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속·설화에서 찾는 민족정기
  • 송준 기자 ()
  • 승인 2006.04.22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옛 철학 천착한 출판 잇달아 고전을 현대문법으로 조명 잊혀진 ‘우리’찾는 시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대전 엑스포로 이어지는 세계적인 행사를 접하면서 우리의 시선이 ‘밖으로 미래로’몰려 있는 대에, 눈을 안으로 돌려 ‘우리 것’의 본질과 그 이면에 담긴 철학을 천착한 책이 세권 출간되었다.

 한민족 고유의 설와와 민속을 현대의 문법으로 재해석한 이 저작들은 趙東一 교수(서울대·국문학)의 《민중영웅이야기》(문예출판사 펴냄)와 崔雲來 교수(한국교원대·국문학)의 《생명을 관장하는 북두칠성》(한울), 그리고 具美來씨 (우리문화연구원 연구위원)의 《한국인의 상징세계》(교보문고) 이다. 이 책은 인간사의 희노애락이 각 시대의 민중에게 어떤 의미 혹은 어떤 모양으로 투영됐는지, 또는 그 반대로 민중의 삶과 세계관이 어떻게 설화와 민속 속으로 스며들었는지를 들여다보는 창이다. 민족의 정체성을 되찾으려는 이같은 시도들은 역사 발전의 새로운 에너지로 쓰일 값진 성과물이라 할 수 있다.

 《한국인의 상징세계》는 우리 민족이 좋아하는 숫자·색·꽃·산·짐승 등이 상징하는 바를 설명하고 그 속에서 담긴 얼과 정서를 밝혔다. 이 책은 저자가 전승되어온 문화 요소들에 대해 “왜?”라는 의문은 갖고, 그 답을 얻기 위해 전문가가 없는 미개척 분야에 뛰어들어 자료를 수집하고 학자들을 찾아다니며 엮어낸 성과물이어서 더욱 값지다.

수·색·꽃·짐승에 깃든 선조의 정서

 1장 數 편에서는 1부터 12까지, 그리고 20 33 99 등 특이하게 애용된 수, 이밖에도 백 천 만 억 조 등 수의 단위가 내포하고 있는 관용적 의미를 정리하고 있다. 이 가운데 몇 개만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1은 최초의 수이며 純陽의 수이다. 모든 사물이 1에서 생겨난다. 2는 純陰의 수로서 남과 여, 음과 양, 하늘과 땅 등의 대립과 화합을 의미한다. 3은 순양 1과 순음 2가 결합해 완벽한 음양의 조화를 이룬 수이다. 완성·안정·조화를 상징한다. 33은 길수인 3이 겹친 것으로 가장 오나벽한 수로 강력한 전체성을 상징한다. 예컨대 독립선언 민족대표 33인은 곧 전 민족을 상징한다.

 2장 색에서는 흰색 붉은색 청색 색동저고리 등의 유래와 속뜻을, 3장 꽃에서는 연꽃·무궁화·사군자의 특성과 상징을 밝히고 있다. 특히 “무궁화는 국화로 적합하지 않다”는 비판론을 수용한 뒤 구체적 자료를 바탕으로 이를 뒤집어 보인 다음에 같은 논거는 주목할 만하다. 무궁화는 자생지가 전국적이지 않고 주로 남쪽에 분포하며, 원산지가 인도이고, 진딧물이 많고 꽃이 빨리 진다는 것이 비판론의 골자이다. 이에 대해 구미래씨(35)는 “무궁화는 어느 땅에서나 잘 자라고, 원산지는 인도 중국 한국이며, 진딧물이 많은 것은 사실이나 이는 인제시대 한민족의 상징인 무궁화를 격하시키려는 일본의 집요한 공작에 의해 심하게 강조된 측면이 있으며, 꽃한송이는 하루로 명을 다하지만 나무 한 그루로 보면 1백여일 동안 평균 2천~5천 송이의 꽃을 치우는, 말 그대로 無窮化”라고 밝혔다.

 4장부터 8장까지는 산과 까치 학 기러기 등 날짐승, 그리고 호랑이 소 용 등 길짐승의 상징 의미를 전승 민속을 예로 들어 설명하고 있는데 구씨는 “속편에서는 복·죽음·아들 선호 등 추상적 개념을 중심고리로 연구하고 싶다”고 말했다.

 《생명을 관장하는…》은 우리 설화와 고전 소설에 녹아 있는 조상의 인생관과 우주관을 삶과 죽음을 기본 얼개로 하여 조명했다. 이 책은 생명의 기원·수명관·영육 분리 철학·사후 세계에 관해 기술하고 있는데 몇가지 점에서 기독교적 관념에 견주어 독특한 특징을 보인다.

