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억‘갈길’찾는 회교 원리주의
  • 한종호 기자 ()
  • 승인 2006.05.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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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백년 빈곤·억압 벗어나자”… 새로운 ‘동서대립’ 요인 될 수도

 지난 2월26일 미국 뉴욕에 있는 세계무역센터 건물에서 발생한 폭탄테러 사건은 미국인들에게 많은 것을 생각케 해주었다.  그들은 자기네 안방마저도 더 이상 안전지대가 아니라는 사실에 경악했고, 사건의 배후에 이집트의 이슬람(회교) 원리주의자 압둘 라흐만이 있다는 사실에 다시 한번 놀랐다.  ‘원리주의의 비수가 마침내 자본주의의 심장을 겨냥하고 있다’는 식의 살벌한 논평이 언론에 쏟아져 나왔다. 

 바로 그 날 수십년 동안 원리주의와 전쟁을 치르고 있는 이집트의 수도 카이로 시내에 있는 한 카페에서도 폭탄이 터져 외국인들을 포함한 세 사람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리고 며칠 뒤 이집트 정부는 서양관광객에 대한 폭탄 테러 사건의 범인 49명을 재판에 회부했다.  범인들은 자기네가 압둘 라흐만이 이끄는 원리주의 조직 소속이라고 맑혔다.  그들은 미소 띤 얼굴로 코란을 펴든 채 법정으로 들어가면서 “회교 국가를 수립하는 날까지 투쟁을 멈추지 않겠다”고 외쳐댔다. 

 

“새 국제 질서에 가장 위협적 존재”

 그러나 이런 사건들은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그 저류에는 수백년 간의 정체와 식민주의, 빈곤과 억압에서 벗어나려는 이슬람 세계의 사활을 건 투쟁 의지가 있다.  지금 이슬람세계에는 엄청난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세속주의를 배격하고 ‘가장 이슬람적인 것’을 추구하는 듯하면서도 막상 가까이 가보면 여러 갈래의 개혁 노선으로 나뉘어지는, 이른바 원리주의 운동이 10억 무슬림(회교도)을 사로잡고 있는 것이다.

 이같은 움직임에 대해 미국 등 서방측은 우려를 감추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사회주의가 몰락한 뒤로 새로운 국제 질서를 만들어가는 데 가장 위협적인 존재로 이슬람 원리주의를 꼽는다.  이는 어쩌면 1천여년간 이어져 온 기독교와 이슬람 문명 간의 대립 역사 가운데 일부인지도 모른다.  영국의 권위지《이코노미스트》는 20세기를 특징지은 동서냉정을 대신하는 새로운 동서대립으로 21세기가 점철될 것이라는 우울한 전망을 제시한 바 있다.

 원리주의(fundame-ntalism)라는 말은 원래 1차대전 직후 미국 사회를 휩쓴 자유주위적 모더니즘 경향에 반발하여 성서의 완전한 무오류성과 개인적 구원을 강조하고 나선 보수적 기독교복음주의 운동을 가리키는 말 이다.  아랍어에는 아예 원리주의라는 말이 없다.  이 용어는 서방 언론이 70년대 말 이란에서 호메이니를 중심으로 전개한 반정부 회교 운동을 가리켜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서방측, 특히 서방 언론에서는 뭔가 과격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회교도들의 움직임에는 ‘원리주의’라는 딱지를 붙이기 시작했다.

 

기존 서구 문물 배격한다는 생각은 오해

 그러나 이슬람 원리주의는 기독교 원리주의와는 몇가지 점에서 매우 다르다.  말레이시아의 인권 운동가 찬드라 무자파씨는 “기독교 원리주의와 회교 원리주의의 가장 중요한 차이는 전자가 개인적 구원을 추구하는 반면 후자는 사회 개혁을 지향한다는 점이다”라고 기고문을 통해 주장했다.  이에 따르면 기독교 원리주의는 교회의 사회적 역할을 부인하고 개인의  구원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오히려 전통적 회교 보수주의와 유사하다.  원리주의 세력이 기존의 모든 서구 문물을 배격한다는 생각도 그 같은 오해 가운데 하나이다.  가령 알제리의 회교구국전선(FIS) 지도자들은 사법부독립, 표현의 자우, 법의 지배 등 서구의 자유주의적 가치관을 신봉하며 과학 기술과 이슬람이 공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대개 급진적 원리주의 조직의 배후에는 이란이 있다고 믿으려 한다.  시카고 대학의 메인 조니스 교수(국제정치경제)는, 이 같은 생각이 다소 과장된 것 이라고 지적한다.  호메이니가 집권한 이후 14년이 지난 지금 이란 경제는 침체에 침체를 거듭하고 있다.  조기 결혼과 피임 금지로 인구는 2천8백만명(79년)에서 6천만명(92년)으로 폭증했지만 경제력은 뒷걸음질을 계속하고 있다.  이란 위협론자들 이 생각하는 것처럼 이란에는 팽창주의적 정책을 펼 만큼 여유가 없다.

