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억 달러 걸린 돈 싸움 향방
  • 박재권 기자 ()
  • 승인 1998.04.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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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증권 대 JP모건 손해배상 소송 ‘타협’ 모색할 가능성

“사건번호 98 가합 12446….” 지난 3일 오전 서울 민사지방법원 560호 법정. 주심 판사가 사건 번호를 읽어 내려가자 방청석은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언론사 기자들의 손놀림이 빨라지기 시작했고, 금융기관 관계자들 역시 판사와 변호사의 한마디 한마디를 놓치지 않으려고 촉각을 곤두세웠다.

이 날 재판의 원고는 SK증권, 피고는 JP모건과 보람은행. 이 재판은 소송 가액이 2억 달러를 넘고, 준거법이 한국 · 미국 · 말레이시아에 흩어져 있다는 점에서 화제를 모았다. 또 동일한 사건이 서울과 뉴욕 법원에 동시에 제소되어 있다는 점도 전례가 없는 일이다.

이 사건은 지난해 SK증권이 JP모건의 말을 듣고 동남아 채권에 투자했다가 엄청난 손실을 보았기 때문에 생긴 일이다. JP모건은 만기일이 도래하자 SK증권에 손실금 반환을 청구했고, SK는 계약 내용의 불법 · 부당성을 내세우며 법원에 제소했다. 그러자 한국 법원이 자신들에게 불리하다고 판단한 JP모건은 뉴욕 법원에 SK증권을 상대로 맞제소했다. 게다가 최근에는 SK증권의 투자 파트너인 한남투자신탁(한남투신)까지 JP모건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고, 지급 보증을 선 보람은행이 SK증권을 상대로 반대 소송을 제기할 태세여서 사건은 점점 복잡하게 꼬여 가고 있다.

SK증권 실수냐, JP모건의 약속 위반이냐

국내외의 뜨거운 관심에도 불구하고 첫날 공판은 10여 분 만에 싱겁게 끝났다. 재판부는 물론이고, SK증권 · JP모건 · 보람은행 변호인단도 한결같이 시간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사안이 복잡하고 관련 자료의 분량도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결국 다음 공판은 6월 이후로 미루어졌고, 실질적인 공판은 뉴욕 법원의 디스커버리 절차, 즉 소송과 관련된 사실 확인 작업이 끝나는 10월 이후에나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그 후에 재판이 진행되더라도 대법원의 최종 판결까지 나오려면 2~3년은 족히 걸린다는 것이 법조계의 판단이다.

이 때문에 덕을 보는 것은 SK증권이다. 어찌 되었든 그때까지는 JP 모건에 손실금을 물어 주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법조계 일각에서는 명예 추락을 우려하는 JP 모건이 화의를 시도할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SK 증권은 어쩌다가 2억 달러가 넘는 손실을 보게 되었을까. 금융 전문가들은 개인 투자가들이 ‘신용’을 잘못 써서 망하듯이, SK 증권도 투자 원금(초기 출자액)의 12.7배나 투자했다가 원금의 5.83배를 손해 보는 화를 입었다고 말한다. 과욕이 빚은 참사인 셈이다.

SK 증권이 실패한 까닭을 정확히 이해하려면 채권연계파생상품(TRS)을 알아야 한다. 이번에 문제가 된 다이아몬드 펀드의 경우를 살펴보자. 이 펀드는 97년 초 SK 증권(2백억 원)과 한남투신(50억원), LG금속(50억원)이 모두 3백억 원(3천4백40만 달러)을 출자해 말레이시아 라부안에 설립한 펀드이다.

JP 모건은 이 펀드에 5천3백만 달러를 빌려주어 출자액을 8천7백40만 달러로 늘린 뒤, 이를 인도네시아 채권에 투자하도록 권유했다. 이 과정에서 JP 모건은 다이아몬드 펀드의 가치가 오르든 내리든 5천1백41만 달러만 지급받기로 계약했다. 금리를 받기는커녕 대출 원금의 3%, 즉 1백59만 달러를 비용으로 부담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JP 모건은 왜 수수료까지 부담하며 동남아 채권투자를 주선했던 것일까. 윤창현 교수(명지대 · 경영학)는 “비공식적으로 확인한 바에 따르면, 투자 대상이 된 루피아화 연동 채권은 JP 모건이 보유하고 있던 채권이다. JP 모건은 이것을 처분하기 위해 거래를 조선한 것으로 보인다”라고 말했다.

