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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집’인가 수용소인가

한국 아파트, 문화공간과는 먼 거리 … ‘건미준’ 백서 “양에서 질로” 대안 제시

이문재 기자 ㅣ 승인 1994.12.15(Thu)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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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20년 뒤에는 아파트 폭파 산업만 번창할 것이다.” 지난 12월2일 ‘건축의 미래를 준비하는 모임’(건미준·의장 김석철)이 <공동주택 백서>를 발표하는 자리에서 나온 말이다. 성수대교 붕괴에 뒤이은 아파트 부실 시공 논쟁의 여진이 신도시를 뒤흔들고 있는 와중에 나온 건미준의 공동주택(이하 아파트) 백서는, 부실 공사가 완전하게 추방된다 하더라도 본질적인 문제는 개선되지 않는다는 주장이어서 크게 주목된다.

아파트 공급 정책, 관련 법규 및 제도, 경관 보전과 환경권 문제 등 아파트와 관련된 모든 문제를 전방위에서 진단한 건미준 백서가 제시한 대책은 양에서 질로, 경제 논리에서 문화 논리로 가야한다는 것으로 압축된다.

‘고지가 바로 저기다!’라고 외쳐온 근대화 정책은 천민 자본주의와 손잡으면서 상승작용을 일으켜왔다. 스포츠에만 적용되어야 할 ‘더 많이, 더 높이, 더 빨리’가 주택 정책에도 그대로 적용되어 왔다.

신도시 지은 사람은 신도시에 입주 안 한다
인간과 공동체의 미덕을 배제한 정책에 의해 하늘 높이 치솟은 아파트들은, 앞으로 이 땅과 건축물을 그대로 물려받을 후손들에게, 얼마 전 바로 우리들이 환호하며 무너뜨린 남산 외인아파트로 규정될 것이다. 건물 해체 산업이 유망사업이 될 것이라는 전망은 그래서 비극적이다.

첫 단추가 잘못 끼워졌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서울을 둘러싼 다섯 신도시는 벌써부터 졸속 정책의 후유증을 앓고 있다.

분당·일산·평촌·산본·중동의 아파트 하자 발생 민원 접수 현황을 보면, 2백만호 건설 정책의 그늘이 얼마나 커다란지 역력하게 드러난다. 다섯 신도시에서 접수된 하자 발생 민원 건수는 94년 11월 현재 모두 1천 7백건에 달한다.

경기도의회 정형만 의원(민주·성남)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설비 불량 5백69건, 문짝 및 도배 불량 3백43건, 지하 주차장 하자 및 도장 불량이 각각 43건, 터진 금 발생 29건, 조경 삭제 불량 27건, 기타 6백46건으로 나타났다.

아파트만이 아니다. 이 조사에 따르면, 전체 공정의 80%가 완성돼 있는 다섯 신도시의 도로 등 17개 공공시설물에 대한 인수 실적이 94년 11월 현재 31%에 머무르고 있다. 이 중에서 특히 상수도 시설은 7%밖에 인수하지 못했고, 공동구와 도로 인수율은 각각 11%, 22%에 불과했다. 부실 시공으로 인한 하자가 속출해 성남시 등 해당 시가 토지개발공사와 주택공사 등 시공업체가 하자 보수를 끝낼 때까지 시설물 인수를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신도시의 어떤 아파트는 무너지지 않을 수가 없다는 시공업체 관계자의 ‘증언’이 발표되고, 한 아파트의 지하 주차장 때문에 대피 소동이 벌어지면서 아파트 붕괴에 대한 불안은 최고조에 다다랐다. “누가 신도시 아파트를 거저 준다고 해도 나는 들어가지 않겠다.” 신도시 아파트를 건설한 한 시공업체 관계자가 <시사저널>에 털어놓은 충격적인 고백이다(아래 기사 참조).

