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로 가는 충무로, 대안은 ‘젊은 영화’
  • 송준 기자 ()
  • 승인 1998.01.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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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유학파 출신 ‘뉴 웨이브’ 주도…토착 독립 영화 진영도 한몫

세계 영화사의 흐름을 이끌어온 것은 언제나 젊은 감독들이다. 흐름이 멈추어 부패가 진행될 즈음이면 어디선가 ‘젊은 영화’가 흘러들어 물줄기를 바꾸곤 했다. 이른바 ‘뉴 웨이브’다. 그렇다면 한국 영화는 어떠한가. 퇴행과 답보로 얼룩진 한국 영화에 뉴 웨이브는 오고 있는가, 최근의 영화 현실을 살펴보고, 우리 젊은 영화의 잠재력과 가능성을 진단한다.<편집자>

 올 하반기 영화계는 유난히 부선했다. 10월 초부터 한 달여 동안 한국 영화의 활로를 모색하는 세미나가 일곱 차례 열렸고(영화진흥공사·영화평론가협회·한국영화학회 등 주최), 11월 말부터는 <한·일 인디영화제> <서울단편영화제> <실험영화제> <대학영화제> <독립영화제> <열린 영화제>가 12월 말까지 줄을 이었다. 앞의 세미나들은 충무로로 상징되는 주류영화에 대한 문제 제기이고, 일련의 ‘작은’영화제들은 상업 영화의 본질적 한계를 극복하려는 대안 모색이다.

 한국 영화의 문제는 주류 영화와 대안 영화 사이의 간극이 너무 크다는 데 있다. 세미나에서는 작가 정신 부재, 제작 시스템의 매너리즘과 한탕주의 따위가 거듭 지적되었다. 이같은 병폐를 대체하기에는 대안 영화가 관객으로부터 너무 먼 거리에 격리되어 있는 것이다.

 올 한 해 상영된 상업 영화는 모두 52편, 홍행만 따져 보면 근래 보기 드문 풍작이다. 10만 명 이상 관객을 동원한 작품이 14편(79~94년 평균 3.5편)이고, 30만 명을 넘긴 영화도 7편이나 된다(96년 4편). 그런데 원가 계산을 해보면 얘기가 달라진다. 15억원으로 추산되는 평균 제작비를 건지려면 관객이 50만 명은 들어야 한다. 비디오 판관료까지 감안하더라도 밑지지 않은 영화는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라는 계산이 나온다.

 그래서 생겨난 비법이 있다. 예컨대 물주로부터 받아온 제작비 가운데 2억~3억원을 영화사가 먼저 ‘꿀꺽’ 한 뒤 남은 돈으로 영화를 만드는 방법이다. 꿀꺽한 금액은 식대·장비 이용료·배우 출연료 등을 이중 계약하는 방식으로 위장한다. 특히 출연료 이중 계약은 심각한 익순환을 부른다. 실제보다 높게 발표된 스타의 계약 금액은 곧바로 언론에 대서 특필되고, 다음 영화에 출연할 때 출연료의 기준이 되어 ‘몸값 인플레’를 부추긴다. 일부 영화사의 사례이기는 하지만, 그런 곳일수록 스타를 선호한다. 한국 영화 제작비 가운데 가장 큰 비중(약 40%)을 차지하는 것이 바로 스타의 출연료다. 한때 영화 제작에 열을 올리던 대기업들이 배급·유통으로 발길을 돌린 까닭도 이런 메커니즘과 무관하지 않다.

 문제는 또 있다. 흥행이 생존 차원의 문제가 되다 보니, 영화의 형식(표현)과 내용의 겉도는 경우가 많다. 영화는 카메라로 찍은 문학이 아니다. 카메라 워크·영상의 색조·사운드 하나하나가 감독의 공감각적 미학에 의해 유기적인 조화를 이루는 것이 영화다. 하지만 ???당수 한국 영화는 그렇지 못하다. 감독 자신의 영화 언어가 정립되지 않았거나, 그럴 의도조차 없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근래 영화계를 오염시킨 표절 시비들이 그 증거다.<홀리데이 인 서울>은 아ㅖ 드러내놓고 <중경삼림><홍콩·왕가위 감독>의 얼개와 표현 기법을 빌렸다. 이밖에도 <체인지><올가미><편지> 등 10여 편이 표절 혐의를 받은 바 있다. 한국 영화는, 관객까지도 여전히 <TV 문학관> 수준에 머물러 있는 듯하다. <아버지>같은 베스트 셀러 소설을 기계적으로 스크린에 옮기는가 하면, 줄거리만으로 관객의 눈물샘을 자극하는 멜로 영화가 줄줄이 제작되기도 한다(<편지> 관객 70만 돌파).

