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계간지 《그물코》 창간한 金芝河
  • 조용준 기자 ()
  • 승인 1994.07.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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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은 인간 내부 문제”

시인 김지하(53)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직업을 갖는다. 올겨울 창간을 목표로 하는 계간지 《그물코》의 발행인이 되는 것이다. 그 자신은 이 일을 ‘생애의 마지막 라운드’라고 일컬었다. 오랜 칩거를 끝내고 다시 돌아와 본격 활동을 앞두고 있는 김지하가 보는 세상살이는 어떤 것일까. 서울 서교동에서 사무실을 여는 축하 모임과, 환경윤리선언대회 1주년 기념 세미나가 열린 수유리 아카데미 하우스 두 곳에서 그를 만나보았다.

환경윤리선언대회는 어떤 의미를 갖고 있습니까?

현재의 환경문제가 일종의 윤리적인 결함에서 온 것이라고 보아 새로운 종교관이나 생활관과 함께 새로운 환경에 대처하는 생활윤리를 세워야 한다고 문제를 제기하고, 선언한 겁니다. 선언 내용은, 자연의 생명 역시 인간의 생명처럼 존중해야 한다는 생면 존중 사상입니다.

오늘 발제한 내용은 어던 것입니까?

환경은 환경이 아니라 생명이다, 환경운동이 생명운동으로 결과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환경이라는 것을 들러리나 무대 장식쯤으로 격하해서 보지 말고 인간과 자기 자신의 관계, 인간과 인간의 공동체적 관계, 인간과 자연의 생태적 관계, 이 총체적인 생명 고정 전체를 문제삼아야 한다. 그래서 개인의 자기 수련, 우주적 관심, 인간과 인간이 공존하는 공동체, 자연과 인간 사이에 한 차원 높은 생태계적 관계의 창조, 단순한 회복이 아니라 가장 중요한 기초인 인간을 재규정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우리는 환경개량주의 단계인데, 벽에 부딪쳐서 한 단계 더 넘어가야 한다는 인식들이 있어서, 그것을 생명운동으로 끌어올려야 한다는 주장들이 나오고,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생태주의적 근본주의가 이제 들어오고 있습니다. 이를 그냥 받아들일것이 아니라 동양사상과의 관계에서 이를 원천적으로 사전에 극복하고 넘어가야 합니다. 그래서 제가 제기한 것이 인간에 대한 재규정입니다. 인간은 자기 안에, 인간 안에 신령하고 무궁한 우주 생명이, 실체가 아니라 생성하는 과정으로써 살아 있다는 겁니다. 이것을 인정하고, 자기 자신을 실천하고, 남도 인정하고, 그래서 공경하고, 유기물이나 동식물, 심지어 기계마저도 우주생명을 형성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공경하는 윤리적 태도를 찾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자연과 인간이 합일할 뿐만 아니라 구분되는, 평등할 뿐만 아니라 차별되는 역설적 관계를 동시에 파악해 나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자연과 인간의 관계가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단순한 자연주의에 매몰될 것이 아니라, 현대의 과학기술을 조건부로 해서 적절히 다루고 흡수하고, 과학과 인간의 문화도 새롭게 평가하고, 사회구성체 원리도 새로 세울 수 있는 인간의 공동선이 나타나게 하자고 주장했습니다.

김선생님의 그런 생명사사의 뿌리는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저는 어렸을 적부터 생명과 죽음을 대립적인 관계로 보고 시를 써왔습니다. 제 서정시를 보면 강렬한 삶의 색조와 음울한 죽음의 색조가 대비됩니다. 그런데··· 흔한 이야기입니다만··· 감옥에 있을 때 창살 밖에 꽃이 피어 있는데, 생명은 무소부재다, 안팎이 없다, 그렇다면 고등 생명인 내가 생명의 질서를 깨우칠 수만 있다면 안팎이 없는 게 아니겠느냐, 감옥 안이든 밖이든 답답할 것이 없는 것 아니겠느냐, 이런 생각에서 출발해서, 그 때 외국에서 유행하는 잡지를 읽어보니까 환경운동 · 생태적 세계관 · 신과학 이런 것들이 나옵디다. 그래서 독재 대 민주의 대립적 구도나 투쟁적 구도로만 세계를 이해하는 것은 단견이다, 물론 민주화도 필요한 것이지만 보다 넓은 세계관, 즉 조화의 세계관에서 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도달하기 위해서 암세포적 조직에 대해서는 가차없는 처벌, 가열차게 저항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뒤부터는 동학 · 불교에 많은 관심을 가졌습니다. 이것뿐 아니라 노장사상, 심지어 성경이나 역학에 일관되게 흐르고 있는 것은 생명사상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그것으로 일관한 겁니다.

요즘의 젊은 세대, 즉 X세대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까?