여론이 식기는커녕 자꾸 가열되자 당국은 뒤늦게 대책을 내놓았다. 지난 12월 초 건설부는 내년 5월 말까지 다섯 신도시에 건설된 아파트 4천29개 동 전체에 대한 안전 점검에 들어간다고 발표했다. 지난 91년 자재 파동을 전후해 건설된 1천1백79동은 물론이고 나머지 2천8백50동까지 모두 안전점검을 실시해, 문제가 있다고 드러난 아파트에 대해서는 시공 회사로 하여금 보강하게 한다는 것이다.

지나치게 짧은 공기(일본 신도시 개발에 견주면 공기가 얼마나 짧은지 그대로 드러난다. 오른쪽 표 참조), 그에 따른 자재 파동, 기능 인력 부족, 몇 단계에 걸친 하도급 관행 같은 구조적 문제에다, 정책·법규·설계 개념 부재 등 근본적인 문제에 이르기까지 부실 시공의 ‘지뢰밭’은 곳곳에 있다.

건미준 백서에 따르면, 당국이 모든 건설 현장에 큼지막하게 써붙인 대로 부실시공이 말끔하게 사라진다 해도 문제는 남는다.

부실 시공 추방 원년 이후 아파트가 아무리 튼튼하게 지어진다 해도 입주자들은 반인간적이고 반문화적인 아파트 공간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법규·정책·설계 단계에서 인간과 문화와 환경이 배제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건미준 측이 내놓은 대안은 이렇다.

먼저 질보다 양을 우선하는 주택 정책 기조를 바꾸어야 한다. 기성 시가지나 신도시, 경사지나 강변 지역, 대도시나 지방 소도시를 구분하지 않고 고밀 개발 일변도로 가고 있는 정책부터 바꾸어야 한다는 주문이다. 즉, 초고층 고밀 개발이 필요한 지역과 도시 경관 보존이 우선하는 지역, 그리고 적정 밀도 유지가 필요한 지역을 구분해 차별 정책을 수립해 운용해야 한다고 건미준 아파트 백서는 강조하고 있다.

서울을 방문하는 외국 건축가들은 한강변의 고층 아파트 단지를 보고 입을 벌린다고 한다. 도시 경관의 핵심적 요소이며 모든 시민이 함께 향유해야 할 강변 경관을 고층 아파트들이 사유·독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만큼 도시 전체의 활력은 떨어지고 만다. 남산 외인아파트는 철거되었지만 옥수동·서부이촌동 등지에 들어선 고층 아파트들은 새로운 차단막으로 서 있다. 특히 작년에 서부이촌동 강변에 솟은 ㄷ 재건축 아파트는 영등포 일대에서 서울 도심을 볼 때 완벽하게 남산을 가리는 거대한 벽면이다. 돈암동 일대나, 서대문구 현저동 일대 비탈의 고층아파트들도 마찬가지다.

두 번째 문제는 주택금융정책이다. 현재의 주택 정책은 공급자에 대한 금융 지원과, 분양을 받은 소비자에 대한 프리미엄을 보장해 일정 수준의 신규 주택 수요를 유지해 나가는 정책이라고 백서는 비판한다. 그 결과 아파트는 삶의 터전이 아니라 부동산 투기 대상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한 건축가는 이렇게 말했다. “제품(아파트)이 완성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다 판매되는데 어느 누가 시공에 정성을 다하겠는가.” 돈 한 푼 안들이고도 아파트를 짓고, 완공되기도 전에 분양가를 받는 업체와, 아파트를 분양 받기만 하면 돈이 남는다며 몰려드는 소비자가 있는 한, 아파트의 부실공사 문제나 반문화적인 아파트 공간을 개선해야 한다는 주장은 아직 먼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정부 · 업체 · 입주자 ‘이익 나눠먹기’ 삼중주
지난 11월 하순, 한국토지공법학회 학술세미나에서 아파트 선분양제도가 위헌이라고 주장한 석종현 교수(단국대·법학)는, 현행 아파트 정책은 서민에게는 아무런 혜택이 주어지지 않는 반복지 정책이라고 비판했다(43쪽 딸린 기사 참조). 석교수에 따르면 아파트에서 3자가 이익을 나누어 갖는다. 건설업자는 건설비를, 입주자는 프리미엄을, 정부는 채권을 가져간다는 것이다.

