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학문의 바다 위 외딴섬, 한국학
  • 구술정리 ● 우정제 기자 ()
  • 승인 1990.07.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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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 사학자 姜在彦교수 “세계 각국 학자들과 교류 있어야”

 한국정신문화연구원(원장李賢宰)은 지난달 25일부터 28일까지 ‘한국학의 세계화’를 주제로 제6회 국제학술회의를 개최했다. ‘한국문화 연구의 제문제’등에 관한 4명의 기조강연에 이어 철학 · 종교, 역사, 어문, 예술, 사회 · 민속, 정치 · 경제, 교육 · 윤리 등의 7개 분과에서 다양한 발표가 이루어진 이번 대회는 특히 소련 · 중국 등 공산권 국가를 포함, 11개국의 학자 67명이 주제발표에 나섬으로써 세계속의 한국을 총체적으로 조명해보는 뜻깊은 자리였다. ‘일본에서 본 한국학’을 주제로 기조강연을 한 재일사학자 姜在彦교수(64 ·교토 하나조노대학)로부터 국내외 한국학 연구의 동향 및 과제를 알아본다.(편집자 주)

 6 · 25동란 당시만 해도 일본대학은 한국학을 연구할 만한 학과도 지도교수도 없는 한국학의 불모지였다. 내가 오사카 상과대학(지금의 오사카시립대학) 대학원에 재학중일 때 6 · 25동란이 터졌고, 이를 계기로 일본내에서 한국에 대한 관심이 크게 고조되었다. 주위사람들로부터 한국에 관해 자주 질문을 받으면서 나의 관심도 전공보다는 한국에 대한 연구로 기울어갔던 것이다.

 일제시대 일본학자들의 한국사연구는 사회경제사 분야에 편중되어 있었다. 일본의 침략문제를 회피하다보니 정치사상사적인 연구가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근대사에서 청일전쟁 이후 한국의 정치사에 관한 연구는 전무한 형편이어서 문헌자료를 발굴하는 작업이 선차적이었다.

 이후 일본에서 한국사를 연구하는 데는 두가지 장벽이 있었다. 첫째 일제시대 경성제국대학이나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에서 연구하다 8 · 15이후 일본에 모인 학자들의 공통된 특성인 ‘식민사관’의 벽이었다. 한국에 대한 일본의 통치를 정당화하고 미화하려는 한국학의 ‘권위자’들에 맞서 식민사관을 지양 · 극복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둘째 외국인을 대학의 교원으로 채용하지 않는 철저한 배타성 때문에 한국학 연구를 계속할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였다.

 이처럼 연구와 생활을 병행할 수 없는 악조건 속에서 50년대 재일 한국인 소장학자들은 일본국민과 학자들 사이에 깊이 뿌리박힌 그릇된 한국관, 혹은 한국인관을 시정 · 극복하는 데 연구의 최대과제를 두었다. 그 점은 오늘에도 마찬가지이다.

 

한국의 한국학, 북한보다 늦게 출발

 50년대 한국에서의 한국학 연구 성과는 사실 미미한 것이었다. 일례로 국문학보다는 영문학이나 불문학 등 외국문학을 연구하는 것을 더 자랑스럽게 여기는 서양숭배 풍조가 있었고 그것은 역사 연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한국학에 대한 한국 학계의 본격적 관심은 60년대부터 시작되었다고 본다. 한국사를 비롯해 국문학 · 민속학 등으로 한국학의 연구 범위가 넓어지면서 그 내용도 심화되었다. 이 같은 성과는 이번 국제학술회의와 7개 분과에서 발표된 여러 논문에도 잘 나타나 있다. 또한 이번 대회에 소련 등 공산권 국가를 포함한 세계 각국의 학자들이 참가한 데서도 한국학 발전의 면모를 볼 수 있다.

 한편 북한의 경우 ‘한국학’이라는 용어를 쓰지는 않지만 ‘민족문화유산’이라는 이름으로 국가적 연구사업이 8 · 15직후부터 매우 활발히 전개되어온 것이 사실이다. 특히 한국근대사 연구에서는 외국의 침략을 반대하고 국내의 낡은 봉건제도를 타파하기 위한 민족해방운동의 연구가 주축을 이루었다.

