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다 푼 수수께끼 오대양 재수사
  • 정기수 기자 ()
  • 승인 1991.09.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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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변사는 동반자살, 사건 당시 결론과 동일 자수 동기·사채행방 수사결과 별 진전 없어

 김도현씨 등 살해 암매장범 6명의 집단 자수가 불러일으킨 오대양 의혹은 이제 너무나 커져버려 좀처럼 풀릴 수 없는 문제가 되고 있는 것 같다. 당시 집단자수자들을 대상으로 수사를 벌인 경찰은 “자수동기는 양심의 가책에 ?른 것이며 오대양사건과 관련해 밝혀진 새로운 사실은 없다”고 발표했었다.

 그러나 “오대양사건의 배후세력은 (주)세모와 구원파”라는 폭로가 새로 터져나오면서 검찰이 바로 ‘전면재수사’에 착수하자 여론은 급격히 타살 가능성 쪽으로 선회하게 됐다. 87년 사건 직후부터 누군가로부터 꾸준히 제기된 ‘S기업 K파 관련설’이 이번만큼은 사실로 밝혀지는 듯한 분위기가 팽배했던 것이 사실이다.

언론에 의해 형성된 ‘타살 의혹’
 많은 국민들은 “세모와 구원파에서 밀파한 일단의 폭력배들에게 32명이 어디에선가 살해되고, 일부 여자들은 성폭행까지 당한 뒤 천장으로 옮겨졌다”고 믿게 될 정도였다. 검찰은 그러나 ‘실망스럽게도’ 언론에 의해 형성된 이런 ‘의문’을 모두 풀지는 못했다. 지난 8월20일 40일에 걸쳐 10명의 전담검사가 1백 50여명의 참고인을 불러 조사한 끝에 발표한 수사결과는 ‘동반자살’이었던 것이다. 4년 전 사건 당시 수사와 88년 청문회 이후의 재수사 때와 똑같은 결론이었다. 검찰수사 결과 밝혀진 시간대별 상황을 보면 타살 가능성과 관련해 별다른 의문점은 발견되지 않는다(28쪽에서 32쪽까지 표로 정리한 오대양 생성과정, 직원 폭행치사 · 채권자 폭행-은신=경찰 · 채권단 · 가족 · 언론의 집중추적-사체 발견에 이르기까지의 상황일지, 32쪽의 4박5일 은신생활과 자살증거물 목록, 그리고 32쪽 정액양성반응 관련 보조기사 참조).

 자살이라고 할 때 당연히 제기되는 의문이 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거론된 수많은 타살의혹은 무엇인가”. 결과적으로 국민들이 검찰 수사결과에 대해 ‘자살로 밝혀졌다’가 아니라 ‘타살을 못밝혔다’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든 폭로 · 제보를 과연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수수께끼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이 ‘수수께끼’는 증거가 없으므로 명쾌하게 해설할 수 없는 문제이긴 하다. 다만 정치적 동기와 특정 개인 · 단체 · 기관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진 결과라는 얘기가 종교계와 정치권에서 돌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세모-구원파-오대양 3자관계를 주장하고 그러한 여론을 확산시킴으로써 득을 보는 세력이 있었다는 말이다. 이러한 동기 중의 일부와 관련해 지난 8월19일 한 조간신문은 다음과 같은 요지의 내용을 보도해 관심을 끌었다.

 “한 정통한 소식통은 ‘오대양사건 재수사가 5공과 오대양 또는 세모 유병언 사장이 밀접한 유착상태에 있는 것처럼 진행되자 全斗煥 전 대통령을 비롯한 연회동측이 정략적 수사라며 심한 불쾌감을 노출시키고 있다’고 전했다. 연희동측은 이같은 정황을 최근 유포되고 있는 ‘5공신당설’에 대해 쐐기를 박기 위한 반응으로 해석, 깊은 불쾌감을 표시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세모는 과연 집단변사 배후세력이었나
 세모와 5공은 매우 가깝긴 했지만 그렇다고 단단한 유착관계는 아니었던 것으로 나타나 있다. 즉 염보현 서울시장이 개입한 것으로 밝혀진 유람선 선정 등에서는 특혜의혹이 분명히 있으나 여론이 좋지 않자 5공정부는 세모에 대해 세무조사를 실시, 30억여원의 세금을 추징한 적도 있기 때문이다.

