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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범근을 계속 믿자

차원 높은 ‘축구문화’ 건설의 시발점

최영재 기자 ㅣ 승인 1997.11.13(Thu)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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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적필패(輕敵必敗). 그동안의 승리에 너무 도취해 있었던 것일까.

 프랑스 월드컵 아시아 지역 예선 B조 경기에서 승승장구하던 ‘차범근사단’에 브레이크가 걸렸다. ‘갈색폭격기’ 차범근 감독이 이끄는 한국축구 대표팀은 지난 11월1일 잠실 올림픽 주경기장에서 벌어진 일본과의 홈 경기에서 시종 무기력한 경기를 펼치다가 0대2로 완패해, ‘과잉 열기’라고 까지 하리 만큼 이 경기에 관심을 보인 온국민에게 커다란 실망을 안겨 주고 말았다.

 전반전이 시작되자마자 1골을 허용하며 허둥대기 시작한 한국팀은 ‘템포축구’‘실리추구’라는 차범근 추구의 장점을 하나도 살리지 못한 채 경기 내용면에서 일방으로 끌려 다녔다. 그동안 우리 대표팀의 취약점으로 지적되었던 미드필드진의 악세를 보강하지 못하고 일본의 나나미·나카다·기타자와에게 중원을 철저하게 장악당한 탓이다.

 전반 37분 로페스에게 추가 골을 허용한 것은 결장타였다. 홍명보가 경고 누적으로 결장하고 최용수마저 전반전이 끝날 무렵 코뼈가 내려앉는 중상을 입고 실려 나간 우리 대표팀으로서는 더 이상 어쩔 도리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날의 패배는 무엇보다도 경기에 임하는 양 팀 선수들의 정신 자세 차이에서 말미암는다. 벼랑 끝의 위기에 몰린 일본은 이 한 판에 모든 것을 걸고 사생결단의 자세로 나온 반면, 이미 월드컵 본선 진출이 확정되어 상대적으로 느슨해진 우리 대표 선수들은 몸놀림이 무겁고 볼처리에도 적극성을 보이지 않았다.

 대표팀뿐만 아니라 그동안 방정을 떨어 온 한국 사회 분위기도 이 날 패배에 큰 몫을 했다. 우즈베키스탄에 대승을 거둔 직후부터 불거지기 시작한 ‘캐스팅 보트’ 어쩌고 하는 지저분한 정치 논리를 비롯, 일부 축구팬들의 일본 동정론과 정몽준 회장의 대일 밀약설, 그리고 축구와는 별로 상관도 없는 ‘요상한 아이’ 들을 동원하여 축하쇼를 벌인 공영 방송의 ‘김칫국 먼저 마시기’까지 우리 사회가 보여 준 반응은 정정당당한 스포츠 정신과는 거리가 멀었다.

선진 축구 밑거름은 국민의 신뢰
 승부의 세계에서 항상 이길 수는 없다. 대표팀 경기를 제외한 거의 모든 축구 경기 때 관중석이 텅텅비는 우리 축구의 현실을 생각하면, 우리 대표팀이 월드컵 본선 진출권을 따낸 것만 해도 기적 같은 일이다.

 일본에 진 것이 뼈아프기는 하지만 지금 시점에서 패배한 것은 ‘차범근 축구’가 정착하는 데 보약이 될 수도 있다. 빠른 볼 처리와 경기 집중력을 가종하는 ‘차범근축구’가 현재의 우리 축구 문화를 한 단계 높일 차원 높은 선진 축구인 것만큼은 분명하다. 차범근 리더십의 근간은 선수들과 1 대 1 대화를 통한 문제점 파악 및 해결방법도출, 합리적이고 치밀한 데이터 관리, 지도자의 솔선수범과 카리스마로 요약할 수 있다. 그러나 일본과의 경기에서도 드러났듯이 우리 대표 선수들이 아직 그의 축구 철학을 확실하게 체득하고 있는 것 같지 않다. 프랑스 월드컵 본선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려면 앞으로 남은 8개월 가량을 효율적으로 이용하여 ‘차범근 축구’가 완전히 정착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프랑스 월드컵 본선 성적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건전하고 차원 높은 축구 문화를 건설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것은 어느 한 사람의 힘으로, 하루아침에 이루어질 일은 아니다. 차범근이 이길 때는 ‘차범근 대통령, 반찬호 국무총리’ 따위, 되지도 않을 소리를 늘어놓다가 한 번 졌다고 해서 ‘올 것이 왔다’고 비아냥거리거나 ‘진건가, 져준건가?’하며 의혹을 제기하는 것은 바른 태도가 아니다. 지금은 모든 축구인·축구팬들이 미완의 ‘차범근 축구’를 정착시키기 위해 그에게 힘을 실어 주어야 할 때이다. 작년 12월 ‘두바이의 치욕’으로 위기에 빠졌던 한국 축구가 월드컵 본선에 진출 할 수 있게끔 빼어난 지도력을 발휘한 차범근 감독이 이번 패배에 실망하지 말고 자신의 축구 철학을 한껏 꽃피울 수 있도록 그에게 전폭적인 신뢰를 보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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