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단체의 ‘아리송한’ 환영광고
  • 장영희 기자 ()
  • 승인 1992.02.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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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자제 선거연기 방침에 증권 · 보험 등 맞장구…노조 “권력치마폭에 싸인 꼴”

 “세월이 거꾸로 가고 있는 것 아니냐. 87년의 ‘4 · 13 호헌조처’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아직도 지지 환영광고라니….” 1월14일자 아침신문을 받아 본 ㄱ사 ㅇ사장은 이렇게 말하면서 그 불길이 어떻게 번질지 걱정했다. 이날과 다음날 일간신문 1면에 5단 크기로 실린 한국증권업협회 회장과 31개 증권사 사장단의 “지방자치단체장 선거의 연기를 환영한다”는 내용의 연명 성명 광고 때문이었다.

 ㅇ사장의 우려는 일부 현실화됐다. 16일자 신문에는 보험업계가 뒤를 이었다. 광고형식은 똑같았다. 생명보험협회와 손해보험협회가 앞에 나오고 40개 생명 · 손해보험사 대표자 연명이 뒤따라 나왔다. 증권인, 보험인만을 바꿔넣었을 뿐 문구도 거의 비슷하다. “대통령 각하의 경제회복과 지방자치단체장 선거연기방침을 지지 내지 환영한다”면서 우리의 입장을 밝히는 것으로 돼 있다.

경제단체 “외부압력 없었다” 발뺌
 환영광고의 불길은 금융권을 떠나 건설부문으로도 옮겨붙었다. 대한건설협회 대한전문건설협회 등 6개 건설관련협회 전국회원 일동도 환영광고를 신문에 냈다. 광고형태는 아니지만 은행권도 ‘금융권의 핵’답게 가장 먼저 찬성의사를 표명했다. 지난 13일 조흥 상업 제일 한일 서울신탁 외환 등 11개 시중은행장들은 제일은행에 모여 “우리 경제의 선도적 역할을 수행해야 할 우리 금융인은 대통령 각하의 물가안정 및 경제성장을 위한 지자제 단체장 선거 연기 제의를 전폭적으로 지지한다”고 결의했다. 은행장들은 임원 및 부서장의 올해 임금 동결도 함께 결의해 정부 정책에 적극 호응했다.

 지난 87년 ‘4 · 13 호헌조처’때의 일이다. 당시 내무부 장관은 “전 내무부 공무원과 산하기관단체 임직원은 13일의 대통령 특별담화 내용을 녹음 또는 녹화, 경청하여 담화내용을 충분히 이해하고 체질화 신념화해서 대국민 홍보에 적극 나서라”고 지시했다. 이때 신문에는 종교계와 학계, 재야 및 야당, 사회단체들의 거센 반발이 연일 보도되고 있었지만 다른 한 켠에서는 경제단체들의 지지성명 광고가 요란하게 실리기 시작했다. 전국경제인연합회 대한상공회의소 한국무역협회 한국경영자총협회 중소기업협동조합중앙회 등 경제 5단체는 다투어 지지의사를 밝혔다. 한국무역대리점협회 한국증권업협회 농협중앙회 등 다른 경제단체들도 가세했다.

 5년 전의 일이 최근 재연된 것이다. 전국적으로 지방 일간지와 지역 주간신문에도 ○○지역 상공인 일동 등으로 광고주의 실체가 애매모호한 지지성명 광고가 홍수사태를 이루고 있다. 87년의 상황과 다른 점이 있다면 증권 보험 건설단체들 외에 전경련 등 덩치가 큰 경제단체들이 침묵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연두기자회견 직후 전경련 등 경제단체는 “두 차례의 지방자치단체장 선거의 연기와 관련한 언급은 우리경제의 현재 여건과 경제활력 회복을 위한 국민적 노력을 응집해 나가고 있는 과정에서 적절한 것으로 여겨진다”는 등의 짤막한 지지 의사를 표명했을 뿐이다. 전례를 들춰볼 때 강도면에서 태도가 사뭇 달라진 것이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네차례의 선거가 올해 경제에 미치는 악영향을 강조해온 이들로서는 단체장 선거 자체를 안하겠다는 통치권자의 제의가 매력적일텐데 더이상의 행동을 취하지 않겠다는 대답이다. 이같은 침묵에 대해 전경련의 한 관계자는 이렇게 설명한다.

 우선 ‘4 · 13조처’때와 같은 외부적 압력이 없었다는 사실을 든다. 과거에는 국가안전기획부 등이 나서서 조직력으로 지지물결을 유도해냈는데 이번에는 그렇지 않았다는 설명이다. 이 관계자는 “만약 지시가 내려왔다면 거절하기 힘들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또 경제난을 명분으로 했기 때문에 여론 형성을 유도할 이유가 없어졌기 때문이 아니냐고 해석한다.

 재벌과 정부와의 역학관계 변화에서 이유를 찾는 분석도 없지 않다. 鄭周永 전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정계진출을 주목하는 이들은 재벌과 정부와의 관계가 변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재벌들은 정치자금 제공 등으로 정치권력을 후원, 그 반대급부로 특혜를 얻어온 구도에 대해 점점 매력을 잃고 있다는 것이다. 체질적으로 권력에 순응할 수밖에 없다는 한계를 넘어 새로운 관계로 조율을 꾀하고 있는 재벌들은 이번 일에 목소리를 낼 필요성을 덜 느꼈으리라는 분석이다.