 어떤 동기에서건 검찰의 전면재수사는 무엇인가 새로운 사실을 밝혀내야만 한다는 부담감에서 출발한 것이 사실이다. 부풀려 질대로 부풀려진 의혹, 이른바 국민적 의혹을 해소한다는 차원에서 수사가 이뤄진 것인데 결과적으로는 또다른 의혹만 낳고만 셈이라는 지적이 많다.

 ‘타살을 못밝혀낸’ 수사로 보고 있는 국민들로서는 수사 막바지에 혹시 외압이 있지 ㅇ낳았나 하는 의혹을 가진 반면 ‘결국 자살로 밝혀졌다’고 보는 사람들로서는 “그렇다면 세모는 오대양과 어느 정도 관계가 있었다는 말인가. 과연 집단변사 배후세력인가”하는 의문을 품게 됐기 때문이다.

증폭된 여론 달래야 했던 검찰 디레머
 검찰의 수사방향은 크게 세갈래였다. 사채행방 자수동기 집단변사가 그것이다. 검찰의 수사결과는 이 세가지 모두에 세모가 관련돼 있다고 밝히고 있따. 그런데 문제는 타살로 믿고 있는 사람들이나 자살로 믿고 있는 사람들 양쪽 똑같이 그 논리에 납득하지 못하고 있다는 데 있다.

 그래서 이번 검찰의 전면재수사 결과는 “자살을 뒤집을 만한 증거는 없고 증폭된 여론은 달래야 하는 딜레마 속에서 이끌어낸 결과”라는 지적을 받고 있다.

 검찰이 맨 마지막으로 수사한 집단변사 부문부터 세모와의 관련성이 나타난 수사결과를 살펴보면 논리적 모순이 없지 않다. 검찰은 집단변사사건 결론을 다음과 같이 내리고 있다.

 “변사현장의 상황과 사체부검결과, 현장에서 발견된 메모지의 내용 및 변사에 이른 경위 등을 종합하면 변사자들은 4박5일 동안 슬레이트 지붕 밑 천장의 좁은 공간에서 탈진해 무기력 상태에 이르렀고, 충남도경의 형사대 및 채권자들이 찾아와 공장을 수색하는 등 상황이 더욱 긴박해졌으며, 마지막으로 기대를 걸었던 삼우측으로부터의 지원가능성도 없음이 명백해지자 박순자가 자기를 맹신 추종하는 다른 변사자들의 동의를 얻어 함께 집단자살하기로 결정한 다음, 이경수 김길환 등이 박순자의 지시에 따라 박순자를 필두로 나머지 변사자들을 차례로 살해하고, 그 과정에서 이영호 이재호는 목을 매고 자살하였으며 마지막으로 이경수가 김길환의 목을 졸라 살해한 후 자신도 목을 매어 자살한 것으로 판단됨.”

 여기에서 볼 수 있듯이 집단변사와 세모가 관련된 것으로 검찰이 밝힌 부분은 ‘마지막으로 기대를 걸었던 삼우(세모 전신)측으로부터의 지원가능성도 없음이 명백해지자’라는 말이 유일한 것이다. 이는 변사현장에서 발견된 ‘지금 삼우도 무척 고통받고 있답니다’라는 쪽지에 대해 검찰이 수사결과 내린 해석이다. 즉 처음 조사때에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완강히 부인한 박용주를 재차 불러 추궁한 끝에 박용주의 형인 박용준이 박순자의 부탁을 받고 삼우에 지원을 요청했으나 당시 삼우의 자금사정이 좋지 않아(고통박고 있어) 거절당한 사실을 밝혀냈다는 것이다.

 세모측은 이에 대해 “박용주나 박용준이 당시 삼우를 다녀간 사실이 없으며, 송재화 등 통용파(표 참조)의 공통적인 수법대로 박순자도 사업을 하면서 삼우와 유사장이 뒤에서 보호하고 있는 것처럼 선전했을 것이기 때문에 ‘삼우도 어려우니 기대하지 말라’는 뜻으로 누군가가 말해 그런 메모가 전달됐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박순자 송급 시기는 오대양 설립 이전
 검찰은 박용주인 잠적하고 없는 상태에서 박용주를 통해 파악해다고 하는 당시의 ‘지원요청’ 경위에 대해 구체적인 설명을 유보하고 있다. 그런데 지원을 요청했다고 하더라도 ‘변제’가 이니고 ‘지원’이었다는 사실이 의미있는 대목이다.

