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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사와 함께 비난받는 ‘어둠의 자막 도사’들

취미로 희귀 외화·드라마에 자막 입혀 공유하는 사람 늘어

차형석 기자 · 김회권 인턴기자 ㅣ cha@sisapress.com | 승인 2006.08.25(Fri) 18:3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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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저널 안희태
외국 영화·드라마 커뮤니티는 대개 자막팀을 운영한다. 이들이 만든 ‘아마추어 자막’ 영화를 보는 장면.
 
 
자막 제작 네티즌 : “자막이 나오려면 몇 시간 더 기다려야겠다. 내일 다시 와라!”
원숭이들 : “꺄악. 약속이랑 다르잖아. 장난하냐. 아침부터 눈팅하고 있다.”
자막 제작 네티즌 : “그냥 접고 며칠 푹~쉬어야겠다.”
원숭이들 : “형! 하루야 금방 가죠.”

인터넷에서 유행하는 ‘조삼모사(朝三暮四) 패러디’ 가운데 ‘자막편’이다. 네티즌 사이에 동영상 다운로드와 ‘자막 문화’가 얼마나 활성화했는지 엿볼 수 있다.
자막은 말 그대로 외국 드라마·영화 등에 우리말 대사를 입힌 것을 일컫는다. 그런데 최근 인터넷으로 누구나 동영상을 쉽게 내려 받을 수 있는 시대가 열리면서 직업이 아닌 취미로 자막을 제작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한 잡지사에 근무하는 최기호씨(가명·30)는 직장 동료들로부터 ‘자막 도사’로 통한다. 희귀 영화와 고전 영화 전문이다. 지난해 중순부터 미국이나 영국의 희귀 영화·드라마의 대사를 번역하고 자막을 입혀 동료들과 ‘공유’하고 있다. 회사에 다니면서 시간이 날 때마다 틈틈이 자막 작업을 한다.

시작은 단순했다. 보고 싶은, 그러나 한국에서 찾기 힘든 영화를 보고 싶어서였다. 토머스 모어의 일생을 다룬 1960년대 영국 영화에 대한 정보를 인터넷에서 보았는데, 한국어판으로 출시된 비디오를 찾기 힘들었다. 그래서 이른바 ‘어둠의 경로’에서 ‘무자막 버전’과 ‘영문 자막 대본’을 찾았다.

   
  <조삼모사 패러디 자막편>.  
 
어려운 대사에는 일일이 주석 달기도

최씨는 영문 대본을 해석해가며 홀로 영화를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됐다고 한다. ‘나만의 자막을 갖고 싶다.’ 단순히 해석만 할 것이 아니라 상황에 맞게 ‘대화 맛’과 뉘앙스를 살리고, 역사적 맥락이나 문화적 맥락이 있는 대사에는 일일이 주석을 붙이는 그런 자막.

실제로 그는 자막 작업을 할 때 ‘원 소스’ 분석 작업을 많이 한다. 한 공상과학(SF) 영화 자막을 입히면서는 원작이 된 소설을 꼼꼼히 읽었다. 인터넷에서 구한 다른 ‘재야 자막가’의 ‘자막 작품’은 우주선 이름을 사람 이름으로 번역해놓는 등 문제가 있어 보였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부분에는 연관 정보를 주석처럼 달기도 했다. 본영화에는 담겨 있지 않은 정보를 보너스로 제공한 셈이다. 일차 작업이 끝난 뒤에도 최씨는 문화적 맥락이나 역사적 맥락을 몰라서, 아니면 오역으로 생긴 문제점을 계속 수정한다. 이렇게 자막 작업을 끝내고 지인들에게 자신의 자막 작품을 나누어주었는데, 공식 DVD는 그로부터 3~4개월 후에 출시되더란다. 그는 DVD의 자막보다 자신의 자막이 더 낫다고 확신한다.

‘어둠의 자막 제작자’로 나선 최씨가 보기에 자막을 제작하려면 우선 인터넷에 밝아야 한다. 특히 최씨처럼 희귀 영화나 드라마에 자막 붙이는 것을 취미로 여기는 사람에게는 ‘원 소스’를 인터넷 서핑으로 찾아내는 작업이 중요하다.

