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대신 마음으로 ‘태양’을 찍는다
  • 여운연 차장 ()
  • 승인 1990.11.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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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 일 맹인사진전에 출품한 시각장애자 金寅洙씨

 피아니스트 정도라면 몰라도 육안으로 포착해야 하는 사진을 다루는 사람이 시각장애자라면 누구나 고개를 갸우뚱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난 10월15일부터 20일까지 서울 후지 포토 살롱에서 열린 한 · 일친선 맹인사진전은 사람들의 눈길을 끌기에 충분했다. 비록 ‘육안’으론 보이지 않더라도 ‘心眼’으로 사물을 꿰뚫어보는 사람들의 경탄스런 사진전이었던 것이다.

 일본 시각장애자 30여명의 작품 50점이 걸린 이번 전시회에 유일하게 한국측 대표로 출품한 사람은 金寅洙 (56)씨. 주로 태양을 주제로 한 사진을 내놓은 그는 해 이외에 다른 물체는 거의 식별이 불가능한 시력0.0의 약시자로 본업이 한의사인 아마추어 사진작가다.

 

본업 한의사인 아마추어 작가

 맹인에 가까운 상태에서 하필 가장 시각적인 예술을 택하고 있는 것은 시각장애를 뛰어넘는 남다른 집념 때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마산에서 25년째 해양한의원을 운영해오고 있는 김씨는 사진경력이 본업보다 훨씬 앞선 카메라광이다. 국민학교 5학년 때부터 사진현상을 할 수 있을 만큼 사진에 미친 이후 지금껏 손을 놓지 않고 있다.

 김씨가 눈이 나빠지기 시작한 것은 고교 재학 때. 만능 스포츠맨이었던 그는 운동을 하던 도중 한쪽 눈을 다쳐 그만 시력을 잃게 됐다. 그런 좌절 속에서도 카메라를 손에서 놓지 않았으니 그는 40년 넘게 집념으로 사진을 찍어온 셈이다.

 그러면서도 그동안 공모전에는 한번도 출품하지 않은 채 순수한 아마추어로 남아 있었다. 금년들어 국전에 처녀 출품해 입선한 것이 지금까지 입상경력의 전부다. 국전초대작가이며 심사위원을 지낸 金生洙씨가 그의 친동생.

 오랜 사진경력에도 불구하고 사진계에선 별로 알려져 있지 않던 그가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지난해 서울 예총화랑에서 가진 개인전 때문이었다. 82년 마산에서 열린 첫 사진개인전에 이어 가진 이 전시회에는 해를 주제로 한 99점의 사진을 출품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해를 피사체로 한 사진은 고도의 촬영기법이 요구되는 까다로운 작업인 만큼 그의 사진을 본 사람들은 경탄을 금치 못했다. 또한 그의 창작의욕은 많을 장애자들에게 용기와 교훈을 주기도 했다.

 해뿐만 아니라 풍경사진을 즐겨 찍어온 그는 몇년 전부터 눈이 더욱 나빠지는 바람에 요즘은 거기에 손을 대지 못하고 있다.

 해만 바라볼 수 있는 ‘어두운 눈’을 갖고 있으면서도 그는 별로 갑갑해 하지 않는다. 김씨는 “세상살기에는 불편한 눈이지만 아직은 해를 바라볼 수 있으니 다행이다”라며 오히려 여유가 있다. 하긴 그런 ‘여유’가 없었던들 그는 벌써 주저앉고 말았을 것이다.

 마산에서 ‘명의’로 소문난 그의 한의원은 밤낮없이 손님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그러나 언제 어느때고 ‘해좋은 날’이라고 하면 열일 제쳐둔 채 해를 찍으러 나선다. 김씨는 이런 날이야말로 “하늘이 시켜주는날”이라는 것이다. 인천태생인 김씨는 해사진 찍는 데는 항도 마산의 입지적 조건이 그만이라며 흡족해 하고 있다.

 시도 때도 없이 훌쩍 떠나버리는 그의 촬영여행에는 항상 아내 金榮植(53)씨가 그림자처럼 따라나선다. 30년 결혼생활 동안 남편의 말이라면 무조건 따라와주는 아내는 이 젠 뗄 수 없는 사진친구이자 술친구가 돼버렸다.