 북한은 50년대 초반에 이미 사회과학 및 자연과학연구기관인 조선과학원을 설립해 국가적이 지원을 폈다. 뒷날 이 기관은 자연과학 연구를 점담하는 조선과학원과 어문학 · 역사학 ·  고고민속학 등을 연구하는 조선사회과학원으로 분리되었다. 북한은 또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어려운 여건에서 한국학을 연구해온 재일 연구자들은 조선사회과학원의 연구사로 임명, 후원하기도 했다.

 1966년부터 1967년을 고비로 북한에서는 커다란 사상적 전환이 있었는데 그것은 우리민족의 ‘애국전통’, 혹은 문화전통을 연구하는 것보다 김일성과 그의 가족을 우상화하는데 모든 연구력을 집중시킨 것이다. 이를 계기로 사회과학원 연구사로 임명돼 있었던 재일 연구자들의 대부분이 떨어져나가게 되었다(나 역시 그들 가운데 한사람이다). 이와 같은 북한에서의 역사연구 경향은 최근 한국 사학계에도 알려진 바 있는 《조선전사》에 잘 나타나 있다. 주체사상을 핵으로 하는 김일성주의의 여독으로 북한에서의 한국학 연구는 현재 완전한 침체, 혹은 후퇴상태에 빠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해외에선 중국학 · 일본학의 부수물 취급

 좀더 시야를 넓혀 볼 때 미국에서의 한국연구는 ‘한국학적인 접근’은 드물고 주로 국제정치적인 시각에서의 연구가 주류를 이루고 있는 것이 눈에 뛴다. 이밖에 소련의 동방학연구소를 위시한 동유럽 공산권 여러 나라들에서의 한국학 연구는 현재 서유럽에서의 한국학 연구를 오히려 앞서고 있다.  이 국가들은 주로 북한과의 연계하에서 연구를 진행시켜왔는데 최근 공산권 내부의 개방과 개혁에 의해 그들의 눈이 한국으로 돌려지게 된 것은 한국학 연구의 발전을 위해서도 매우 다행한 일이라 생각된다.

 중국에서의 한국학을 거론하기에 앞서 꼭 지적해야 할 것은 중국내 한인들이 스스로 중국내 55개 소수민족의 하나인 ‘중국 속의 조선족’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북경의 중앙민족학원(소수민족의 간부 및 전문가를 양성하기 위해 세운 종합대학)이나 연변의 연변대학을 비롯한 기타 연구소에서 한국의 언어 · 역사 · 예술 등을 연구하고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중국 속의 조선족’의 문화로서 연구하는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예컨대 한국사에 관한 연구서적을 내더라도 그것은 조선족의 역사 연구를 위한 것으로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해외에서 한국사를 연구하는 사람으로서 일본 · 미국을 비롯한 적지 않은 나라에서 아직도 한국학이 독자적 연구대상이 아닌 중국학이나 일본학의 부수물로 취급되는 경향이 지배적인 데 나는 늘 안타까움을 느낀다. 그러므로 이번 학술회의를 출발점으로 해서 한국학 연구가 그 자체로 독자적 연구가 되도록 하는 노력이 꼭 필요하다고 본다. 그러기 위해서는 세계 각국의 학자들과의 교류와 대화의 광장이 더욱 자주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한국은 여러가지 복잡한 문제들을 안고 있으면서도 경제적으로 기적적 성장을 이루었고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가까운 장래에 한국이 선진국 대열에 낄 것이라고 믿지만 선진국이란 다만 경제발전에 의해서만 이르게 되는 것이 아니다. 그에 상응하는 정치 · 사회 · 문화적 성숙이 뒤따라야 한다고 볼 때, 전자와 후자 사이의 괴리에서 파생하는 갖가지 알력과 갈등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한국학 연구를 비롯한 한국의 전반적 문화수준, 혹은 학술수준을 더욱 높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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