 장르 영화의 공식조차 줄거리 중심이다. <결혼이야기>가 성공한 이후 5년 동안 맹위를 떨치고 있는 로매틱 코미디가 좋은 예다. 영화 평론가 곽영진씨는 “가정과 직장을 오가며 지겹게 싸우기, 갖은 방법으로 상대방 기 죽이기, 여피족의 세태 보여주기, 억지로라도 웃기기, 가치관·현실 인식 따위는 원천 봉쇄하기 등으로 줄거리를 짜고 환상적 인테리어(비현실적 상황 설정)로 화면을 도배하는 것이 한국판 로맨틱 코미디의 정체이다”라고 말했다. 올해 나온 <베이비 세일><미스터 콘돔>역시 여기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다.

이창동 · 장윤현 등 신인 감독 활약 돋보여
 이 우울한 현실에 희망을 던져주는 한 가지 현상이 있다. 주목할 만한 신인 감독이 대거 등장한 것이다. <초록 물고기>의 이창동, <접속>의 장윤현, <시간은 오래 지속된다>의 김응수, <바리케이드>의 윤인호 등이다. 이 영화들은 주간 <TV저널>과 월간 <스크린>이 각각 비평이다 10인의 추천을 받아 선정한 ‘올해의 영화’에서 나란히 상위를 차지했다. 지난해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로 데뷔한 홍상수, <세 친구>의 임순례 감독도 같은 대열에 꼽힌다. 홍감독은 현재 두 번째 작품 <강원도의 힘>의 후반 작업을 하고 있다.

 이들 중 태반이 해외 유학파라는 점도 눈길을 끈다. 홍상수 감독은 미국 캘리포니아 예술대학과 시카고 아트 인스티유트에서, 임순례 감독은 프랑스 파리 8대학에서, 김응수 감독은 러시아 모스크바 국립영화학교에서, 장윤현 감독은 헝가리 국립영화학교에서 공부했다. 장감독은 한양대 재학 시절 단편 <인재를 위하여>로 이름을 얻고, 장편 <오! 꿈의 나라> <파업 전야>를 공동 연출한 바있다. 데뷔작 <아름다운 시절>의 후반 작업에 한창인 이광모 감독(영화사 ‘백두대간’ 대표)은 미국의 서던켈리포니아 주립대학에서 영화를 배웠다. 그밖에 아직 데뷔하지 않았지만 빠뜨릴 수 없는 사람이 있다. 독일의 베를린영화아카데미를 마친 황철민 감독과 프랑스 국립영화학교 출신 변혁 감독이다. 졸업 작품 <빌어먹을 햄릿>이 97년 베를린 영화제 포럼 부문에 초청된 바 있는 황감독은, 요즘 <건망증><가제>등 2편을 새로 준비하고 있다. 변 혁 감독은 졸업과 동시에 프랑스 자본으로 <서머타임><가제>을 제작할 예정이다. 그는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음악가 윤이상을 영화화하자는 제의도 받았다.

 이 가운데 이창동·장윤현 감독이 충무로에 한쪽 발을 딛고 있을 뿐, 나머지는 기성 영화계의 자본과 거리를 유지하며 자기만의 영화 세계를 다듬고 있다. 독학으로 영화를 익혀 1인8역을 해내는 배용균 감독은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에 이은 두 번째 작품 <검으나 땅에 화나 백성>으로 독자적인 영상 세계를 구축해 가고 있다. 김동원(푸른영상 대표) 홍형숙(서울영상집단 대표) 변영주(보임 대표)조성봉(하늬영상 대표)등은 다큐멘터리 작가로 입지를 세운 독학과이다(86쪽 상자기사 참조). 김윤태처럼 아예 단편 영화에 전념하며 때를 기다리는 재야 감독도 10여 명이나 된다.

 이쯤에서 한국 영화의 뉴 웨이브 가능성을 살펴보자. 세계 각국의 뉴 웨이브 경향은 몇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당대의 영화가 가장 침체했을 때 △해외 유학파 혹은 영화운동 집단 출신 신인 감독이 대거 등장하여 △현실문제를 직·간접으로 주목하고 △종전의 제작 방식과 표현 스타일을 거부하면서 독자적인 영화 문법을 구축했다는 점이다(87쪽 상자 기사 참조). 따라서 최근의 신인 감독 러시 현상이 뉴 웨이브를 의미하지는 않더라도, 한국 영화의 현실이 변혁기의 정점에 가까워졌음을 알리는 징후임은 분명하다.