그럼요. 저는 X세대에 대해서 두 가지 이해를 하고 있습니다. 아니다와 그렇다. 하나는 자본주의 소비 경제의 중요한 파트너로 등장해서 온갖 퐁요를 속물적 감각주의로 연ㄱ려시키고, 컴퓨터의 디지털 구조로 세계를 이해하고, 그래서 인간주의나 세계애가 깊지 못하고,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에서 극단적인 이기주의가 발달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보죠. 그렇지만 저는 그렇다고 하는 측면이 더 강하다고 보고 있습니다. X란 말 자체가 불확실정을 내포하고 있는데, 이 시대가 불확실성과 우연성을 자기 인식 체계 안으로 끌어들이기를 요구하고 있는, 그 상징이 바로 X세대입니다. 그리고 첨단 과학기술 · 물질 · 기계의 문제마저도 우리으 사고 영역, 삶의 영역을 확대해서 인식론적 차원으로 끌고 들어와야 합니다. 시대가 이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특히 X세대가 가지고 있는 이기주의 · 개인주의는 새롭고 탁월한 개성화의 한 조짐으로 보입니다. 이전까지 우리가 기대했던 큰 담론, 국가 · 민족 · 계급 이런 것들이 사람들을 사로잡고, 민중들의 삶의 자율성이나 일상성을 짓밟아버리고, 전쟁으로 몰고가고, 독재로 몰고가고 그랬기 때문에 이런 것에 반발해 튀어나온 일종의 반응으로 보는데, 이것이 부정적 이타주의나 맹목적 집체주의보다는 이기주의 · 개인주의가 새로운 사상 · 문화에 발효제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봅니다. 다만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자기가 무엇이기에 그만큼 자기를 신뢰하는가, 위하는가, 개성을 강조하는가, 이런 것에 대해 좀더 심각해져야 한다는 겁니다. 개인도 심각해져야 하지만, 신세대 이론가나 문화연구가들이 좀더 정직하고 진지하게 따져보아야 할 문제입니다. 사회 공동체는 이런 것이다, 사회 규범은 이런 것이다 하는 기존의 것들이 다 무너져 가고 있어요. X세대는 이런 것을 거부합니다. X세대는 반항하는 세대로서 일차적 의의가 있어요. 그 다음에 어떻게 건설할 것인가가 문제인데, 자기 안으로 깊이 들어가면 밖으로 나가는 창조적 길이 열릴 겁니다. 이렇게 해서 새롭게 건설되는 새 공동체에 저는 기대를 걸고 있습니다. 이렇게 해
서 창조되는 인간과 자연의 창조적인 생태 관계, 이것이 오히려 환경 위기를 호기로 전환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지 않나, 이렇게 해야 컴퓨터를 제어할 수 있는 정신적 항체가 생기지 않나 생각합니다.

박경리 선생님의 《토지》에서 제일 마음에 드는 인물은 누구입니까?

한 사람이 아닌데···, 예전에는 구천이가 마음에 들었고, 그 다음에는 길상이가 마음에 들고···. 이쁘고 정한하고 신념이 강하고, 일종의 죄의식이 투쟁적 정열로 전환되는 것이 저하고 비슷해서 좋아했는데, 그 다음에는 너그럽고 부드러운, 자연과 교감하고 인간에 대해 존중하고 하는 길상이 쪽으로 움직이다가, 길상이와 용이를 같이 좋아하다가··· 요즘에는 김범석이라는 인물이 있어요. 용촌의 김훈장 아들, 자의식으로 공부하는 농민운동가인데, 인간적으로 매력이 있다기보다는, 그 사람을 통해서 장모님이 내뿜는 자기 세계관의 문제, 사회주의는 결국 생명을 파괴할 것이다라고 보고, 동학이 좀더 일찍 혹은 나중에 일어났더라면 파괴되는 생명을 재건할 수 있는 사상으로 발전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농경생활로부터 자연을 배운 사람의 현대적인 문명 진단 같은 것이 나오죠. 그래서 이 인물이 재미있는 인물이라 보고 있습니다.

《토지》에 발현되는 사상, 또는 그 작품의 의의를 어디서 찾으십니까?

간단히 요약하면 생명과 한이지요. 생명을 가진 것들은 한을 품는다는 우주적 한이지요. 일종의 중생한, 중생으로 태어난 것은 모두 한을 갖는다, 왜냐하면 죽어야 하고 고통을 겪어야 하니까. 그러나 그 한을 성실한 삶을 통해서 승화시킴으로써 우주적 생명에 도달하는 과정, 이런 것이 모두 인류가 요구하는, 현대적인 사상적 · 문화적 요구에 대해서 박선생이 주는 강하고 중요한 메시지라고 보고 있습니다.

박선생님과 작품에 대해 자주 토론합니까?

많이는 아니고, 가끔 합니다.

선생님으 새로운 문학작품을 언제쯤 볼 수 있습니까?

늦여름쯤 시집이 하나 나올 겁니다. 5년 동안 써온 서정시들을 묶어서, 발표된 것도 있고 미발표된 것도 있고···, 제목은 《쉰》인데, 65편을 묶었습니다. 단시들입니다. 장시는 의욕은 있지만 기운이 없어요. 아직 옛날의 입담이 살아나지 못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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