인간과 문화를 도외시한 정책은 주택 건설 기준 및 관련 제도로써 드러난다. 경직된 형태 및 설계 기준은 창의적인 설계 노력을 제한해 건축가들의 참여를 원천봉쇄했다(아래 기사 참조). 그동안 지어진 대규모 아파트 단지 가운데 건축가가 자신의 이름을 걸고 설계한 아파트 단지는 아시안게임 선수촌 아파트와 88올림픽 선수촌 아파트 단 두 군데뿐이다.

예컨대 천평 대지에 아파트를 짓는다고 할 때 설계자는 건폐율과 용적률을 따져 몇 세대를 지을 수 있는가부터 따진다. 이 조건 아래서 가장 많은 세대수가 나오는 방법을 모색한다. 건물과 건물 사이의 간격을 규제하는 인동거리 규제를 가장 효율적으로 이용한 것이 군대 막사식, 즉 일렬로 건물을 배치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가 선택되면 건물과 건물 사이는 도로와 주차장으로 채워지고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단지 외곽의 자투리 땅에 녹지가 조성된다. 인간을 위한, 건축적인 설계 개념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획일 조장하는 법규 … 경관에 대한 인식도 희박
위와 같은 정책과 건설 기준 및 관련 제도에 따라 지어진 대형 아파트 단지는 폐쇄적이고 배타적일 수밖에 없다. 모든 아파트 단지들은 주거 지역을 담장으로 둘러쌓고 있다. 아파트 단지 입구마다 나와 있는 ‘외부차량 출입금지’라는 입간판은, 아파트 단지의 배타성을 상징한다. 이웃 동네나, 단지와의 교류가 필요 없는 자폐적인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상가·유치원·노인정·놀이터 등은 단지 내부 주민만의 사용을 전제로 한 것이다.

이같은 공간에는 공동체 의식이 끼여들 틈이 없다. 백서는, 아파트값 하락을 염려해 단지 주변에 생기는 노점상을 철거토록 종용하거나, 단지내 도로가 통과 도로가 되는 경우 이를 폐쇄해 버리는 사례 등에서 ‘주변으로부터 받기만 하고 줄 줄 모르는 이기적 집단화’를 읽어낸다.

군부대와 아파트 단지의 공간 구조가 동일하다는 관찰(41쪽 아래 도표 참조)은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아파트 주민들은 스스로 생활의 주체라기보다는 관리되는 삶에 가깝다는 해석이다. 동네·집이라는 개념은 사라지고, 주거가 00동 00호라는 숫자로 기호화한다. 자기 집을 공간적으로 기억할 수가 없다. 그리하여 귀속 본능을 만족시켜 주지 못한다. 모든 집들이 획일화한 사회에서는 창조적 진화가 어렵다고 건미준은 지적한다.

지역·단지·평수에 따라 아파트는 어느새 거주자의 ‘신분증’으로 통용되고 있다. 인간을 위한 아파트가 아니라, 아파트를 위한 인간이 되어 버린 것이다.

삶을 획일화시키는 아파트 단지 획일화의 주범은 인동거리 규제이다. 백서는 그 원인을 ‘인동거리 규제의 비합리성’에서 찾는다. 건물끼리 겹치는 길이에 관계없이 일률적으로 건물 높이의 한 배(1대 1 인동거리 규제)를 떨어뜨려야 한다는 규정인데, 앞 건물과 뒷 건물이 조금 겹치건, 전체 다 겹치건 관계 없이 획일적으로 적용되고 있어서 건물 배치에 유연성이 없어진다.

