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찍과 당근으로 국경 지킨다
  • 워싱턴· 정문호 통신원 ()
  • 승인 2006.05.26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부시, 불법 월경 ‘원천 봉쇄’ 나서…히스패닉 ‘표심’ 달래기에도 열심

 
인종 문제와 함께 미국을 괴롭혀온 최대 이슈는 단연 불법 이민자 문제다. 특히 장장 3천2백km에 걸쳐 멕시코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미국으로서는, 물밀 듯 몰려오는 남미 출신 불법 월경자들에 대해 물리적인 단속 외에 달리 뾰족한 묘책을 찾지 못해 고민하고 있다.

2001년 ‘9·11 테러’ 사태 이후 국경 지역의 검문·검색이 대폭 강화되었음에도 불법 월경자들의 미국행은 줄어들지 않고 있다. 특히 광활한 사막 지역의 특성상 미국 국경순찰대의 경비가 허술한 것으로 알려진 캘리포니아·애리조나·뉴멕시코·텍사스 주 접경 지역에는 섭씨 40~50도에 달하는 살인적인 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미국행을 위해 사투를 벌이는 불법 월경자들의 행렬이 끊이지 않고 있다. 지난해 10월 이후 애리조나 주의 사막을 넘으려다 불볕 더위 때문에 사망한 불법 월경자만 17명에 달했다. 최근 미국 상원에서는 이미 미국에 들어와 있는 불법 체류자들을 구제하려는 움직임이 본격화하고 있지만, 이들 접경 지역에 사는 미국인들을 포함해 보수계 인사들은 불법 이민자들을 추방하라고 난리법석이다.
 
이런 가운데 부시 대통령이 최근 불법 이민자들의 단골 월경 경로로 꼽히고 있는 애리조나 주 최남단 유마 접경 지역을 방문해 국경 검색 강화 방안을 내놓았다. 부시가 제시한 방안의 핵심은 현재 1만2천명에 달하는 국경순찰대 인력을 6천명 더 충원하고, 멕시코 접경 지역에 첨단 경비시설을 확충하겠다는 것이다. 또 애리조나 유마 지역을 포함해 경비가 허술한 멕시코 접경 지역에 약 5백90km에 달하는 삼중 철조망을 설치해 불법 월경자들을 원천 봉쇄할 작정이다. 이를 위해 부시는 의회에 19억 달러의 긴급 예산을 요청했는데, 상원은 그중 철조망 설치안을 통과시켰다. 의회의 승인이 떨어지면 이르면 6월부터 주정부군 6천명이 차출되어 국경 지대에 투입된다. 앞서 미국 하원은 지난해 12월 1천km가 훨씬 넘는 철조망 설치안을 압도적 찬성으로 통과시킨 바 있다.

이같은 조처에 대해, 가장 많은 불법 월경자를 배출하고 있는 멕시코는 물론 과테말라, 온두라스, 니카라과, 코스타리카 등 중남미 나라의 외무장관들은 일제히 미국 정부에 항의 의사를 전달했다. 자칫 월경자들 단속 문제가 국제 외교전으로 비화될 양상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사실 불법 미국행의 주된 통로 역할을 해온 미국 남부 멕시코 접경 지역의 실태를 살펴보면 불법 이민자 문제는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음을 보여준다. 미국 국경 순찰대가 해마다 체포하는 불법 월경자는 1990년대 이후 100만 명을 넘기고 있다. 미국은 지난해 약 1백20만명을 체포해 대다수를 멕시코 등 본국으로 송환했지만, 미처 검거하지 못한 월경자도 약 50만명에 달했다. 미국행을 시도한 불법 월경자 중 거의 절반 가량을 놓치고 있는 셈이다.

갈수록 국경 검문이 강화되면서 불법 월경자들을 안전하게 미국 내 거점으로 안내하는 브로커들(현지에선 이들을 ‘코요테’로 부른다)이 활개를 치면서 이들이 요구하는 몸값도 천정부지로 오르고 있다. 1인당 적게는 1천5백 달러에서 많게는 1만 달러가 넘는다고 한다. 본국에서 주급 몇 달러에 연명하던 대다수 불법 월경자들에게는, 엄청난 액수이지만 미국행만 보장한다면 전 재산을 털어서라도 코요테에 의지하는 딱한 사람들이 지금도 줄지 않고 있다.

지난해 불법 월경자 1백20만명 체포

설상가상으로 미국 국경순찰대가 체포해 임시 구치소에 보호 중인 불법 월경자가 수용한계를 넘어서면서 풀어준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법원의 출두 명령을 거부한 채 불법 체류하는 일도 생기고 있다. 미국 이민 당국의 통계에 따르면, 이처럼 출두 명령을 거부하고 미국에 눌러앉은 불법 월경자가 지난해 말 현재 10만여 명에 달한다.
 
