(여원), “말단사원을 현대건설사장으로 키운 이명박 아내 김윤옥씨”(마리안느) 등이다.

 이런 이야기들은 의지와 꾀와 힘만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올림포스 신들의 활동에 관한 그리스신화와 같은 일종의 신화라 할 수 있다. 이런 이야기는 사람들로 하여금 분발하고 노력하도록 하는 효과를 지닐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다른 한편 인간의 운명은 전적으로 자유의지와 선택에 달려 있다는 허위의식을 주입할 수도 있다. 그런 이야기들이 한결같이 개인들의 운명을 결정하는 사회구조적인 제약들은 무시하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재능과 노력에도 불구하고 성공하지 못한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그리고 많은 여성들이 남자보다 뛰어난 능력을 갖고 있어도 그 능력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운이 더 크게 작용했을 특수한 성공사례를 마치 개인의 의지나 노력이나 창의력에 의한 것처럼 제시하는 것은 인간의 보다 더 나은 삶을 위해서는 인간을 구속하는 사회구조의 변혁이 필요하다는 각성을 저해한다. 대신 주어진 현실을 무조건 수용하고 그 현실을 인내하고 잘 활용하는 것이 성공의 비결이라는 의식을 불어넣는다.

 넷째, 여성지는 훌륭한 가정주부, 즉 헌신적인 아내와 어머니, 매력적인 여성의 모습을 강조하는 기사가 많다. “화목한 가정, 행복한 자녀, 다정한 부부 만들기”(주부생활), “남편의 외도·바람끼 잠 재우는 법 : 권태기 극복을 위한 부부의성”(여성중앙), “평생연애 : 조강지처자리 내주고 매력적인 여자로 남는다”와 “‘대한민국 최고‘를 자부하며 사는 5가족의 꿀맛 지붕밑’”(여원), “이 여자의 남편 사랑”(가정조선), “식물인간 남편 회생시킨 아내 감동수기”(에레나),“까다로운 시댁식구와 잘 지내는 법”(마리안느), “모르면 손해보는 남자의 성”과“결혼 후에도 아가씨로 남는 법”(신부), “맹인 대학생의 새학기 : ‘어머니는 나의 눈입니다.’”(행복이 가득한집)등이 그것이다.

여성의 일방적 희생과 양보 강조
 이런 기사는 이기적이고 희생할 줄 모르는 여자에게 희생과 양보의 미덕을 일깨워주고 ‘칠칠맞지 못한 여자’에게 보다 단정한 모습을 갖추도록 하는 효과를 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기사는 여자의 일방적인 희생과 양보와 노력을 강조하고 현모양처와 매력적인 여성이 여성의 전부이고 여성의 행복은 오직 가정과 남편이 있다는 남성 위주의 고정관념을 보강한다. 이런 기사들은 여성의 역할을 가사와 자녀와 남편을 돌보는 가정주부로 그리고 남편을 위한 매력적인 성의 대상으로 한정하는 데 기여한다. 따라서 성에 기초한 억압적인 현실을 영속화하는 데 기여한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여성을 가정주부나 남편의 성적 대상으로 한정하는 기능은 여성지에 고정적으로 등장하는 패션·의상, 미용, 실내장식, 요리, 상담, 건강, 육아 등의 기사들에 의해서도 행해진다. 여성지는 성에 기초한 사회제도와 현실을 비판적으로 이해하고 그것을 변화시키려고 하기는커녕 그런 제도와 현실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그런 질서를 재생산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

 다섯째, 여성지에는 계몽적인 내용이 별로 없다.《샘이깊은물》을 제외하고 거의 모든 잡지들이 한결같이 위에서 지적한 그런 내용들이다. 예외에 속한다고 할 수 있는 것들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박철언의 ‘김영삼소련방문·합당비화’ 바로 이것이다”(주부생활), “권인숙의 특별연재 ‘세상이야기’”와 “신달자 인간탐구 이우정”(여성동아), “‘터뜨리면 끝장난다’ 박철언 폭탄선언내막”(어원), “전두환 가족 비밀리에 연회동에 살고 있다”와 “영광원전에서 일한 남편 때문에 기형아 낳은 백차순씨 통곡수기”(우먼센스) 등이 있다.

 그런데 이중의 어떤 것은 일간지·주간지·시사월간지 등에 게재된 것을 적당히 부풀리거나 개작한 것으로 별 알맹이도 없이 제목만 요란하다. 또 이런 내용들이 구조적인 관점에서 제시되는 것이 아니라 흥미 본위로 인간적인 차원에서 제시되기 때문에 그 의의가 축소되고 만다. 사건의 인격화는 사건을 재미있고 쉽게 만들지만 그 사건을 단순화하는 결과를 낳는다. 사건의 단순화는 그 심각성을 사소화하고 올바른 해결책을 찾는 데 방해가 된다.

여성 구속하는 고정관념 강화
 지금까지 여성잡지 5월호의 기사내용들을 여성주의적 저널리즘의 입장에서 살펴보았다. 그 결과로 여성지는 여성을 구속하는 현실을 변화시키려는 입장에서 여성을 각성시키는, 진정으로 여성을 위한 여성주의적 저널리즘을 실행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극소수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여성을 목적으로가 아니라 수단으로 대상화하여 여성들의 관심을 끄는 것이 그 목적이다. 여성잡지는 말하자면 여성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여성을 이용해 돈을 벌기 위한 것이다. 여성지의 발행도 사업인 이상 이윤을 목적으로 하는 그 자체를 나무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정도는 문제가 된다. 도가 지나쳐서 본말이 전도되면 곤란하다. 여성의 지위 향상이나 문화발전과 같은 여성들의 더 나은 처지를 지향해야 할 여성지들이 거꾸로 여성을 구속하는 고정관념과 그런 현실을 강화하고 재생산하는 데 기여한다면 그것은 분명 본말전도가 아닐 수 없다. 여성지들은 상업성 속에 매몰된 여성의 지위향상이나 여성문화발전과 같은 여성들의 더 나은 처지를 위한 여성주의적 저널리즘을 시급히 수행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우리 여성지들이 진정으로 여성을 위한 여성지, 그래서 돈도 벌고 보람도 느끼는 여성지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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