JP 모건은 국내 금융기관들에게 무이자로 자금을 빌려주는 대신, 엔화와 바트화 연계 상품에 1대5 비율로 투자하도록 권유했다. 이 ‘투자 공식’에 따르면, 엔화와 태국 바트화의 가치가 절상될 때 국내 금융기관은 이익을 얻을 수 있다. 그런데 상황은 정반대로 움직였다. 지난해 7월 바트화가 폭락해 막대한 손실을 입게 된 것이다. 여기에 루피아화에 연계된 인도네시아 채권값마저 폭락해 손실 금액이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SK 증권은 JP 모건이 투자해야 할 파생금융상품을 제시하면서 정작 중요한 정보를 제대로 알려주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뉴욕 주의 판례에 따르면, 계약 당사자 일방이 △어떤 정보에 관해 월등한 지식을 가지고 있고 △그러한 정보를 상대방이 쉽게 입수할 수 없으며 △상대방이 잘못된 지식에 기초하여 행위 하는 것을 알고 있다면 상대방에게 그러한 사실을 고지해야 할 묵시적인 의무가 있다. SK 증권을 변론하는 법무법인 율촌의 한 변호사는 “JP 모건측이 바트화에 연계된 자기들 채권을 줄이기 위해 한국 금융기관들을 이용하고 위험을 제대로 설명해 주지 않았다면, SK 증권과 JP 모건 간의 계약은 원천 무효가 될 수 있다. 우리는 지금 그 증거를 수집하고 있다”라고 밝혔다.

이에 대해 JP 모건 측은 한마디로 어이없다는 반응을 보인다. JP 모건의 법정 대리인인 열린합동 법률사무소 황상현 변호사는 “SK증권과 JP 모건은 둘 다 전문 금융기관이다. 국내의 어떤 금융기관보다도 국제 영업에서 강했던 SK 증권이 이제와서 몰랐다고 떼를 쓰는 것은 말도 안 된다”라고 말했다.

양측은 또 누가 먼저 거래를 제안했느냐를 두고 이견을 보이고 있다. JP 모건은 SK 증권이 파생금융상품 투자를 먼저 제의했다고 주장하고, SK 증권은 미로 같은 ‘TRS 투자 조건 공식’을 JP 모건이 마려했다고 주장한다. 어느 쪽 책임이 더 큰지는 앞으로 재판 과정에서 가려질 것이다.

한국 금융기관의 ‘창피한 수준’ 드러난 셈
이번 사건을 통해 드러난 것은 구내 금융기관들의 역외 펀드 운영이 얼마나 엉터리였느냐 하는 점이다. 전문가들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복잡하기 짝이 없는 신종 파생금융상품을 거래하면서 SK 증권은 정확한 거래 조건도 파악하지 못했다. 게다가 환 위험에 노출된 정도가 너무 심했다. 루피아 화에 대해서는 투자 원금의 3배, 바트화에 대해서는 투자 원금의 5배나 투자했는데, 이것이 초대형 부실을 초래한 중요 원인이었다.

사태가 이런데도 위기관리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TRS 계약 내용을 알고 있는 사람은 실무 담당자와 담당 임원, 사장 정도뿐이었고, 이들도 얼마나 위험한 거래였는지 알지 못했다. 그 결과 사태가 악화하는 것을 눈으로 보면서도 손 한번 쓰지 못하고 당했다.

중권 금융 당국도 한심하기는 마찬가지. 사건이 터진 뒤 호들갑만 떨었지 사전에 이를 파악할 의지도, 능력도 없었다. 금융 전문가들은 “금융감독위원회가 특별팀을 만들어서라도 새로운 금융 기법에 관한 연구와 감시를 계속해야 한다”라고 충고한다.

과연 어느 쪽이 승리의 축배를 들 것인가. 서울과 뉴욕 법원은 과연 동일한 판결을 내릴 것인가. 숱한 진기록을 남기게 될 이번 재판에 세계 금융계의 이목이 집중되어 있다. 그렇지만 국내 금융 전문가들의 마음은 불편하기만 하다. 한 증권사 간부는 “흥미진진한 볼거리인 것은 분명하지만 솔직히 창피한 노릇 아니냐”라며 씁쓸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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