 
현재 미국 내에는 이처럼 불법으로 멕시코 국경 또는 다른 경로로 거쳐 들어와 눌러앉은 이민자들이 약 1천2백만 명에 달한다. 이들은 미국 사법 당국의 묵인 아래 미국 내 각지에서 불법 취업해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 특히 이들 불법 체류자들의 90% 이상이 멕시코인이다. 미국 인구통계국에 따르면 미국 내 히스패닉 가구는 지난해 말 현재 4천만명을 넘어선 것으로 추산되었다. 흑인 인구를 추월한 상태다.

특히 이들 가운데 77%가 미국이 아닌 외국에서 태어난 사람들이라는 사실은 이들 상당수가 불법 체류자임을 시사한다. 한마디로 미국 내에서 인구가 가장 급속히 늘고 있는 소수계 민족이 바로 히스패닉이며, 이들 가운데 합법적으로 체류하며 투표권을 가진 사람도 무려 1천2백만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미국에서 대통령 혹은 국회의원이 되려는 사람이면 누구도 무시 못할 막강한 정치 파워인 셈이다.
 
불법 이민자 처리 문제가 미국 정가의 최대 이슈로 떠오른 것도 따지고 보면 올 가을 중간선거를 앞두고 이들 히스패닉 유권자들의 표심이 어떤 식으로 요동칠 것인가에 대한 관심 때문이다. 오는 11월 치러지는 중간선거는 연방 하원의원 전원과 상원의원 3분의 1을 새로 뽑기 때문에 공화·민주 양당은 앞으로 선거 정치의 최대 변수가 된 히스패닉 표심을 잡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판국이다. 특히 기름값 폭등에다 이라크 전쟁 후유증, 여기에 부시 행정부 핵심 인사들의 정치 스캔들로 인해, 가뜩이나 정치적으로 어려운 공화당으로서는 이민 문제를 잘못 다룰 경우 지금까지 장악해온 상·하원 모두를 민주당에게 내줄 판이다.
    
미국인 대다수 ‘친이민 법안’ 찬성

공화당 수장 격인 부시 대통령이 최근 애리조나 주 유마 지역을 순방한 것도, 한편으로는 국경 경기 강화 방안을 내놓아 국내 보수파들의 표심을 달래고, 다른 한편으로는 히스패닉계 표심을 의식해 현재 상원에 계류 중인 이민 개혁 법안의 조속한 통과를 호소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법안에 따르면, 이른바 초청 노동자 프로그램을 대폭 확대해 숙련공이든 비숙련공이든 가리지 않고 매년 수십만 명씩 받아들이며, 합법적인 이민자 숫자를 현행 100만명 선에서 2배 정도로 대폭 늘린다.

특히 이 법안은 몇 년씩 불법 체류해온 수백만 이민자들에게 일정액의 벌금을 내되, 영어를 배우며, 고용주가 고용 증명을 확인할 경우 영주권은 물론 시민권 자격을 딸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다.

그러나 아직도 상원 내 일부 보수파 공화당 의원들은 이런 식의 법안이 사실상 불법 이민자들에 대한 ‘사면’이나 마찬가지라며, 극력 반발하고 있다. 설령 상원 안이 통과되더라도 하원은 모든 불법 체류자들을 ‘범법자’로 간주하는 것은 물론, 이들을 고용한 고용주도 처벌하도록 한 반이민 법안을 지난해 12월 통과시킨 바 있어 앞으로 양측 안을 절충하는 데 상당한 진통을 겪을 전망이다.
 
현재 불법 이민자 문제와 관련해 대다수 미국인들은 상원의 친이민 법안에 찬성하고 있다. 뉴스전문 케이블 방송 CNN가 최근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불법 월경자 단속을 위한 국경 검색 강화 방안에 열명 중 여덟 명 가까이가 지지했다. 미국인들 대다수는 또한 외국인들이 법을 어기고 미국 땅을 밟거나 미국에서 체류하는 데 대해서는 반대의사를 분명히 했지만 일단 미국 땅을 밟은 불법 체류자들의 경우 상원이 제시한 이민 개혁 법안에 대해 찬성을 표시했다.

특히 미국인들은 현실적으로 불법 이민객들 상당수가 미국인들이 가장 기피하는 더럽고 어려운, 이른바 ‘3D' 업종에 종사하며 미국 경제에 기여하고 있다고 평가해 관심을 끈다. 이런 여론이 올 가을 중간선거를 앞두고 상·하 양원의 절충안 마련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미국 정가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