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 이시대 이지러진 농민의 초상
  • 우정제 기자 ()
  • 승인 1990.10.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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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인 충남 오지리마을에서 작품전 연 李鍾九씨

서울에서 아산만 국도를 따라 3시간반, 서산에서 대산을 지나 비포장도로로 다시 30분을 들어간 곳에 오지마을이 숨어 있었다. 토끼 모양 한반도의 앞발톱쯤 되는 해안가 벽지마을이다. 야트막한 야산들 사이로 궁색하게 들어앉은 천수답과 염전, 물빠진 갯벌 뒤로 호수처럼 둥글게 해안을 그리고 있는 작은 ?. 그리고 그 만 건너 산등성이 위로 우뚝 솟은 공장굴뚝들이 어딘가 불길한 그림자를 던진다.

 오지리를 그리는 작자 李鍾九(37ㆍ인천 동산고 교사)씨가 모교인 오지국민학교에 도착했을 때 전시장을 제공하기로 했던 학교측은 잠시 난색을 표했다. 전교조 가입교사인 이씨의 작품전을 축하하기 위해 전교조 인천지부에서 보낸 축전이 날아들자 이 행사가 혹 문제성 집회가 되지나 않을까 하여 긴장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학교측은 그림을 살려본뒤 “농민들의 옷이 하나같이 너무 지저분하지 않느냐”며 우려했다. 그러나 수년 동안 고향을 그려온 작가가 그림의 모델이 되어준 고향의 이웃들에게 모교의 운동회날을 별러 그림을 보여주러 왔다는 ‘순수한’ 동기에는 새삼 구구한 변명이 필요치 않았다. 학교측은 이내 교실 하나를 내주었고 ‘오지리 사람들’전은 무사히 오지리에서 열릴 수 있었다.

 이씨가 19일의 운동회에서 선보인 작품은 신작 5점을 포함, 모두 26점이다. 그는 지난 84년부터 ‘속 농자천하지대본’이나 ‘국토’ 연작 등 ‘땅의 사람들’을 주제로 작업을 계속하며 약 50명의 고향 이웃을 그려왔다. 그 가운데 전교조 등의 후원금 모금전에서 팔린 작품을 제외한 나머지 작품을 모은 것이 이번 전시이다. 이 전시에는 또 작품 구상을 위해 그간 틈틈이 촬영해 두었던 주민의 사진 1백20점도 곁들였다.

 

양곡부대를 화폭으로 사용

 작품들은 모두 그의 ‘등록상표’처럼 되어버린 양곡부대를 화폭 대신 사용하고 있는데 종이 또는 합성수지로 된 거친 화면은 기존의 고급한 재료에서는 느낄 수 없는, 우리 농촌 사회의 실재감을 풍부하게 드러낸다. 양곡부대 위에 찍힌 글씨며 문구들은 조형적인 효과를 얻으며 인물의 배경으로 배합되고 선거벽보나 영자신문을 콜라주한 기법도 미술에 대한 예비지식 없이도 쉽고 편안하게 그림을 이해할 수 있게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의 그림에서 감동을 주는 부분은 뛰어난 사실감을 주는 현존 인물들의 모습이다. 인물들의 표정은 침울하고 어둡다. 풍상의 세월을 간직한 듯 깊이 패인 주름살에 검게 그을은 얼굴들은 정당한 노동의 댓가를 받지 못하는 이 시대의 피폐한 농민상을 제시한다. 자신의 초상을 보는 오지리 사람의 눈에도 그 그늘은 초라할 수밖에 없다. 작품의 진열을 돕기 위해 맨처음 전시장을 찾은 이씨의 동문들은 ‘李화백’이 농투성이 고향 이웃을 작품의 소재로 삼고 있다는데 자부심을 보이면서도 자신들의 비참한 본 모습을 다시 한번 확인해야 하는 씁쓸함을 감추지 않았다.

 “한마디로 착잡하다. 그림 속의 우울한 얼굴들을 보니 생산비도 못건지는 농촌의 현실이 더욱 초라하게 느껴진다.”

 도시 사람들에게 이 그림들이 어떻게 보이겠느냐는 오지국교 동문회장 金知勳(40)씨의 자조섞인 한탄에 주민 안봉순(39)씨는 벌컥 화를 냈다.

 

농민의 희망 주워담는 안타까운 작업

 “어떻게 보이긴, 도시놈들 눈구녁이 잘못 된 것이지. 만약 자기 아버지가 이런 데 등장했다면 아버지라 하겠소? 이 그림들은 우리의 아버지요 우리 고향의 아버지.”