 사채행방에 대한 수사결과는 왜 변제요구가 아니고 지원요청을 했다는 것인지 그 까닭을 알 수 있게 한다. 오대양은 세모에 “내돈 내놓으라”고 요구할 만한 입장이 아니였던 것이다. 즉 오대양 사채중 세모로 유입된 금액을 검찰이 밝혀낸 것은 1억7천5백만원이 전부였다. 검찰은 “박순자가 83년11월~84년4월 사이 송재화에게 4억6천3백92만원을 송금한 사실과 송재화의 구좌에서 인출된 수표 1억7천5백만원이 (주)세모 관련자들에 의해 최종적으로 은행에 제시된 사실이 확인됐다”고 밝혔다.

 박순자가 돈을 보냈다는 83년 11월~84년4월 시기는 오대양이 설립되기 이전(표 참조)이라는 점에서 이 돈마저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송재화 박순자 박용준 등 통용파는 이 시기에 자신들의 중심사업으로 미양코리아를 운영하고 있었으며 84년4월 부도를 냈다. 또 미양코리아??? 당시 수입업무를 무역회사인 삼우에 의뢰하고 있었다. 따라서 박순자가 송재화에게 5개월 동안 15차례에 걸쳐 집중적으로 보낸 4억6천여만원은 오대양 사채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미양코리아의 부도를 막기 위한 돈이였으며 (주)세모 관련자들에게 전해진 1억7천여만원은 수입 대금으로 지급한 것이었다는 풀이가 있다.

 오대양과 관계는 없지만 유병언 사장이 송재화 등을 통해 모집한 사채 11억9천6백95만원을 ‘상습편취’했다는 혐의도 재판과정에서 진실이 밝혀질 것이라고 세모측은 주장하고 있다. “그 시기가 82~83년에 집중된 것을 보면(표 참조) 유사장을 팔며 사업하는 과정에서 무리하게 사채를 끌어들인 통용파의 사기행각임을 쉽게 알 수 있는 것인데, 89년 송재화 사기사건과 강석을 사기사건 당시에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는데도 일부 폭로 · 제보자들의 일방적인 주장, 예컨대 현금을 마대에 담아 미니버스로 역삼동 개발실에 전달했다는 등의 진술을 검찰이 그대로 받아들인 데 따른 결과”라는 것이다.

자수자 주장 믿는 사람 많지 않은 듯
 이때문에 세모측은 “세모 · 구원파와 적대관계에 있는 사람들이 통용파를 중간사체 모집책, 미양코리아 등 통용파 사업은 세모의 사채를 대기 위하 위장기업이라는 등으로 ‘조작’해온 수년간의 ‘음모’가 이번에 드디어 여론을 타고 성공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도 세모측의 주장이 설득력을 얻지 못하는 것은 유사장이 사업 초기 단계에서 자금을 신도들로부터 공모하는 등 ‘교회와 사업의 일치’라는, 여론의 비난을 받기 쉬운 행태를 보였기 때문인 것으로 여겨진다.

 검찰에서 진술한 몇몇 참고인의 주장이 사실이 아니거나, 적어도 과장됐다는 것은 세모측의 주장에 의해서가 아니라 검찰이 발표한 오대양 사채의 규모와 행방에서 분명하게 입증되고 있다(30쪽 표 참조). 검찰은 총 사채모집액을 1백8억원(그동안 일부에서는 2백억~3백억원까지 주장)으로 파악, 이중 약 80%인 80억~90억원이 고율(평균 월3부)의 사채이자로 지급됐다고 밝혔다.

 여기에 인건비 등 일반관리비, 특히 사채를 끌어들이기 위해 최고급 시설과 생활을 유지한 기숙사 학사 육아원 등의 운영비가 적지 않았을 것이다. 이는 사채의 대부분이 어디로 흘러들어간 것이 아니라 오대양 자체 내에서 소진됐음을 말한다.

 이처럼 검찰의 수사결과를 놓고 보면 세모와 오대양 사건의 관련성은 그다지 긴밀해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세모는 김도현 등의 자수를 권유했다니 이것을 어떤 논리로 설명할 수 있을까. “세모와 오대양의 고리를 끊기 위한 것”이라는 검찰 발표는 설득력이 부족하다. 그렇다고 “오대양 생활을 뒤늦게 후회하던 차에 먼저 죄값을 치르고 나오라는 권유에 따랐다”는 자수자들의 주장을 믿는 사람도 많지 않은 것 같다.

 사채행방 집단 변사 자수동기 등 수사 결과의 핵심이 이렇게 명쾌하지 못하다는 것은 이번 수사가 객관적으로 사실을 모두 밝히지 못했음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오대양사건은 그러므로 언젠가 또한번 재론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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