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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음악 펼치는 세 얼굴의 사나이

김수철, 국악ㆍ록ㆍ부수 음악의 완전한 조화 창출…에 장년의 정서 담아

강헌 (음악 평론가) ㅣ 승인 1995.01.05(Thu)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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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우리에게는 가정과 직장의 스트레스로 점점 초라해져 가는 30~40대의 음악적 초상이 제공되지 않는가. 갖은 모임과 접대로 찌들대로 찌든 몸을 질척이며 집으로 돌아오는 겨울 밤거리의 처연한 서정은 음악이 되기에는 너무나 사소한 것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이들에게 자신들의 정서를 운반하는 음반 한 장을 살 만한 여유가 없기 때문일까.

 여기에 모노크롬 재킷 디자인이 인상적인 한사내의 노래집이 우리에게 배달된다. 그 발신자는 막 불혹의 고개에 다다른 김수철. 서신의 제목은 <우울한 남자들(Men In Blue)>. 비록 최초 발신일은 지난 여름이지만 두 계절을 떠나보내면서도 마치 가랑비가 옷섶에 스미듯 조금씩 사람들 사이를 파고들어, 한 달도 채 못 버티고 매장에서 사라지는 요즘 음반 시장의 추세를 거스르며 굳건히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다. 외로움과 절망과 피곤함으로 채색된 김수철의 스산한 목소리는 머리 곡 <지친 어깨>에서 이렇게 말문을 연다. ‘산처럼 엎드린 /너의 절망을 잠재우고 /창 너머로 조용히 동이 트는데…/아직 가시지 않은 통증'에 우리는…/슬픔 때문에 돌보지 않는 세월이 /너의 가여운 얼굴을 /스쳐가듯 바라본다…

몸부린치던 일렉트릭 기타
 김수철에게는 세 얼굴이 있다. 하나는 60년대의 지미 헨드릭스와 70년대의 엘비스 코스텔로를 비벼놓은 록 기타리스트의 얼굴이며, 두번째는 한국을 통털어도 몇 되지 않는 영화 음악가와, 드물기는 하지만 영화 배우로서의 얼굴, 그리고 마지막으로 기쁨과 슬픔이 교차하는 하회탈, 혹은 옹골지게 자기 자리를 지키고 선 돌하루방과 같은 국악의 얼굴이다. 이 세 얼굴을 가로지르며 <One Man Band>라는 89년의 앨범타이틀처럼 작사ㆍ작곡ㆍ편곡과 모든 악기의 연주와 노래를 혼자 해내는 프로듀서로서의 대중음악가가 바로 김수철인 것이다.

 78년 그가 수많은 컴퍼스 밴드 중의 하나인 ‘작은 거인’의 리더로서 <일곱 색깔 무지개>를 들고 나와 무대에서 깡총거리다가 기타를 입으로 물어뜯는 광기를 보일 때, 우리는 다만 긴급조치의 족쇄에 포박 당했던 70년대의 비틀어진 젊음이 서구의 문법을 빌려 몸부림치는 것쯤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꽤 많은 시간이 흐를 때까지 우리는 그가 우리 대중 음악의 명인으로 자리잡을 것이라고는 확신하지 않았으며(대학 출신이라는 라벨을 붙이고 얼마나 많은 젊은 음악가들이 얼굴을 내밀었다가 사라지곤 했던가), 바로 그 일렉트릭 기타가 이 혼란스런 대중 음악문화의 등성이를 굶주린 승냥이마냥 헤집고 다닐 영매가 될 것임을 알아보지 못했다.

 게다가 한술 더 떠 그가 배창호 감독의 84년 흥행작 <고래사냥>에 안성기ㆍ이미숙과 꼭지점을 이루는 조연 배우로서, 그리고 주제곡 <나도야 간다>를 신나게 불러제끼는 음악 감독으로 명함을 내밀었을 때 ‘역시 그런 수순이군’ 하고 고개를 주억거리며 알량한 이름값으로 스크린에 얼굴을 내밀었다가 그 이름값도 챙기지 못한 대중 음악가들의 리스트를 슬며시 짚어보지 않았던가. 하지만 김수철은 이 대목에서 많은 사람의 우려를 반전시키며 허약하기 이를데 없는 한국 영화음악, 나아가 무용음악과 축전 음악 같은 부수 음악의 영역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깃발을 꽂았다. 그 깃발에 아로새겨진 문양은 놀랍게도 우리의 전통 음악이었다. 신중현 이래 서구와 한국이 험난한 상황에서 조우한 계보학은 이렇게 느닷없는 장에서 다시 쓰여지기 시작했다.

