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 체제, 약인가 독인가
  • 장영희 기자 (view@sisapress.com)
  • 승인 1999.09.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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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호론자 · 비판론자 대립 팽팽 … 개혁 해법도 구구

한국 사회에는 두 부류의 인간이 있다? 하나는 재벌 체제를 찬미하는 옹호론자. 다른 하나는 재벌 구조를 해체해야 한다는 비판론자이다. 이런 이분법은 물론 지나친 도식화라는 잘못을 범할 수 있다. 하지만 적어도 재벌 구조를 유지해야 하느냐 그렇지 않느냐는 점에서는 단순 명쾌한 구별법이다.

'재벌 체제 유지'를 가장 오른쪽이라고 본다면 공병호 자유기업센터 소장과 송병락 서울대 부총장, 좌승희 한국경제연구원장, 유한수 전경련 전무는 대표적인 우파 논객들이다. 공소장은 "재벌이 어째서 청산.척결의 대상인가. 기업가는 누가 뭐래도 애국심을 갖고 불철주야 노력하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정치꾼들은 어떤가. 국가를 위해 한 일이 무엇인가"라고 정권을 향해 직격탄을 날렸다.

경영학자들이 경제학자보다 더 옹호적
  송병력 부청장은 재벌 체제의 순기능을 강조하는 경영학자도. 그의 지론은 '하이에나론'. 하이에나는 사자와 맞붙을 때 절대 혼자 덤비지 않는다. 일본 기업이 재벌 해체 후 다시 그룹 체제로 뭉친 것도 세계 시장에서 미국과 경쟁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송부총장은 한국이 이나마 세계 경제에서 큰소리치는 산업을 거느린 비법 또한 그룹식 경영 때문인데 왜 갈가리 쪼개려 하느냐고 강하게 반박했다. 송부총장은 공식 용어인 '대규모 기업 집단'이라고 부르지 않고 감정적.선동적 용어인 '재벌'이라는 표현을 쓰는 자체가 마뜩치 않다.

 좌승희 원장과 유한수 전무는 재벌 체제의 우위를 강하게 인정하는 학자들이다. 특히 좌원장은 재벌 체제가 드리운 그늘을 법과 제도로 서서히 고쳐 재벌 스스로 변화하도록 유도해야 하는데, 지금 그렇게 진화하고 있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이들은 또 한국 경제의 위기를 부른 주범은 재벌이 아니라 정부의 지나친 개입으로 자율 경쟁과 책임에 바탕한 시장 경제 원리가 작동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이들보다 낮지만 우리 사회에는 친재벌적인(스스로는 친기업적이라고 주장한다) 학자가 상당히 많다. 특히 경제학자보다 경영학자들이 더 한국 경제에서 재별이 차지하는 기여도와 영향력을 인정해야 한다는 현실론을 펴는 것이 흥미롭다. 물론 이들이 재벌이 불러들인 폐해를 한사코 모르는 척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에 대한 해법은 사뭇 다르다. 정부가 나서서 개혁하기보다 재벌 스스로 개혁하도록 유도해야 한다는 방법론을 제시하는 것이 특징이다.

 김종석 교수(홍익대.경제학)가 좋은 예. "정부는 대기업들이 멸종 위기에 처한 줄도 모르고 변화를 거부하고 있기 때문에 국익을 위해 강제로라도 이들의 형태를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하지만 재벌들이 세상이 바뀌었다는 사실을 정부보다 모르고 있을까?"라며 정부가 기업의 생살 여탈권을 던져 버리기만 하면 재벌 기업 스스로 변화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김종석.정구현(연세대) 교수와 박세일 전 청와대 경제주석이 대표적 인사들이며, 한국개발연구원(KDI)의 상당수 박사들도 이 부류에 속한다.

 정태인 한국사회과학연구소 연구위원은 지난해 계간지 <동향과 전망>에서 한국 지식인 사회의 재벌에 대한 입장을 네 가지 부류로 나눈 적이 있다. 각각의 지향점에 따라 △막가파식 시장주의자 △합리적 시장주의자 △중도 진보주의자 △급진 좌파주의자로 분류한 것이다.

