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 여론 처음 일깨운 ‘공추련’
  • 오민수 기자 ()
  • 승인 1991.12.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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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년 ‘온산病’ 문제화 오염현장 어디든 출동

 “우리나라 환경운동의 현주소를 진단하려면 공해추방운동연합을 들여다보라”

 공추련 활동에 애정의 눈길을 보내는 사람은 이 단체가 한국 환경운동의 구심점이자 상징이라는 뜻으로 이렇게 평가한다. 반대로 공추련의 역량을 얕잡아보는 사람도 한국의 환경운동이 아직 걸음마 수준을 넘지 못했다는 뜻으로 이 말을 한다.

 평가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우리나라의 환경운동은 이제 공추련을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 형편이다. 이 단체의 총무부장 황상규씨도 “핵이나 환경 문제에 있어서 거의 불모지대였던 한국에 반공해ㆍ반핵 여론을 일으켰다는 사실만으로도 공추련의 존재는 의미가 크다”라면서 “환경오염이 얼마나 심각한지에 대해 국민적 관심을 끌어낸 공추련의 성과”에 자부심을 보인다.

 운동단체가 대부분 그렇듯이 공추련도 종로구 충신동 골목 4층짜리 빌딩 허름한 터에 보금자리를 틀고 있다. 이 일대에는 기독교단체와 전민련 등 많은 재야운동 단체가 몰려있어 아직도 재야운동의 메카로 불린다. 공추련에는 이 일대에서 다른 재야 단체보다 방문객이 많다. 요즘은 하루 평균 70~80명이 찾아와 자료를 찾아보거나 상담을 한다. 특히 지난 여름 페놀사건이 터졌을 때는 매일 2천여통의 신고ㆍ문의 전화가 쇄도해 다른 업무가 마비될 지경이었다.

 “환경이 파괴된 곳이면 어디든지 공추련의 감시 눈길이 닿아있다”는 한 회원의 말처럼 이 허름한 사무실에서 환경오염에 관련된 모든 문제가 토론에 붙여지고 또 구체적인 실천방법이 모색된다.

공추련은 환경운동 성과의 바로미터
 공추련은 불과 3년 전인 88년 9월10일 창립됐다. 전신은 82년부터 국내에서 유일하게 반공해운동을 벌여오던 한국공해문제연구소. 그때만 해도 환경오염에 대한 일반의 인식이 형편없었고, 그 때문에 환경분야에서 운동을 한다는 것 자체가 이상하게 들리던 시절이었다. 당시는 정치의 시대였다. 그러나 최열씨를 중심으로 몇몇 뜻있는 사람들이 관심을 기울여온 환경문제가 서서히 사회문제로서 전면에 부각되는 시기이기도 했다.

 이런 상태에서 환경에 대한 무관심의 벽을 허문 것이 바로 ‘온산병’ 사건이다. 경남 울주군 온산공단 주변 주민 7백여명이 “가만히 있어도 뼈가 부러지는” 공해병에 시달리던 것을 85년 최열씨가 사회문제화한 것이다. “60년대 일본에서 악명이 높았던 ‘이타이이타이병’이 20여년 시차를 두고 한국에서도 발생했다”는 기사가 한동안 신문지면에 오르내렸다.

 이때 환경청과 벌인 지루한 공해병 논쟁은 일반인들에게 환경오염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는 계기가 됐고, 또 여러 갈래로 분산되어 있던 환경운동이 하나로 뭉쳐지는 계기를 제공하기도 했다.

 88년 9월 한국공해문제연구소는 공해반대시민운동연합ㆍ공해추방청년협의회와 합쳐 공추련을 창립했다. “이 땅에서 공해와 핵을 추방하여 민중의 생명과 건강을 지키고 우리민족의 삶의 터전을 바르게 세움을 목적으로” 새로운 조직이 탄생한 것이다. 최열 의장은 “환경에만 영역을 좁혀 얘기한다면, 환경정책이 전무한 한국은 엄밀한 의미에서 국가가 아니다”라면서 “사회구조적인 차원에서 문제를 하나하나 풀어가려는 의지로 공추련을 만들었다”고 설명한다. 공추련은 조직결성 이후 피해지역 주민과 결합해 왕성한 활동을 펼쳤다. 이는 다른 환경단체에 비해 단연 돋보이는 것이었다.

 공추련이 환경운동의 기치를 내걸고 출범한 이후 수많은 환경단체가 생겨났다. 이들은 환경문제를 이해하는 시각의 차이에 따라 대체로 세가지로 분류한다(본지 55호 참조). 체제변혁을 지향하는 사회구조적인 접근에서부터 생태학적 접근이나 전문가 위주로 구성된 기술적 접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성격을 드러낸다.