다음은 인내심이다. 인터넷에서 ‘희귀’ 영화와 드라마 시리즈를 다운받으려면 시간이 무척 많이 걸린다. 영국 드라마 시리즈를 몇 달에 걸쳐 다운로드받은 일도 있다. 야금야금 전송되는 데이터를 보면서, ‘세월을 낚는 기분으로’. 그리고 여기에 인터넷에 널려 있는 자막 제작 프로그램을 쓸 수 있을 정도의 컴퓨터 실력이면 충분하다.

집에서 혼자, 혹은 동호회에서 작업해

어학 실력은 그 다음이다. 최씨는 외국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서 대사를 바로바로 받아적는 딕테이션(Dictation) 작업을 하지 않는다. 그가 보기에 그런 작업은 현지에 사는 사람처럼 ‘어학 최고수’들만 할 수 있는 일이다. 대신 최씨는 영문 자막을 다운받아 번역한다. 비영어권 영화도 영문 자막 스크립트가 있기 때문에 중역하면 된다. 또 영문 대본 가운데는 해당 화면과 자막이 나오는 시간대를 일치시켜놓는 ‘싱크(Synchronization) 작업’이 끝난 경우가 많기 때문에, 자막 프로그램을 켜놓고 영문 대본을 한글로 번역만 하면 된다(최씨 자신이 직접 싱크 작업을 해보았는데, 시간이 상당히 많이 걸렸다고 한다). 그렇게 휴일을 꼬박 바쳐, 남들이 보기 힘들었던 영화에 자막을 입히면 “기분이 좋아진다”라고 그는 말했다.

최씨가 혼자 활동하는 자막 제작자라면, 김정아씨(가명·28)는 팀 플레이를 한다. 게임 회사에 근무하는 김씨는 3년째 한 미국 드라마 동호회에서 활동하고 있다. 주로 미국의 수사물을 다룬다.

김씨가 속한 동호회 자막팀에는 대략 40명이 활동하고 있다. 의사, 학생, 교사 등 직업도 다양하다. 팀 플레이를 할 경우에는 역할 분담이 확실하다. 딕테이션→싱크→번역→번역 수정→한글 교정을 거친다. 딕테이션 3인, 싱크 4인, 번역 수정 4~5인, 한글 교정 5~6인. 나머지는 번역을 담당한다.

   
  아마추어 자막 제작자들은 같은 외국 드라마의 인지도를 높이는 데 자신들이 만든 자막이 도움이 되었다고 말한다.  
 
혼자서 자막 작업을 할 경우와 여럿이 팀 플레이를 할 때 차이는? 속도 면에서는 혼자서 하는 것이 빠르다. 팀 플레이를 하면 서로 자막에 대해 의견 조율을 해야 하니까. 드라마 한 편에 자막을 입히는 데 대략 1주일이 걸린다. 번역의 정확성은 팀 플레이가 앞선다. 자막팀에 다양한 직업군이 들어와 있기 때문에 전문 분야를 자문할 수도 있고, 방송물 심의위원회가 하는 것처럼 ‘내부 검열’에서 비속어는 적절히 걸러낸다.

김씨가 ‘어둠의 자막계’에 뛰어든 첫 번째 이유는 우선 영어에 관심이 많아서다. 그런데 막상 자막 작업을 하고 나니까 우리말 표현력이나 어휘력이 훨씬 좋아졌다고 그는 느낀다. 아무래도 영어 단어에는 있는데, 우리말에는 없는 단어를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고민하는 시간이 많아져서이다. 두 번째 이유는 미국 드라마를 기다리기 힘들어서였다. 지금이야 웹에서 한 에피소드가 끝나면 동영상이 바로 올라오지만, 그 전에는 한 시즌이 끝나야 동영상이 올라왔다. “기다리기 싫어서 내가 직접 해보자고 나섰다”라고 김씨는 말한다.

“좋아서 할 뿐, 상업적 욕심 없다”

자기 시간을 쪼개서 자막을 올리는 이들이 가장 뿌듯할 때는 감상 게시판을 읽을 때다. ‘재미있게 봤어요’라는 글 하나에 보람을 느낀다. 특히 자신이 번역한 대사를 다른 네티즌이 명대사라고 칭찬하는 글을 올릴 때. 가장 스트레스를 받을 때는 회원들이 ‘자막 독촉’을 할 경우다. ‘조삼모사 패러디 자막편’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니다.