 그는 87년 대한민국 무용제 음악 부문 대상작 <O의 세계>를 본격적인 출발점으로 하여 피리와 대금과 아쟁, 나아가 사물(四物:북ㆍ장구ㆍ꽹과리ㆍ징)의 깊은 속살을 탐사하면서 무릎이 까져 피를 흘리고 우는 일곱살배기 소년의 숙명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우리 것이면서 우리 것이 아닌 이 ‘소리’에 대한 탐닉은 바로 88년 올림픽 전야제 축전 행사곡인 <도약>과 <환희와 초월>에 이르러 한 구비를 돌게 되고, 뒤이어 망부(亡父)에게 헌정하는 89년 앨범<황천길>의 <슬픈 소리>(신영희 창)로 하나의 산자락을 일구어놓았다.

 국악을 향한 그의 관심이 소박한 민족 회귀적 발상이나, 또 하나의 새로운 것을 위한 피상적인 수용으로 그쳐버릴 수도 있는 위기의 지점에서 그는 영화 <태백산맥>을 통해 더욱 깊은 국악의 물줄기 속을 파고들었다. 대금 독주와 신시사이저 오케스트레이션이 장엄하게 만나는 오프닝 <산맥>이나, 태평소와 피리의 음색을 철저히 계산한 <돌아눕는 산>,그리고 전통적인 타악기의 울림을 산뜻하게 재편한 <슬픈 골짜기> 같은 대목에 이르면 그가 10년 동안 추구해온 과제가 성숙 단계로 진입하고 있음을 여실히 감지할 수 있다. 그가 독자적으로 한국 영화 음악을 일으켜 세운 최대 공헌자로 등재될 시간이 점점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이 세 얼굴에 ‘성인층을 위한 대중음악(AC)’이라는 또 하나의 얼굴이 추가되어야 마땅할 것 같다. 그에게 성인 대중 음악은 이미 그가 데뷔할 무렵부터 배태되어 있었던 것인데, 그는 <일곱 색깔 무지개>와 <새야>를 비롯하여 80년대 전반에 캠퍼스를 들뜨게 했던 <젊은 그대>와 <돌이와 순이>같은 한국적 로큰롤을 추구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당시의 주류 음악 언어인 이지 리스닝 발라드에 대한 배려를 잃지 않았다. 그를 단번에 스타덤에 올려놓은 80년대 벽두의 <못다핀 꽃 한송이> <정년 그대를> <별리>는 말할 것도 없고 송골매가 불러 큰 인기를 끌었던 <모두 다 사랑하리>는 아직 시장이 10대에게 장악되지 않은 단계에서 폭넓게 파고든 노래들인 것이다. 특히 그의 데뷔 앨범 속에 수록된 <별리>는 이 당돌한 싱어송라이터의 진취적인 문제 의식을 아낌없이 보여주는 수작으로서, 그가 전통 음악의 품에서 끌어내온 것임이 명백한 템포나 수평 선율, 길게 끄는 여음은 단순한 민요 리메이크와는 출발부터 궤를 달리하는 것이다.

 그러나 80년대 후반기를 국악과 씨름하면서 그는 좀더 자신의 깊은 곳으로 홀로 걸어 들어간다. 숱한 부수 음악작업으로 정신없이 바쁜 10년을 넘기고 88년에 발표한 12주년 기념음반을 통해 그는 어느덧 성인이 된 자신을 겸허하게 발견했다. 신시사이저를 통해 현상하는 현악 합주의 편곡이 성숙의 극점을 보여주는 <변심>은 그의 음악이력에서 반환점이 되는 노래이다. 이 노래에 이르면 단지 아름다움을 위한 선율이나 자극을 위한 리듬은 멀찌감치 물러서며 ‘비 바람에 꺾인 저 나무처럼 처량한’ 비애의 정서가 물결처럼 아롱진다. 대중 음악 시장의 주류적 감수성에 아부할 틈이 없는 부지런한 꿀벌임을 스스로 증명해낸 것이었다.

나이를 먹어도 늙지 잃는 명인
 <서편제>와 <태백산맥>의 영화 음악 작업 틈바귀에서 솟아난 금년의 <Men In Blue>는 텔레비전 연속극 주제가인 <남자는 외로워>를 제외하면 앞의 12주년 앨범에서 91년의 <난 어디로>에 이르는 일련의 앨범을 통해 발표한 노래 중에서 이 땅의 30~40대적 정서를 담은 곡들을 재정렬해낸 앨범이다.

 첨단 컬러 시대에 그가 즐겨 채택하는 흑백사진과 담담해진 음악의 톤은 어딘지 모르게 낡아보인다. 그러나 그 흑백 사진에는 장바닥의 조류에 손쉽게 의탁하지 않는 완고함이 응고되어 있다. 그것은 나이를 먹어도 늙지 않는 장인의 호흡이다. 이 젊은 명인의 다음 행선지는 어디일까. 그것은 아마 최근 간간이 보여주는 기타와 사물놀이와의 즉흥적인 잼 세션(Jam Session) 앨범이 아닐까. 이 작업이 마무리 된다면 우리는 한국 대중 음악의 소망스런 청사진을 하나 더 갖게 될 것이다. 김수철은 쉽게 조로하는 우리 사회에서 매우 드물게 보는 영원한 동안(童顔)인 것이다. ■
姜 憲 (음악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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