 더욱이 이 젊은 감독을 뒤에는 열정과 확신으로 영화를 더 젊게 만들려는 폭 넓은 예비 감독이 존재한다. 4회째를 맞은 서울단편영화제는 유력한 등용문이 되었다. 올해는 예년 응모작의 2배 가까운 단편(1백21편)이 몰려들었다. <간과 감자><송일곤·폴란드 국립영화학교 재학><기념 촬영><정윤철><초촌면 신암리><오점균><동창회><최진호>등은 비평가들로부터 가능성을 인정받은 작품들이다.“올해 작품 수준이 고르게 탄ㅌ안해졌다. 기대해도 될 것 같다”라고 김홍준 감독(영화제 프로그래머)은 말했다.

 실험 영화는 비유와 상징, 생략과 도약, 비틀기 같은 생경한 시도를 통해 카메라(혹은 사운드)의 잠재 영역을 넓혀가는 작업이다. 실험영화연구소 권병순 소장은 “실험 영화가 개발한 새 기법을 주류 영화계가 수용하는 데 10년 정도의 시간차가 존재한다. 한국 영화가 외국의 표현 기법을 차용할 수밖에 없는 까닭은 독자적인 영상 미학을 개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고유의 영상 미학은 실험을 통해 스스로 얻어내는 수밖에 없다. 여기에 실험 영화의 의의가 있다”라고 말했다. 이 연구소는 93년 문을 연 이래 10여 명의 연구자가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독립영화협의회’ ‘영화제작소 청년’ ‘젊은 영화’ 같은 단체들은 독자적인 장·단편 제작 시스템을 모색한다. ‘청년’의 활동이 가장 두드러지는데, 김진상 이지상 정지우 등은 단편 영화제에서 확고한 입지를 다진 편이다. 독립영화협의회는 일반인을 대상으로 워크숍을 열고, 그렇게 만든 영화를 매년 2회씩 꾸준히 발표해 왔다.

단편 · 실험 영화 통해 고유 미학 개발해야
 제작비 수천만원을 마련하기가 버거울 정도로 열악한 환경이지만, 진짜 고민은 따로 있다. 어렵사리 만든 영화를 상영하고 배급할 통로가 없는 것이다. 최근 독립영화제가 자주 열리고 동숭씨네마텍·씨티극장 등이 간헐적으로 상영 기회를 마련하기는 하지만, 소극장이나마 항상 상영할 공간이 절실한 처지이다. ‘현실’은 제작 위주의 팀이었는데, 94년 ‘인디라인’으로 이름을 바꾸면서 단편 영화 배급·유통기능을 자청하고 나섰다.

 전전긍긍하던 독립영화계는 93년 1월 ‘문화학교 서울’이 전국 시네마테크 연합을 결성하면서 면모를 일신했다. 서울·부산 지역에서 가까스로 상영되던 단편·독립 영화들이 비로소 전국 회원들에게 전해지게 된 것이다. 96년에는 한국영화아카데미·푸른영상·청년 등 12개 단체와 30여 독립영화 작가들로 ‘인디포럼 작가회의’를 결성했다. 문화학교 서울은 96년 초부터 대안 영화 제작에 직접 나섰다.

 이들 독립영화인이 이룩한 성과는 5년 이상 가시밭길을 걸으면서 일궈낸 것이어서 더욱 든든하다. 그렇지만 마지막 함정이 남아 있다. 간단 없는 충무로의 유혹이다(85쪽 상자 참조). 영화사가 내미는 시나리오를 대리 연출하는 작업은 ‘하청 감독’이나 다름없다. 이 경우는 가개가 소규모 설문조사를 근거로 하여 졸속 기획한 ‘장삿속 영화’이기 십상이다. 이에 대해 많은 단편 영화 감독이 “충무로의 손짓에 이끌리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남의 시나리오를 필름에 옮기는 하청 작업까지 할 생각은 없다”라고 잘라 말한다.

 “영화진흥금고 자금 가운데 10% 정도를 단편 독립 영화 제작에 배정하는 안목이 아쉽다. 각 지역의 시민회관을 개방하는 정책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라고 인디라인의 김대현 대표는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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