‘어둠의 자막계’는 영미권과 일어권으로 양분된다. 박희진씨(가명·30)도 한 ‘일본 드라마 클럽’ 자막팀의 부팀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직장을 다니면서 통역대학원에 진학하기 위해 일어과 학부를 다시 다니는 만학도이다. 그가 자막팀에 들어간 이유도 다른 ‘자막 메이커’들과 비슷하다. 2000년 일본에 어학 연수를 1년간 갔다가 일본 드라마에 푹 빠졌다. 홈 드라마, 의학물, 추리물 등 장르가 다양했다. 청각 장애인이 주인공인 드라마가 있는가 하면, 중년 여성 연기자들이 발레를 하는 드라마도 있었다. 2년 전, 인터넷으로 일본 드라마를 다운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난 뒤부터 박씨는 자막을 만들기 시작했다.

박씨도 철저하게 팀 중심으로 움직인다. 일단 어떤 드라마가 방영될지 예고편을 보고 자막을 입힐 드라마를 정한다. 일본 드라마는 영어와 달리 딕테이션 과정이 없다. 들으면서 바로 번역한다. 일본 드라마 한 편에 자막을 입히는 데 이틀 정도 걸린다. 자막팀에서 선점한 드라마를 개인이 먼저 자막을 만들어 올리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 다른 사이트에서 자막 제작자 동의 없이 자막을 퍼오는 것도 안 된다. ‘어둠의 자막계’ 룰이다.
때로 케이블 방송사에서 일본 드라마의 판권을 구입해 방영할 경우 드라마 동영상과 자막을 내려달라고 요청해오곤 한다. 예를 들어 장애인 드라마였던 <1리터의 눈물> 작품. 요청이 들어오면 바로 삭제한다. “어차피 일본과 동시간대에 라이브로 하는 것이 아니라 몇 개월이나 몇 년 지난 드라마를 들여오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삭제해도 크게 상관없다. 이미 회원들 대다수가 봤기 때문에.”

   
  아마추어 자막 제작자들은 <춤추는 대수사선> 같은 외국 드라마의 인지도를 높이는 데 자신들이 만든 자막이 도움이 되었다고 말한다.  
 
‘재야의 자막 고수’들은 상당히 적극적인 문화 소비자들이다. 청각 장애를 가진 네티즌을 위해 한국 영화나 한국 드라마에 한글 자막을 입혀 올리는 자막 메이커들도 있었다. 이들은 자막 작업을 ‘정보를 찾고 이를 나누면서 자기 만족을 얻는 취미 활동’으로 여겼다. 같은 취미에 열광적인 관심을 보이는 일종의 ‘하비 홀릭족(취미를 뜻하는 Hobby와 광적이라는 의미의 Holic을 합한 신조어)’에 가깝다.

자막 만들기 자체에 즐거움을 느낀다는 김정아씨는 ‘프로 자막’의 세계로 갈 생각이 전혀 없다. “모두들 상업적으로 하는 것은 반대한다. 케이블 방송사나 공중파에서 미국 드라마 방영이 늘어나면서 자막 수요도 증가하겠지만 그쪽에 참여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이건 좋아서 하는 취미이다.”라고 그는 잘라 말했다.

최신 문화를 적극적으로 소비하는 아마추어 자막 제작자들에게는 다른 취미에서는 찾기 힘든 아킬레스 건이 있다. 역시 저작권 문제이다. 불법 동영상 다운로드와 관련한 저작권 문제는 어떻게 생각할까? 김정아씨는 이렇게 말했다. “솔직히 자막이 미국 드라마를 대중화하는 데 일조했다고 본다. 커뮤니티가 활성화하면 드라마의 인지도가 높아지니까. 방송사도 마찬가지다. 한 방송사는 미국 드라마를 방영하면서 우리 커뮤니티를 홈페이지에 링크해놓기도 했다.” 김씨는 또 공중파에서 방송된 드라마 성우들과 미팅을 하기도 했다며, 방송사가 자신들이 활동하는 것을 금전적 손해로 여기기보다는 오히려 이익을 얻고 있다고 판단하는 듯하다고 말했다.

아마추어 자막 제작자들은, 저작권을 침해하는 것을 용이하게 했다는 비난과 미국이나 일본 드라마의 인지도를 높이는 데 일정한 역할을 했다는 찬사를 동시에 받는 이중적 지점에 서 있었다. 새로운 문화를, 새로운 방식으로 전파하는 ‘문화적 전위’들이 겪는 숙명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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