 주민들은 오순도순 살아온 내 고향 내 마을에 이런 그림이 출현해야만 하는 현실을 안타까워 했다. 수해로 쓰러진 벼포기를 보고도 일으켜 세울 맘이 들지 않는다며 농사는 젖혀두고 일당 3만원에 팔려 인근 공단의 공사판으로 달려가는 자신들의 ‘노가다’ 신세를 자책했다. 오지리 주민들은 거의가 가구당 5~6마지기 이내의 염세농으로 대대로 염전 노동과 김ㆍ굴 양식, 갯지렁이 캐기 등을 부업으로 삼아왔다. 풍요롭지는 못하나마 주어진 물과 뭍을 소중한 생산의 터전으로 일구며 살아온 것이다. 그러나 80년대 중반 인근에 대산석유화학공단이 들어서며 불어닥친 투기바람은 마을 사람에게서 농사일에 대한 소박한 애정을 앗아갔다. 대부분의 땅이 일찌감치 오지리 사람의 손을 떠났고 그나마 부족했던 노동력은 공단 건설에 흡수되어 묵히는 염전들이 하나둘씩 늘고 있다. 젊은이들이 타지로 떠나 전체 2백20가구 중 노부부만의 세대가 3분의 1인 이 마을은 이제 더 이상 농촌이라고 부를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있다.

 작가 이종구는 이같은 위기를 맞고 있는 그의 고향 오지리를 통하여 산업화 과정에서 대자본의 침식으로 와해되어 가는 이 시대 한국 농촌의 한 전형을 보여준다. 그의 작업은 어쩌면 농민들의 버려진 희망을 주워담는, 안타까운 그릇 찾기에 다름아닌지도 모른다. 그는 자신의 작업에 대해 “정직한 노동이 있을 때 정직한 생산이 가능한 땅의 진실을 오늘의 사회구조를 통해 그려내고 싶다”고 얘기해왔다.

 그의 진지한 노력은 생생한 리얼리티를 획득하며 이 시대 농민들의 고난을 증언하고 있다는 점에서 80년대 민중미술의 일정한 성과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수년째 계속돼온 가족과 오지리 주민 중심의 사진적이고 정적인 이미지 반복은 자칫 “현실에 부딪치지 않고 역사 속에 멈춰 선 고정된 농민상의 제시가 아니냐”는 의구심을 갖게 한다. 이 같은 지적에 대해 작가는 “이웃의 개인적인 삶에 초점을 둘 때 정적이고 무력한 소시민성이 극복되지 못하고 농민해방이나 변혁의 문제에 이르지 못한다는 질책은 매우 온당한 것 같다”고 시인한다. 그렇지만 ‘농민의 승리’를 내세우는 그림들이 실제로 농민에게 변혁의지를 심어준다거나 삶의 희망적 대안을 제시할 수 있다는 생각은 편향된 지식인적 시각이 아닌가 되물으면서 사회과학적 인식이란 토대도 중요하지만 보는 이에게 공감을 주기 위해서는 ‘미술’이라는 정서에서 출발해 ‘농민의 승리’를 구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간 지적돼온 한계를 벗어나기 위해 그는 얼마 전부터 서사적 이미지의 농민상이 담긴 작품들을 시도하고 있다. 근작 ‘가래질’(1990)이나 ‘오지리 김씨부부’(1990) 같은 ‘국토’ 연작에서 그의 이같은 의지를 읽을 수 있다. 그의 고향집 앞 만 건너 산등성이 위로 솟아오른 위압적이 공장 굴뚝들은 농촌을 황폐화시키는 산업화의 한 상징으로 작품 속에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고개를 떨구고 힘겹게 노동하는 ‘오지리 김씨 부부’의 농토 위에 거꾸로 박힌 그 굴뚝들은 불길한 조화를 암시한다.

 이종구의 ‘오지리 사람들’전은 이제껏 미술과는 전혀 무관하게 유리돼온 농촌 현지에서 모델인 농민을 관객으로 한 전시였다는 데 큰 의미가 있었다. 또한 김정헌 신학철 사상옥 이명복 등 뜻을 같이하는 작가들의 조촐한 축제이기도 했고 광주미술인공동체 회원이 단체관람하는 등 농촌 현장에 대한 젊은 미술인들의 뜨거운 관심을 확인하는 계기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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