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에 투영된 마음의 고요
  • 박영택(미술 평론가 · 경기대 교수) ()
  • 승인 2006.05.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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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혜선 전>/반지·거울 등으로 작가의 감정과 언어 은밀히 표현

 
오브제들은 단색의 밝고 투명하며 반짝이는 속성을 지닌 지극히 일상적인 물질들이다. 그것들은 매끈하게 마무리된 정제와 최소한의 가공을 거쳐 적조한 자태를 지니고 침묵과 부재, 응시와 관조 사이에 섬처럼 놓여 있다. 그 위로 정밀(靜謐·고요하고 편안)함과 긴장감이 서리처럼 내려앉아 있다. 작가는 그 사물들을 통해 예술의 감각적이고 정서적인 지도를 만들었다. 사물을 빌어 감정과 언어를 은밀하게 드러내는가 하면 상상하게 하고 추리하게 했다. 작업은 반지, 양동이, 거울, 크리스탈, 유리 컵, 작은 다이아몬드들이 실루엣과 같이 예민하며 단순한 선과 작은 문자들과 어우러져 있다.

각각의 사물들은 전시 공간에 적당한 거리를 갖고 떨어져 있다. 그래서 그 사물 하나하나를 징검다리 삼아 작가의 감정과 의식의 내부로 미끄러져 간다. 예를 들어 <약속>이라는 제목을 단 커다란 반지는 전시장 바닥에 놓여있다. 서약과 맹세, 믿음의 상징인 반지가 쉽게 들 수도, 손가락에 낄 수도 없게 너무 크고 무겁게 제작되었다. 이 대형 반지는 약속의 무거움을 뜻하며 각인된 약속의 여러 의미를 새삼 되새겨 보게 한다. 불멸할 것 같은 약속들은 시간과 세월의 흐름 속에 쉽게 망각되고 퇴색한다. 마음속에 영원토록 무겁게 각인될 수 있는 그런 반지는 없을까?

지극히 섬세한 마음과 감정을 다룬 작업들은 특히 <흘리지 못한 눈물>이라는 제목의 작업에 잘 드러나 있다. 크기가 다른 크리스탈들이 화면에 촘촘히 부착되어 있는데 그 크리스탈에는 각각 ‘그래’, ‘괜찮아’라는 문구가 매우 작은 글씨로 쓰여 있다. 삶을 견디는 주문 같은 문장은 더없이 화려하고 투명한 크리스탈의 저 안쪽에 은밀하고 고요히 자리잡고 있다. 그것들은 마치 작가의 눈물처럼 혹은 마음의 결정들처럼 매달려 있다. 자신의 감정들이 보석처럼 보였으면 하는 바람이자 일상에 지치고 힘겨운 자신을 다독거리는 반복적인 중얼거림, 자기 최면 또는 부적이나 주술, 치유에 해당하는 것 같다. 행복과 불행 그 사이 어디에선가 그저 자신을 견디면서 살아가는 일이 삶은 아닐까? 

자화상에 해당하는 작업들 중의 하나로 커다란 유리판에 에칭(etching) 선으로 작가 자신의 몸을 그려 넣은 것이 있다. 치마를 입은 채 직립하고 있는 자신의 하반신이다. 구두는 바닥으로부터 약 10cm 정도 떠있다. 현실에서 발이 떨어져 있는 존재를 표현한 것이다. 사람들은 늘상 자신에게 세상 물정을 잘 모른다고, 현실감이 없다고들 한다. 해서 “그래 아마 난 세상을 모르나 봐, 현실감이 없나 봐”라고 혼자 중얼거리고 인정해 본다.

작품 전체에 ‘응시의 차분함’ 서려 있어

황혜선의 작업에서는 공통적으로 아련하고 조심스레 드러나는 이미지들, 명확함과 거대한 규모가 아닌 작고 흐릿하고 적조한 것들, 손상되기 쉬운 재료들, 투명하고 가볍고 반짝이며 침묵과 적조함으로 절여진 것들이 한없이 낮은 목소리로 말한다. 그것은 있음과 없음 사이에 있고 이미지이면서 문장이고 보는 것이자 동시에 의식하는 것, 생각이자 물질이며 매우 사적이면서 보편적이다.

 
황혜선의 유일한 영상 작업에는 <바람의 무게>라는 제목이 달려 있다. 작가의 모든 제목은 시적이며 문학적 감수성으로 충만하다. 나는 그녀의 독서 편력을 유추해본다. 작은 모니터에는 탁자 위, 모서리 근방에 놓인 물이 담긴 유리컵만이 놓여 있다. 관자로 하여금 그 장면만을 오랫동안 응시하게 한다. 찻잔 속의 물은 약간씩 출렁이다가 이내 잔잔해지고 곧이어 다시 출렁이기를 반복한다. 흔들려보았자 컵 안의 물이라는 얘기다. 나로서는 이 작업에서 그녀의 작업 전체를 관통하는 놀라운 견인력과 응시의 차분함, 적멸의 상황성 같은 것들을 떠올려 본다.

불교에서는 마음이 움직이지 않을 때, 생각이 끊어질 때 모든 것이 아름답다고 말한다. 모든 것은 있는 그대로 진리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움직이지 않은 마음’에서 온다. 산스크리트로 그것을 사마디(Samadhi), 즉 삼매라고 부른다. 감정이나 외부의 조건은 항상 일정하지 않아서 언제나 변하기 마련이다. 그때마다 중심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따라서 가장 중요한 것은 순간순간 움직이지 않는, 흔들리지 않는 마음을 갖는 것이다. 무엇을 하든 단지 ‘그것을 할 뿐’이다.

황혜선 역시 단지 살아갈 뿐이고 그 살아가는 과정에서 겪어낸 모든 것들을 이미지화, 물질화할 뿐이다. 그래서 그녀의 작업은 자신이 살면서 만나는 모든 행복과 불행에 대한, 이 세상의 가치와 믿음과 자기 존재의 성찰에 대한 수행이다. 

<황혜선전>은 6월1일까지 포스코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다. 문의 02-3457-16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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