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담한’축소 수사 “청문회나 기대하자”
  • 문정우 기자 ()
  • 승인 2006.04.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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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군 관권선거 자금 부분 전혀 안 밝혀



이종국 지사, 경찰간부 호위 속 검찰출두도 ‘당당’
 대전지검에서 기자들은 李鍾國 충남 지사가 소환돼오는 것은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아도 금세 알 수 있었다. 이지사의 행차는 그만큼 유별났기 때문이다. 이지사가 청사에 도착하기 10분쯤 전이면 반드시 도청 직원과 경찰간부 수십명이 미리 몰려와서 도열해 있곤 했다.

 이지사가 검찰에 마지막으로 출두한 16일 오후 5시께 그들의 ‘시위’는 최고조에 달했다. 그들은 기다리고 있던 사진기자들을 사정없이 밀어붙이고는 이지사를 호위해 2층 특수부장실로 우르르 몰려들어갔다. 와중에 사진기자 여러명이 다치고 카메라 3대가 부서졌다. 문앞에서 통제하던 검찰 직원들도 속수무책이었다. 그때 누군가가 “검찰수사는 이제 더 이상 볼 것이 없다 6공 청문회가 열리기나 기대해보자”고 소리쳤다.

 그로부터 하루 뒤인 17일 검찰은 지난 8월31일 전 연기 군수 韓□洙씨가 양심선언을 한 이후 18일간 충청남도의 관권부정선거에 대해 수사해 온 최종 결과를 발표했다. 수사결과가 기자들의 예언대로 그야말로 보잘것 없이 된 것은 이미 모두가 아는 일이다.

 6공 청문회가 열려야 한다는 얘기가 실감날 정도로 20면이 넘는 수사결과 보고서 곳곳에는 사건을 축소하고 왜곡한 흔적이 역력했다. 보고서 말미에서 “계속 보완 수사해 의혹을 해소하겠다”는 결의를 보이고 있지만 이는 수서사건 때나 정보사터 사건 때의 보고서에도 붙어 있던 상투적인 맺음말에 불과하다.

 충청남도 관권부정 사건은 연일 신문과 방송에 보도돼 매우 복잡한 사건처럼 보였지만 사실 줄거리는 간단하다. 결정적인 매듭만 풀면 나머지 수사는 일사천리로 진행될 수 있는 사건이었다.

 

수표추적 흐지부지…매표 흔적‘세탁’의혹

 이번 사건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관이 과연 집권여당인 민자당을 대신해 매표행위를 저질렀는가 하는 것이다. 매표행위를 선거관리법에서는 가장 무거운 범죄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검찰은 이번 사건에서 매표행위에 사용된 자금의 출처와 살포 경로를 집중적으로 추적했어야 했다. 그런데 수사 보고서를 보면 검찰은 이 부분을 가장 흐리멍텅하게 수사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한준수 전 군수는 양심선언에서 지난 총선기간 중 이지사로부터 2천만원, 임재길 민자당 후보로부터 2천5백만원을 받고 군 자체에서 4천만원을 조달해 모두 8천5백만원을 살포했다고 폭로했다. 이와 함께 이지사로부터 받았다는 돈 가운데 일부인 10만원권 수표 90장을 증거로 내놓았다. 나중에 민주당의 조사로 이 돈은 관급공사를 주로 수주해온 대아건설에서 지난 2월29일 발행한 14억9천여만원 중의 일부인 것으로 밝혀졌다. 그런데 검찰은 이번 수사에서 “한씨에게는 1천만원밖에 주지 않았으며 그 돈은 지난 1월9일 지사로 취임한 뒤 친지로부터 받은 ‘격려금’의 일부”라는 이지사의 주장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였다. 또 대아건설이 발행한 수표의 유통경로에 대해서는 “확인하지 못했다”는 말로 얼버무렸다. 도청이나 군청 직원들이 선거자금을 모으고 살포했는지에 대해서도 “관련자들이 부인하고 있어 증거확보를 하지 못했다‘고 털어놨다. 결국 검찰이 자금과 관련해 밝혀낸 것은 아무것도 없는 셈이다.

 만약 이지사 본인이 1천만원을 받았다고 시인하지 않았으면 그나마 이지사를 불구속 기소도 하지 못할 뻔했다. 민주당에서 한씨가 증거로 제출한 돈이 대아건설에서 흘러나왔다는 사실을 밝혀내지 않았으면 자금에 관한 한 검찰은 먼산만 바라보고 있었을 수도 있다.

 대아건설에서 발행한 수표를 추적하기 어려웠다는 것은 누가 들어도 납득하기 어려운 얘기이다. 문제가  된 자금은 모두 정보사터 사건 때와는 달리 세탁도 되지 않은 ‘더러운’돈들이다. 대아건설에서 발행한 수표는 그만 두더라도 검찰이 만약 한씨가 제출한 수표의 앞뒤 일련번호의 유통경로만 추적했어도 결정적인 사실들이 밝혀지면서 이 사건의 전모가 백일하에 드러났을지도 모른다.

 한씨는 구속되기 전부터 “돈을 받던 날 다른 군수들도 이지사로부터 같은 수표다발을 받았을 것으로 확신한다”고 주장해왔다. 한씨의 말이 사실이라면 한씨가 가지고 있던 수표의 앞뒤 일련번호의 돈은 다른 군수에게 전달됐을 가능성이 높다. 이 수표들은 발행된지 이미 6개월이 지났으므로 발행처인 충청은행에 60% 이상이 회수돼 있을 것이다. 그 수표의 임자들을 추적해보면 이지사가 정말 결백한지 그리고 관권선거가 연기군에서만 이루어졌는지 명백하게 밝혀질 수도 있었다. 따라서 한씨 자신이나 민주당 관계자들은 이 부분에 대해 적극적으로 수사해줄 것을 거듭 요구했으나 검찰은 묵살하고 말았다. 충청남도의 시장·군수들이 한씨 규탄대회를 열려고 하는 등 두 차례나 ‘단체행동’을 감행한 것은 검찰이 이 부분을 건드릴까봐 선수를 친 것이라는 얘기도 들린다.

 만약 자금관련 부분이 깨끗이 규명되었으면 선거지침서를 누가 작성했는가 하는 문제는 아마 논란거리도 되지 못했을 것이다. 또 이 돈이 “관계기관”에 넘어갔는지 여부도 알 수 있을 것이기 때문에 관계기관대책회의 문제도 의외로 쉽게 풀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검찰을 이같은 기본적인 수사를 소홀히 하고 곁가지에 매달려 혼란만 가중시켰다. 장황한 보고서는 검찰이 얼마나 본질적인 문제를 외면하고 있는지 말해줄 따름이다.

 검찰수사는 막을 내리고 김영삼 민자당 총재는 “대담한 개각을 하겠다”고 선언했으나 관권선거의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점점 높아만 가고 있다. 한씨의 후견인역을 맡았던 박계동 의원(민주당)은 “만약 이대로 마무리된다면 국회의원직에서 물러나겠다 민주개혁모임에 속해 있는 20여명의 동료 의원들도 모두 같은 생각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

 또 전국 곳곳에서는 연일 대학생과 민간단체들이 관권선거 부정사건의 재수사와 관련자의 사법처리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이번에도 정치권과 관에 배속된 전통을 유감없이 보여준 검찰은 입이 열 개라도 할말이 없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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