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서한
  • 김승웅 편집국장 대리 ()
  • 승인 1990.11.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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盧泰愚  대통령!

지난번 선포하신 ‘범죄와의 전쟁’을 환영합니다. 이왕 선포하신 전쟁이라면 기필코 이기셔야 합니다. 이번 일전을 제가 특별히 환영하는 데는 도 하나의 이유가 있습니다.

 대통령의 전쟁선포를 접하기 얼마 전, 저는 똑같은 내용의 ‘對범죄전쟁 불가피론’을 국내 어느 유력한 조간신문 1면에서 읽은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지금 청와대에서 대통령을 모시고 일하는 몇몇 제 친구들에게 조회한 즉, 이번 범죄와의 전쟁 선포가 측근 보좌관이나 비서관들의 아이디어가 아니라 대통령께서 직접 그 신문을 읽고 스스로 선택하신 단안임을 알았습니다.

 바로 그점입니다. 제가 이번 조처를 환영하는 진짜 이유는 전쟁에서 승리하느냐 지느냐와는 별도로, 여론이나 언론의 판단에 따를 줄 알고 일단 옳다고 여길 땐 좌고우면하지 않는 대통령의 정직과 용기 비슷한 무엇을 제 나름대로 읽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노대통령!

 이왕 통치차의 정직과 용기 얘기가 나온김에 한말씀 더 드리죠. 대통령께 드리는 공개서한이랍시고 거창한 제목을 단 이유도 따지고 보면 이제부터 드릴 말씀에 초점에 맞춘 것입니다.

 지난 주말 청와대 대변인의 발표로 알았습니다만, 연말에 모스크바를 방문하신다고요. 결론부터 말씀드려 잘하신 일입니다. 일부에서 비판이 없지 않다는 것도 잘 압니다.

 발표 다음날이던가요. 모 일간지 연재만화에 ‘고心盧心’이란 회화적인 말이 나오더군요. ‘以心傳心’이란 4字成句에 고르바초프의 고字와 노대통령의 盧字를 대입시켜 만들어낸 풍자적 표현 말입니다. 두분이 어찌나 그리 의기가 잘 투합하는지, 지난번 민자당 내분으로 노대통령의 ‘내치’가 엉망이 되니까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이를 ‘외교’로 구해주기 위해 訪蘇초청장을 보내줬다는 내용의 만화입니다.

 

시대상황 꿰뚫는 지도자의 炯眼이 필요한 때

 틀린 만화가 아닙니다. ‘고心盧心’이 어디 이번뿐이었습니까. 지난 6월4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1차 한소정상회담 때도 고르비의 도움을 톡톡히 보신 셈이지요. 그때 국내 정국은 ‘총체적 난국’이다 뭐다 해서 노대통령의 인기가 최하위로 떨어졌던 무렵이 아니었습니까. 보십시오. 샌프란시스코에서 귀국하고 나서 총체적난국이란 말이 바람과 함께 사라져버리지 않았습니까.

 지금 제가 드리려는 말씀은 ‘고心盧心’이 옳다거나, 내치와 외교의 상관관계가 아닙니다. 대통령 입장에서 이런 회화풍의 만화나 일부 비판의 도마 위에 오르면 심기가 뒤틀리시리라 믿습니다만, 이 시국 이 시점에서 절박한 것은 사안을 꿰뚫어볼 줄 아는 본질적인 시각입니다. 바로 남북한 문제입니다. 통일 문제입니다.

 노대통령께서는 한겨울의 낭만적인 크렘린 冬宮에서 세계 최강대국의 원수를, 그것도 샌프란시스코 첫 회동에 이어 세계 정상외교사상 ‘6개월내 재회’라는 유례없는 기록을 세우시고 만나게 됩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고르비가 친서내용대로 내년 4월 訪韓하게 되면, 두분은 10개월 안에 3차례의 회동을 가지게 됩니다. 일정 기간내의 정상회동 건수로는 가히 기네스북에 오를 횟수입니다.

 노대통령!

 이 얼마나 天惠의 호기입니까. 만약 제 말씀이 실감나지 않으신다면 북한의 金日成 주석이 부시미 대통령을 10개월내에 3차례나 만난다고 가상해 보십시오. 한소정상간의 잦은 회동이야말로 ‘하느님이 보우하사’이뤄진 섭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제가 이토록 흥분하는 정확한 이유도 아셔야 합니다. 고르바초프라는사람, 앞으로 2,3백년안에 또 다시 등장할 것 같지 않은 인물입니다. 炯炯한 눈매, 과감한 개혁의지, 그리고《타임》과 《뉴스위크》가 인정했듯 ‘신앙을 가진’ 정치지도자입니다. 국내 정국이든 국제정치든 지금은 진리와 소신을 가진 정치지도자를 필요로 하는 시대입니다. 진리와 소신은 종교적 바탕이 없는 한 불가능합니다.

 

통일 위해 ‘한·소부가침조약’ 체결해야

 베를린장벽의 철거다. 사회주의의 와해다. 또는 동서독 통일이다‥·이 모든 것을 시대사적 흐름 또는 사회주의 자체의 모순으로 파악하려는 것이 학자들의 버릇입니다만, 천만의 말씀입니다. 고르비의 등장이 없었다면 절대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미국의《타임》이 그를 ‘올해의 인물’뿐만이 아니라 내리 10년을 한데 묶어 ‘90년대의 인물’로, 또 노벨재단이 그를 올해 평화상 수상자로 선정한 이유를 거듭 되새겨볼 때입니다.

 노대통령!

 고르비를 만나시거든, ‘한·소불가침조약’을 체결하십시오. 다른 것 다 제쳐둬도 무방합니다. 그쪾에서 차관을 더 요구하거든, 지금보다 두배로 줘도 괜찮습니다.KAL기 격추사건 사과, 사할린 교포 귀한‥·다 중요합니다. 언젠가는 기필코 따내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이 불가침조약만큼 중요하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지금 소련과 국경을 마주하지도 않았는데 무슨 잠꼬대냐고 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북한이 미국과 불가침조약(정확히는 평화조약)을 맺자는 것, 그 둘이 어디 국경을 마주했기 때문입니까.

 남북한이 통일하는 데 필요한 것이 한·소불가침조약입니다. 또 통일 이후(그때는 국경을 맞댑니다)를 위해서도 필요합니다.

 또 한가지, 담대하셔야 합니다. 큰 나라라고 주눅들지 마시고, 또 ‘내치 희석용’ 나들이라는 일부 비판에 구애받지 마십시오. 유럽의 황제 나폴레옹을 담판으로 눕힌 오스트리아 외상 메테르니히를 상기하시기 바랍니다. 건승을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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