 공추련은 환경문제에 대해 사회구조적 접근방식을 택한다. “모든 국민이 가해자이면서 동시에 피해자라는 식의 소시민운동이나, 생명의 절대성만을 강조하는 생명운동 차원의 해결방식으로는 사회구조적으로 치밀하게 짜여있는 환경파괴 논리를 해체할 수 없다”고 분명한 입장을 보인다. 이때문에 일부에서는 공추련에 대해 지나치게 정치적이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환경 관련 자료 국내 최다
 그러나 수많은 환경단체 중에서 공추련만큼 헌신적인 단체도 없다는 게 전문가들의 일치된 견해이다. 고리핵발전소 핵폐기물 매립사건, 듀퐁 이산화티타늄공장건설 반대운동, 영광 무뇌아사건, 팔당호 골재채취 반대활동, 안면도 핵폐기물처리장 반대운동, 골프장건설 반대운동 등 지금까지 언론에 보도된 굵직굵직한 환경파괴 현장치고 공추련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이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공추련은 3년이 조금 넘는 기간에 탄탄한 조직으로 성장했다. 사무국 산하에 총무 재정 교육 편집 선전 5개 부서를 두고 있으며, 연구위원회 여성위원회 반핵평화위원회 조직위원회 지역직능위원회들을 통해 사안별ㆍ지역별로 주민들과 연대해 활발히 일하고 있다.

 공추련은 일반인들도 활용할 수 있도록 자료정보실을 운영하고 있는데, 국내에서 가장 많은 환경 관련 자료를 확보했다고 자부한다. 많은 신문ㆍ방송사 기자나 프로듀서도 환경특집프로를 제작할 때 공추련의 자료실을 이용할 요량으로 ‘어쩔 수 없이’ 회원으로 가입할 정도이다. 그리고 변호사와 법률전문가들로 구성된 환경법률상담실을 운영해 피해지역 주민들을 상대로 공해고발이나 공해 관련 행정심판과 소송에 관한 법률문제를 무료로 상담해준다. 이밖에 85년부터 전신인 한국공해문제연구소 시절부터 있어온 주부대상 교육프로그램 ‘공해추방 여성교육’을 통해 이 바닥에서는 이름깨나 알려진 의식화된 주부들을 상당수 배출했다.

 이처럼 공추련은 다양한 활동을 통해 환경파괴에 대한 교육ㆍ감시 기능을 충실히 수행했지만, 환경운동에서 차지하는 비중에 비추어 볼 때 역량이 명성에 못 미치는 면도 없지않다. 1천5백 회원을 자랑하지만 실은 상근회원 8명, 비상근회원 7명, 열성 일반회원 60여명이 거의 모든 일을 도맡아 처리하는 실정이다. 직업적으로 공추련에 매달리는 회원들의 월급은 고작 20만~30만원 정도인데 그나마 들쭉날쭉이다. 올해 1년 예산으로 약 1억2천만원 정도 집행했고 해마다 약 30%씩 예산상승이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재정난에 허덕인다. 자금은 회비 30%, 나머지 55%는 각종 수익사업으로 메꾼다.

 이러한 인적ㆍ물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오염없는 환경한국’을 이루려는 무거운 짐은 당분간 공추련이 떠맡아야 할 것 같다. 아직까지 대중동원 능력이나 자금력, 활동의 헌신성에서 공추련을 따라잡을 환경단체가 없기 때문이다.

전문가되도록 회원에 1인1기 교육
 이를 위해 공추련에서는 전문성ㆍ대중성ㆍ운동성 확보라는 ‘세 바퀴論’을 지론으로 삼는다. “그중 하나만 빠져도 공추련은 굴러가지 못한다”라는 게 최열씨의 설명이다. 그래서 공추련은 모든 회원이 한가지 분야에서 전문가의 안목을 지닐 수 있도록 하는 ‘1인1기운동’을 벌이고 있다. 물론 “언제나 현장에서 주민과 함께 운동을 풀어간다”는 원칙은 창립 이후 일관되어온 고집이므로 대중성과 운동성 확보에는 별 무리가 없다는 분석이다.

 최열씨는 “이 세 바퀴를 잘 꾸려 조직의 역량이 다져지면 전국의 모든 환경단체가 이용할 수 있는 환경회관과, 환경정책 생산에서부터 과학적 분석능력까지 갖춘 환경연구소를 세우겠다”고 밝힌다. 그래서 전국의 환경단체를 하나로 묶겠다는 의도이다. 공추련은 그 첫단계로 한달에 한번씩 전국환경단체연대회의를 주관하고 있다.

 공추련은 이제 환경운동의 상징이 됐다. 이 단체가 겪는 여러가지 어려움은 우리 환경운동의 수준일 뿐이지 결코 미래를 제약하는 한계는 아닐 것이다.


공추련 선정 91년도 10대 환경뉴스

공해추방운동연합은 91년을 정리하며 국내 10대 환경 사건을 선정하였다. 선정기준은 첫째 국민의 환경의식에 영향을 미친 정도, 둘째 실질적인 피해 정도, 셋째 대중들의 인지 정도, 넷째 조직적인 환경운동으로 발전되었는지 여부이다. 이와 더불어 공추련은 5대 환경파괴범을 정했다. 1위는 페놀사건의 두산전자, 2위는 핵발전소 건설을 강행하는 한국전력공사, 3위는 환경예산을 대폭 삭감한 민자당, 4위는 무사안일한 환경처, 5위는 폐수와 산업폐기물을 가장 많이 배출시킨 삼성그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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