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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용소 군도의 악몽 끝나지 않았다

2차대전 영국군 생존 포로들, 일왕 방문 앞두고 사과 · 배상 강력요구

런던 · 한준엽 기자 ㅣ 승인 1998.03.19(Thu)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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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19일, 도쿄 지방법원 재판정. 은발에 구레나룻을 기른 노신사는 증언 도중 온몸을 떨면서 목이 메었다.“하루 24시간 우리는 고문과 죽음의 공포 속에 살아야 했다. 포로들은 인간이 아니라 일본군의 잔학성을 만족시켜 주는 실험용 동물이었을 뿐이다. 일본 정부는 이제 그나마 남아 있는 연합군 포로들이 모두 병들고 늙어서 사라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내가 죽어간 동료들을 대신해 이 법정에 선 것은 단 한 가지 이유, 일본의 만행과 일본 정부의 책략을 밝혀 정의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이다.”2시간가량 심리가 계속되는 동안 증언에 나선 전쟁 피해자 4명은 치밀어 오르는 격분을 애써 억누르고 있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이 포로 수용소에서 저지른 만행이 이처럼 고통스러운 증언을 통해 적나라하게 공개되고 있는 가운데, 오는 5월말 일본국왕 아키히토(明仁)가 영국을 방문한다. 이번 방문은 그의 생애 중 가장 치욕적이고도 마음 내키지 않는 외국 방문이 될 것 같다. 일본이 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 전쟁 포로를 학대한 과거사에 대해 도쿄에서 세기의 재판이 벌어지고 있는데다, 또 영국에서는 생존 포로와 유가족들이 일본 국왕의 방문을 단단히 벼르고 있기 때문이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에 잡힌 연합국 포로는 모두 14만명. 이 가운데 4분의 1 가량이 고문과 학대를 받아 수용소에서 숨졌다. 영국의 경우 포로6만7천여명 가운데 1만2천여 명이 수용소에서 숨졌다. 생존 포로도 반 이상이 이미 세상을 떠났다. 현재 영국에 남아있는 생존 포로는 2만5천여명. 이중 군인 출신은 만여 명, 민간인은 1만5천여 명이다.

 영국인이 일본에 대해 갖는 감정과 일본 국왕에 대한 증온느 전후 반 세기가 지나서도 크게 바뀌지 않았다. 영국과 일본 정부가 아키히토의 런던 방문일정을 일찌감치 확정해 놓고도 공식 발표하지 않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양국 정부는 오는 5월 아키히토 방문이 몰고올 외교적인 파장과 후유증을 최소화하기 위해 영국군포로 출신 재향군인단체의 움직임과 언론 반응을 지켜보면서, 사전조처를 강구하는 등 외교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블레어 영국 총리가 일본을 방문했던 지난 1월12일 하시모토 류타로(橋本龍太郞)일본 총리는 일본군이 전쟁 포로에게 가혹한 행위를 한 데 대해 공식으로 사과했다. 이는 아키히토의 영국 방문을 앞두고 영국인의대일 감정을 누그러뜨리기 위한 사전 작업으로 해석되었다.

 그러나 영국 언론들은 하시모토 일본 내각이 보여준 정부 차원의 공식사과는 지난 95년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총리가 개인적으로 사과를 표명한 것과 내용이 크게 다르지 않은 겉치레라고 지적하고 있다. 과거에 대해 깊이 후회해 진심으로 사과하고, 살아 있는 피해자에게 적절히 배상해야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이다. 하시모토 총리는 일단 영국내 전쟁 포로 단체의 배상 요구 움직임과 일본 정부에 대한 언론의 비판적 태도를 의식해, 포로수용소 및 묘지 같은 전쟁 유적지에 대한 생존 영국인 전쟁 피해자들의 방문과 유가족 및 자손들의 일본 유학을 위한 장학 사업에 연간 80만파운드(약2백억원)를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아키히토의 영국 방문이 예정대로 5월에 성사되면 그는 71년 히로히토(裕仁)에 이어 영국을 찾는 두 번째 일본 국왕이 된다. 히로히토가 71년 영국을 방문한 것은 양국간 불편한 관계를 해소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27년전 히로히토가 영국을 찾았을 때, 런던 시내 중심가에서 그가 만난 것은 환영 인파의 박수 소리가 아니라 싸늘한 눈길과 침묵이었다. 당시 영국 언론은 길 양편에 움직이지 않고 서 있는 인파를‘무너뜨릴 수 없는 거대한 침묵의 벽’이라고 묘사했다. 일본 국민으로부터 신적 존재로 추앙받던 히로히토 국왕은 이때 생애 최대의 굴욕을 맛보아야 했다.