 무엇보다도 이란 스스로가 변화의 도정에 들어서 있다.  미국인 인질 테리 앤더슨(AP통신 기자)을 석방해준 것이나 걸프전 때 중립을 지킨 것도 그런 변화의 징후 가운데 하나이다.

 또 한가지 중요한 것은 이슬람 개혁 운동의 새로운 추세(상자 기사 참조)에 서방측이 별다른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일부에는 여전히 급진행동주의가 남아 있지만 새로운 국제 환경에 적용하기 위한 정치?경제적 실험은 뚜렷한 대세를 형성하고 있다.

 이슬람권의 변화에 대응하는 서방측의 전FIR은 크게 두갈래로 나뉘어진다.  첫째는 냉전시대의 사회주의 봉쇄 전략처럼 회교원리주의 세력을 탄압하는 정권을 지원하는 것이다.  미국 역대 정권은 이런 점에서 일관성을 유지해 왔다.

 부시 행정부는 카터 행정부가 이란에 대해했던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이슬람권을 대했다.  또 91년 옛 소련이 해체된 뒤 중앙아시아에서 이슬람 원리주의가 대두하자 미국은 옛공산당 엘리트의 권력을 온존시키는 쪽을 택했다.  베이커 전 국무장관은 세번에 걸쳐 중앙아시아를 방문했지만 한번도 원리주의 지도자와는 만나지 않았다.

 88년 다원주의를 도입한 알제리에서 원리주의 세력이 쿠데타로 탄압받자 미국은 민주화가 중단된 데 대해 ‘유감의 뜻’을 표하긴 했지만 곧 침묵했다.  이는 천안문 사건이나 페루에서 후지모리 대통령이 헌정을 중단한 사태에 대해 신속히 대응한 것과 는 대조돼는 것이다.

 클린턴 행정부도 예외는 아니다.  미국은 유럽 내륙부에 ‘통일된 회교 국가’가 출현하는 것을 원치 않는 서유럽 지도자들을 의식해서인지 보스니아 회교도 지원을 꺼리는 미국의 반이슬람 정책에 대해 원리주의자들이 항의 표시로 자행한 것이라고 이해되고 있다. 

 미국이 이슬람의 민주화에 냉담하거나 무관심한 이유는 옛 소련 및 동유럽의 민주화 운동과는 달리 이슬람의 민주화 운동은 기본적으로 반미적 색깔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온건론자들은 그럴수록 서방측이 14년전 이란 혁명 이래 지속되어 온 대결의 역사에 집착하기보다는 이슬람의 요구와 그 잠재력에 눈을 돌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민주주의?다원주의 속으로 끌어들여야

 이들이 내놓는 대안은 “2천년 동안 서방세계에 뿌리 내린 민주주의와 다원주의 속으로 개혁의 실험대에 올라 있는 동방 세계를 끌어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미국 및 서유럽 정부가 알제리 군사 정권에 대한 지원을 중단하고 회교 정부 수립을 가져올 수도 있는 선거 결과를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책임이 서방측에 있는 것만은 아니다.  파키스탄의 야당 지도자 부토 여사가 이슬람과 사회주의 그리고 민주주의를 혼합한 이슬람사회민주주의를 제시하자 원리주의자들은 “이슬람에는 목발이 필요 없다”고 응수했다고 한다.  이슬람의 교의만으로 충분하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회교 원리주의는 아직 체계화된 개혁 운동 수준에 이르지 못한 상태이다.  김정위 교수(한국외국어대학교?이란에)는 “원리주의의 가장 큰 결점은 경제 체제에 대한 분명한 대안이 없다는 점이다”라고 말했다.  원리주의가 자본주의도 사회주의도 아닌 제3의 길로 10억 회교도를 인도할 수 있을 것인지 좀더 지켜봐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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