 우선 생명의 기원에 관하여 천지창조의 개념이 희박한 대신 천지개벽의 개념이 강하게 드러난다. 이에 대해 최운식 교수(51)는 “창조주에 대한 신앙 의식이 약한 한편 인간 중심 철학이 강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최교수에 따르면 전래의 신앙은 곧 민간신앙이다. 민간신앙에서 숭배의 대상이 된 人神은 최영장군신·남이장군신·임경업장군신 등인데 이들은 덕과 인품을 지녔으면서 억울한 죽임을 당한 위인들이다. 이들의 한은 곧 민중의 한이기도 했다. 민중은 이들을 신으로 받들어 모심으로써 한을 풀어주는 동시에 자기의 한을 풀려 했고, 신통력을 빌려 자기의 소원을 이루려 했다.

 그 결과 내세관은 현세의 연장이라는 성격을 띤다. 설화의 공간은 흔히 이승과 저승, 천상계와 仙界, 그리고 용궁이라는 다섯가지 입체적 형태로 설정되는데, 대개의 경우 주인공은 각 공간의 경계를 쉽사리 너나들며 현세의 소원을 이루는 것이다. 특히 영육 분리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전해오는데 여혼은 짐승이나 사람, 혹은 식물 등 여러형태의 몸껍질에 깃들고 이승과 저승을 오가며 원한을 풀거나 은혜를 갚는다. 이 이야기들은 권선징악과 사필귀정의 교훈을 담고 있다.

“현대사의 민중영웅은 작가가 만들어야”

 《민중영웅이야기》는 고주몽 석탈해 등 고대신화에서부터 궁예 홍길동 등 중세에 이르는 영웅담, 나아가 최재우 김덕령 곽재우 등 근세의 영웅담에 이르기까지 모두 20여명의 이야기를 다룬 것이다. 이 책은 서양 및 중국 영웅과 우리 영웅의 유형을 비교·분석하는 한편, 시대의 변천에 따라 변해온 영웅의 성격을 분류하고 시대별 영웅의 성격에 담겨 있는 민중의 갈망과 철학을 간명하게 정리하고 있다. 조동일 교수(53)는 초기 영웅의 특징으로 진취성과 윤리로부터의 자유를 든다. 고대설화에서는 아버지가 아들을 버리거나 죽이려 하고, 아들 역시 효도의 의무를 갖지 않으며, 그 결과 진취성이 무한히 강조된다. 충성의 덕목도 마찬가지이다. 이전의 왕이 있든 없든 스스로 왕이 되려는 의지의 구현이 초기 영웅의 외길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조선조 들어 주인공의 모든 행위가 충효에 의해서 제약된다. 그 결과 진취적이고 주체적이던 영웅상은 운명론, 특히 패배로 귀결되는 비관론적 색채를 강하게 띠게 된다. 예컨대 탁월한 용력을 발휘해 임진란 때 왜적을 무찌른 김덕령은 모함을 받아 투옥·처형되며, 최제우도 득도 후 도탄에 빠진 민중에게 동학을 설파하다 역모혐의로 목에 칼날을 받는다.

 이같은 절망적 심정을 반영한 것이 곧 진인 출현설과 아기장수 설화이가. 진인 출현설은 결말을 밝히지 않음으로써 승리의 가능성을 예언하고 그 기대치를 한껏 높인다. 민중은 억압과 착취로 얼룩진 기존 지배체제를 뒤엎어줄 영웅, 즉 진인에의 꿈을 계속 간직할 수 있는 것이다. 반대로 아기장수 설화는 비참한 상상력의 극치이다. 겨드랑이에 비늘이나 날개를 달고 태어나, 역적이 될까 염려한 부모나 이웃 사람들에게 피살된다는 것이 그 줄거리이다.

 그러나 조교수는 “아기장수이야기는 비관론이 아니라 낙관론”이라고 말한다. “설화적 표현으로는 아기장수를 죽이고 있지만 그것은 지배세력의 냉엄한 칼날을 피하려는 경험적 지혜이다. 민중영웅이 나타날 때면 갑오농민전쟁 때처럼 사람이 갑자기 모여들고 사태가 커지는 것이 그 중거이다.”

 조교수는 우리나라 민중영웅의 특징을 메시아 사상과 연결지어 한마디로 설명한다. “메시아 사상이 ‘구세주’를 기다리는 이스라엘 민중의 갈망이었다면 우리의 영우이야기는 ‘革世主’를 기다리는 것이다.”

이조 말기 義士들의 충정과 독립운동 등으로 민중영웅은 그 맥을 잇는다. 그렇다면 군사독재로 얼룩진 현대사의 민중영웅은 어디 있는가. 조교수는 “그것이 오늘날 작가의 몫”이라고 말한다. 이같은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시대 상화을 담은 ‘현대의 영웅’을 작가들이 만들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까지 해왔고 앞으로 계속할 연구 작업은 역량있는 작가를 기다리는 ‘적극적 안배’이다”라는 조교수의 말은 비단 작가뿐 아니라 민족 고유의 숨결을 후대에 이어줄 모든 학자 및 저자 등의 경우로 확대 적용해도 무방할 듯하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