 

해가 좋은 곳이면 어디든 간다

 아내가 “아, 오늘은 해가 참 좋네요”라고 말을 건네면 ‘원장님’은 무조건 카메라 가방을 챙기라고 재촉한다. 때론 대여섯시간씩 기다려야 하는지라 아내로선 더할 수 없이 지루할 때도 많았지만 이젠, ‘감이 익었을까’‘코스모스가 피었을까’궁금해 먼저 나서자고 할 정도란다.

 그러다가 자년엔 아예 아내에게 ‘돼지코 모양’의 올림퍼스 자동카메라(김씨는 이 카메라를 ‘뚱딴지’라고 이름붙였다)를 하나 안겨줬다. 김씨는 “요전 촬영 때 난 필름 한 통을 찍었는데 ‘보살’은 세 통씩이나 작살을 내버렸다”고 아내에게 핀잔을 주면서도 못내 흐뭇한 표정이다.

 슬하에 2남3녀를 다 키워놓은 김씨부부는 자칫 사그라들기 쉬운 중년기에 수시로 자연을 접한 때문인지 같은 연배에 비해 훨씬 젊어보인다. 김씨가 말하는 건강의 비결은 철저히 건강관리를 하든가, 아니면 철저하게 하지 않든가 둘 중 하나인데 자신은 ‘절대적으로’ 후자쪽이라는 것이다.


 김씨 부부는 해가 좋은 곳이라면 방방곡곡 찾아다니고 전국의 일출 · 일몰 명소는 샅샅이 꿰뚫고 있다. 부산의 달맞이 고개, 다대포의 낙조, 거제 해금강…. 같은 곳이라도 김씨부부만이 찾는 은밀한 장소는 따로있다.

 자리를 잡고나면 삼각다리에 카메라를 고정시켜놓는다. 바닷바람에 흔들리기 쉽지만 눈으로 지켜볼 수 없으니 아예 커다란 돌멩이를 걸어놓기도 한다. 서서 몇시간이고 기다릴 때면 김씨는 ‘參禪’하는 기분이 된다고 한다.

 렌즈는 28mm에서 1000mm까지 이것저것 바꿔끼어가면서 거리는 무한대로 맞춰놓는다. 그런 다음 왕년의 감각을 살려 셔터타임으로 노출을 조정한다. 김씨는 원시카메라에 원시적 방법으로 사진을 찍고 있다고 겸손해 하지만 그의 사진은 살아 있다는 얘기를 곧잘 듣는다.

 

“매일 뜨는 해도 매일 다르다”

 김씨가 이처럼 보이지도 않는 사진에 집착하고 있는 까닭은 무엇보다도 10년째 심취해 있는 불교사상 때문인 것 같다. 몇년 전까지 팔만사천경을 독파했을 정도의 독실한 불교신자로 1년 전엔 고성에다 ‘藥泉寺’란 절을 세웠다. 그의 불교적 사고를 반영하듯 지난해 전시회에 즈음해선 《眞空妙有》란 사진집을 내놓았다. 사진작가 洪澤柳씨는 이 책 서문에서 김씨의 지속적인 작업을 가리켜 “건강했던 과거에의 향수나 미련에서 스스로를 해방시키고 자신에의 반항을 극복하고자 하는 탈각행위, 즉 투혼이 아니겠는가”라고 말했다.

 김씨는 해를 단순히 피사체로만 여기고 있지 않다. 매일 뜨고지는 해속에서 그는 인생을 배우고 있다고 한다. 계절마다 빛도 다르고 크기도 달라지고, 찰나찰나 변하는 해로부터 하나의 생명을 느끼고 있다는 것이다.

 김씨는 “매일 뜨는 해도 매일 다르다. 사람 사는 일도 해가 뜨고 지는 일과 같다. 그래서 매일의 해처럼 모든 삶들은 다 소중하다”면서 자신은 해를 바라볼 수 없을 때까지 해를 찍겠노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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