 사실 극단에 서 있는 시장주의자와 좌파주의자는 선명하게 색깔을 구별할 수 있다. 하지만 합리적이라거나 중도라는 딱지를 붙일 수 있는 논객들을 한묶음으로 엮는 일은 자의적이라는 공격을 받을 수도 있다. 재벌 옹호론에 가깝더라도 그 속에서는 인식이나 해법의 다양성이 존재하며 비판론자 진영에서도 마찬가지로 강도의 차이가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스펙트럼이 존재한다는 위험을 감수하고 중도 진보주의자로 꼽을 수 있는 학자들은 누구일가. 정운찬(서울대).정하성(고려대).김상조(한성대).강철규(서울시립대).김기원(방송대).전성인(홍익대).최정표(건국대) 교수와 김태동 대통령 자문 정책기획위원장, 이진순 한국개발연구원장 등을 이 부류에 넣을 수 있다. 이들은 시장주의자들로부터 '분홍빛'이라고 질타받는다. 현재 정부의 재벌 개혁 과정에서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는 인물들이라는 것도 특징이다. 김태동 위원장과 이진순 원장은 중경회에서 활동하며 김대중 대통령의 경제 브레인 역할을 했다. 장하성.감상조 교수는 재벌 사이에 '악명이 높은' 시민단체인 참여연대에서 각각 경제민주화위원장과 재벌개혁감시단장으로 활동하며 강하게 재벌 개혁을 부르짖고 있다.

 이들을 재벌 해체론자라고 부를 수 있을까. 현재의 재벌 구조를 타파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는 점에서 해체론자라고 볼 수도 있다. 정운찬 교수는 재벌 총수 한 사람이 좌지우지하는 재벌의 소유 구조를 바꾸지 않고는 한국 경제가 되살아날 수 없다고 주장하는 대표적인 학자다.

 장하성?김상조 교수는 총수의 전횡과 제2금융권 장악 같은 재벌의 지배.사업 구조를 확실하게 개혁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한치도 견해가 다르지 않다. 하지만 '포스트 재벌론'에 이르면 미세한 차이를 보인다. 장교수의 지향점은 미국식의 주주 자본주의에 가까운 반면 김교수는 독일식의 이해 관계자 자본주의가 우리에게 더 적절한 대안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김태동 위원장(성균관대학 교수.경제학)은 이들보다 강경론자로 비치는 것이 사실이다. 김위원장은 "그룹 안에서 황제처럼 군림하고 있는 재벌 총수라고 할지라도 경영 잘못에 책임을 지도록 해야 한다"라며 분명한 총수 책임론을 제기했다. 그는 나아가 개혁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사회 상층부를 교체해야 한다는 인적 청산론을 제기해 파문을 일으켰다.

"해체 후 국 · 공유화" 급진적 견해도
  물론 김위원장이 진보 진영으로부터 환영을 받는 '경지'에는 이르지 못했다. 김위원장 같은 중도 진보주의자들과 급진 좌파주의자들이 확실히 다른 점은 시장을 인정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있다. 물론 한국 사회의 급진론자들은 모두 재벌 해체론을 주장하지만 어떤 해체이냐에 따라 이들 사이에도 하늘과 땅만큼의 간극이 존재한다. 가령 민주노총은 시민 단체의 주장이 '침투'한 탓인지 재벌의 변신 형태인 독립된 전문 대기업 체제를 인정하고 있다. 시장 경쟁의 여지를 봉쇄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반면 진짜 급진주의자들은 소유 관계의 사회화, 사회적 조절 확대, 민주적 통제 등을 주장하고 있다. 다시 말해 재벌을 해체해 이것을 또 다른 자본가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국.공유 기업 형태로 만들어 노동조합과 사회가 기업을 일정하게 통제하자는 것이다. 이런 주장의 대표론자는 장상환(경상대).김성구(한신대) 교수. 이같은 주장이 공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지적도 있지만 김교수는 동의하지 않는다. "경재 위기 이후 워크 아웃 대상 기업에 행해진 부채의 출자 전환이 바로 사회적 통제로 연결될 수 있는 부분이다. 이것이 우리가 목도한 현실 아니었는가." 그는 김대중 정부가 미국식과 독일식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다며 안타까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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