정치 격변기에서 반사적 이익 노렸다
 환영 의사를 밝힌 경제단체들은 왜 목소리를 크게 냈을까. 우선 궁금한 점은 ‘위로부터의 압력’이 없었는지의 여부이다. 증권업협회 丁康鉉 상무는 외압의 가능성에 대해 한마디로 “사실무근”이라고 일축했다. 金復東씨와의 사돈관계로 권력핵심부와의 유착설이 따라붙고 있는 姜聲振 협회장이 주도한 것도 아니라고 해명했다.

 정상무는 10일 저녁 몇몇 증권사 사장들이 모여 “우리경제의 앞날과 증권시장의 빠른 회복을 위해 잘된 일이므로 지지성명을 내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의견을 냈고, 이 발의가 강회장에게 전해졌다는 것이다. 이후 협회는 다른 회원사의 의사를 타진한 뒤 결정하게 됐다고 광고를 내게 된 배경을 설명했다.

 보험업계의 경우도 위로부터의 지시는 없었다고 부인한다. 다만 증권업계와는 달리 맨처음의 발의는 생명보험협회장인 鄭韶永씨가 했다고 한다. 정씨가 환영성명을 내자는 제의를 손해보험협회장인 朴鳳煥씨에게 했고 두 협회가 합의를 본 후 회원사의 의사를 물어 광고를 내게 됐다는 설명이다. 합의과정에서 영풍매뉴얼라이프생보사 등 합작사의 경우 대표자가 외국인인 경우도 있어 관련 기업쪽의 한국인 명의를 빌리는 촌극이 벌어지기도 했다는 후문이다.

 협회가 주관이 된 증권 · 보험사 대표자들의 환영성명은 노조의 거센 반발을 불러왔다. 26개 증권사 노조로 구성된 증권사 노조협의회(증노협)와 한국증권업협회 노조는 지난 15일 “연기 지지는 명백히 증권노동자의 의지에 반하는 것”이라며 “경악과 분노를 금할 수 없다”는 내용의 성명서를 냈다. 증노협의 한 관계자는 “대통령의 선거연기 선언은 경제적인 어려움을 빙자하여 국민의 기본 권리를 침해하는 반민주적인 처사이며 권력의 꼭두각시 노릇을 자처한 협회장과 사장들은 증권노동자의 명의와 의지를 사칭한 선언문을 조속히 철회하고 공개사과하라”고 촉구하면서 농성에 들어갔다.

 26개 보험사 노조도 같은 반응을 보였다. 이들은 지난 18일 한 일간신문에 반대 성명서를 게재해 “우리는 권력의 치마폭에 싸이기를 자처한 이번 성명서가 정부의 직 · 간접적인 압력의 소산임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며 성명서 철회를 요구했다. 증권 · 보험사 노조의 상위 조직인 사무금융노동조합연맹의 한 관계자도 “선거 연기 지지가 전체의 의사인 양 호도하고 스스로 권력에 아부하는 사용자의 행위는 철회돼야 마땅하다”고 주장하면서도 외압이 있었을 가능성을 크게 보지 않았다. 협회나 대표자 측근의 압력 부인을 노조도 인정하는 셈이다.

 위로부터의 압력이 없었다면 지지성명을 낸 이들의 의도가 더욱 궁금해진다. 이들은 일간신문에 지지성명을 게재하면서 광고비로 2억3천만원에서 2억4천만원 정도를 쓴 것으로 알려진다. 거액의 비용을 들이고 노조의 반발 등 부정적 반향을 예상하면서까지 목소리를 크게 낼 필요가 있었는가 하는 의문이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압력에 의해 한 것이 아니라면 속된 말로 알아서 윗분의 뜻을 알아 모셨다는 얘기가 된다”고 나름대로 해석했다.

 또 금융권이나 건설업계는 이른바 ‘설치는 장관’이 있어 간접적인 영향을 받지 않았겠느냐고도 풀이했다. 생보협회의 한 관계자는 “지지성명을 내봐야 보험업계는 당장 실익을 얻기 힘들지만 증권은 증시부양책 등 기대할 것이 있지 않느냐”고 말해 계산된 의도가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드러냈다. 결국 성명을 낸 주체들은 정치적 격변기를 넘기면서 적어도 반사적 이익을 노렸다는 의심을 받을 수 있다.

 지지성명을 낸 경제단체들을 보는 일반의 눈은 곱지 않다. 학계의 한 관계자는 “경제단체들이 본연의 일에 충실하지 않으면서 정치 문제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 내는 것은 좋게 보일 수 없다”고 꼬집었다. 지지광고를 낸 경제단체들은 “경제를 걱정하는 순수한 열정에서 했다. 또 어떤 식으로든 자유로운 의사표명이 가능한 것이 민주 사회 아닌가”하고 항변한다. 그들의 주장이 공허한 외침으로 설득력을 잃는 것은 ‘계산된 의도’가 느껴지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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