인동거리 규제 이외에도, 건미준 백서가 아파트 안팎의 공간을 개선하기 위해 우선적으로 개폐해야 할 독소 조항으로 규정한 것은 단지내 도로 너비, 휴게소 형태, 놀이터 이격 거리, 계단 규격, 주택 내부 마감재, 거실, 침실의 최소 길이 등에 대한 규제이다.

아파트의 획일성은 위와 같은 정책과 건설 기준에서만 비롯한 것이 아니다. 획일적 설계를 조장하는 원인 가운데 하나는 전용면적 기준이다. 60, 85, 102, 135㎡ 등으로 등급화해 있는 주택 청약 저축 및 예금의 청약 방식을 전용 면적당 일정 금액제(에컨대 ㎡당 7만원 식)로 변경하고, 청약 예금액 해당 규모의 전후 15㎡와 같이 청약 규모에 탄력성을 주자고 건미준은 제안했다.

현재 짓고 있는 주택의 82%가 아파트이며, 앞으로 6년 뒤 21세기에는 2가구당 1가구가 아파트에 살게 된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아파트 정책은 하루빨리 재고되어야 한다. 신도시만이 문제가 아니다. 최근 아파트 건설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기성 시가지 안의 재개발·재건축 아파트에도 문제는 많다.

건미준 백서는 재개발·재건축 아파트를 시공할 때 주변 환경 영향 평가와 보상제도를 도입해야 한다고 주문한다. 물론 재개발·재건축 사업이 주택 보급률 신장에 도움을 주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재개발 사업이 이루어진 지역은 주택 규모나 주택 수에서 증가 현상이 두드러진다. 서울 홍제 11구역의 경우 사업 전에는 가구당 평균 면적이 약 13평에서 사업 후에는 33평으로 커졌고, 주택 수는 2.1배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제는 ‘집다운 집에 못 사는 설움’과의 싸움
그러나 시민의 공유 자산이며 후손에게 물려주어야 할 유산인 자연 경관은 훼손되고 말았다. 자연 경관에 대한 인식은 아직 희박하기만 하다. 서울 시내 22개 자치구 가운데 도시 기본 계획에 따라 경관사업 계획을 수립한 구는 구로구와 동작구 뿐인데, 구로구와 동작구도 시가지 경관과 가로 경관에 대한 사업 계획을 수립했을 뿐 도시경관 계획이나 자연경관·역사경관에 대한 계획은 아직 없는 실정이다.

‘국가는 주택개발 정책 등을 통하여 모든 국민이 쾌적한 주거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헌법 제35조 제3항이다.

헌법이 규정한 국민의 주거 생활권은 환경권의 구체적인 내용의 하나이며, 주택의 건설과 공급은 사회적 환경권을 구체화하는 것이라고 석종현 교수는 지적했다.

도시의 스카이라인을 잘라내거나, 이웃 동네와의 연관성을 무시하고 올라서고 있는 재개발·재건축 아파트들, 논밭에 우뚝 솟은 시골의 고층 아파트, 부실 시공으로 들썩거리는 신도시 아파트들과 헌법이 보장하는 ‘쾌적한 주거 생활’과의 거리는 과연 얼마나 되는 것일까. 그 아득한 거리는 누가 만들어낸 것일까.

서민들은 그동안 ‘집 없는 설움’과 부대껴야 했다. 젊은 가장의 가장 큰 책무는 내집 마련이었다. 부실공사를 감수하면서까지 ‘질보다 양’을 앞세운 주택 공급 정책은 집 없는 설움을 줄이는 데는 어느 정도 이바지해 왔다. 시간이 흐를수록 지금과 같은 개념의 프리미엄도 줄어들고, 부실 시공도 없어질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헌법이 보장하고 있지만 실현되지 않고 있는 ‘집다운 집’에 살지 못하는 설움이다. 이 설움은 집 없는 설움보다 더 클지도 모른다. 양에서 질로, 경제 논리에서 문화 논리로 아파트 정책·법규·제도가 하루빨리 바뀌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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