“진정한 참회 없으면 용서도 없다”
 그로부터 27년이 지난 지금 영국에는 포호수용소에서의 악몽을 가슴 깊이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남아 있다. 극동과 태평양 전선에서 부상해 귀환한 군인, 잔혹한 고문과 강제 노역으로 악명 높은 포로수용소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군인과 민간인 포로, 전쟁 유가족이 바로 그들이다. 이들은 아키히토의 영국 방문을 겨냥해 일본 정부와 아키히토의 진정한 공개사과와 금전적 배상을 요구하고 있다.

 이들 가운데‘일본 포로수용소 생존자협회’회장인 아서 티더링턴(76)씨는 영국은 물론 일본에까지 이름이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이번 도쿄 재판정에서 생생하게 증언한 뒤‘사라지지 않는 용감한 노병’으로 떠올랐다.

 그는 42년 싱가포르 전선에서 포로로 잡혀 점령지 대만의 포로수용소에서 3년 동안 강제 노역을 했다. 수용소의 동료 5백23명 가운데 전쟁이 끝났을 때 살아남은 이는 백여 명이었다. 티더링턴씨는 지난 반세기 동안 전쟁 포로의 고통을 보상받기 위해 법률 투쟁을 계속해 왔다. 일본 정부는 그러나 정부 차원의 배상 청구 절차가 이미 끝났다는 점을 내세워 그동안 이들 포로 단체들이 제기한 손해 배상요구를 무시해왔고, 영국 정부 역시 소극적으로 대처해왔다. 그러다가 95년 티더링턴씨가 주도해 일본군이 가한 고문과 가혹행위, 강제노역 등에 대해 일본 정부에 배상을 요구함으로써 이에 대한 소송이 도쿄 지방법원에서 시작되었다. 배상액은 피해자 1인당 1만4천파운도로, 2만5천여 피해자가 요구한 금액은 3억5천만파운드에 이른다. 티더링턴씨와 함께 공동으로 소송을 제기해 이번 증언에 나선 다른 소송인 4명 가운데는 열세 살 때 인도네시아에서 부모와 포로로 잡혀 백인 정신대로 끌려가 일본군의 위안부 노릇을 했던 제미슨(68)씨 등 민간인도 포함되어 있다.

 일본 정부는 그동안 피해자 개인에 대한 손해 배상을 요구하는 움직임이 있을 때마다 전후 51년에 체결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근거로 들어 그 책임을 회피해왔다. 즉 55년 연합군 전쟁 포로들에게 1인당 76파운드를 지불했으므로 일본 정부의 배상 책임이 이미 포괄적으로 일단락되었다는 것이다. 또 영국 등 연합국 정부들도 패전 직후의 어려운 상황에서 일본이 최대로 성의를 표했다는 입장을 보여 왔다. 국제 법률 전문가들은 이번 재판이 일본의 국가적 자존심과 도덕성이 심판대에 오른다는 점에서 포로들이 승소할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전망한다.

 일본 국내에서는 하시모토 내각의 공개 사과를 놓고 아키히토의 영국 방문을 성사시키기 위해 자존심을 내팽개친 저자세 외교라고 비난하는 극우 · 구수주의 세력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극우파 언론인 이케다시 히샤시는“최근 정부가 취한 조처는 자존심을 버린 저자세 사과 외교의 전형이다. 중국 · 한국에 이어 영국에 까지 사과했으니 이젠 동남아 모든 나라로부터 공개 사과 요구가 마구 밀어닥칠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반면 영국 언론들은 블레어 총리가 일본 정부의 이번 사과를 이례적으로 높이 평가하면서도 정작 가장 큰 관심사인 손해 배상에 대해서는 별로 언급하지 않을 것을 놓고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티더링턴씨도 블레어 노동당 정부가 야당 시절과 달리 눈앞의 경제적 이익에만 눈이 어두워 포로 보상 문제를 양보하고 있다고 정부를 비난했다.

 나치 독일의 과오를 공개적으로 반성하고 피해자들에게 보상하려고 꾸준히 노력해 온 독일과 달리, 일본 정부는 역사의 과오를 겸허하게 반성하는 것조차 회피해 그동안 국제 사회의 비판을 받아 왔다. 영국 언론들은 가해자의 진정한 참회가 없을 때 피해자의 고통은 결코 끝나지 않으며, 용서의 마지막 통과 의례도 이루어질 수 없다고 경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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