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 젖은 빵이 보약이었다
  • 송재우(메이저 리그 해설자) ()
  • 승인 2006.09.04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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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신수·백차승·류제국, 빅 리그 진출 ‘시련과 도전의 기록’
 
1994년 박찬호의 등장으로 불어온 메이저 리그 열풍, 어느덧 10년을 훌쩍 넘어 인기 스포츠로 확고히 자리를 잡고 있다. 1996년 박찬호가 메이저 리그 첫 승을 거두고 그 이듬해부터 붙박이 선발로 굳어지면서 어린 후배 선수들은 메이저 리거를 꿈꾸며 미국으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그런 선수들로는 김병현, 김선우, 서재응, 최희섭과 같은 이들을 꼽을 수 있다. 굳이 나누자면 이들 선수들은 진출 1세대 선수로 볼 수 있다.

이런 흐름은 2000년대 초반까지 이어졌지만 2002 시즌 후 동의대 출신의 정성기를 마지막으로 수년간 진출의 맥이 끊어졌었다. 그나마 올 시즌 광주 진흥고의 정영일이 다시 진출하여 관심을 끌고 있다.
어떤 이유든 더 이상 미국 무대에 남아 있지 않은 선수를 제외하고 1세대 중 박찬호, 서재응이 부상자 명단에 오른 가운데 현재 메이저 무대에서 모습을 보이는 선수로는 김병현이 유일하다. 하지만 이제 미국 진출 2세대라 할 수 있는 추신수, 백차승, 류제국이 선을 보이고 있다.

이들 중 최근 가장 관심을 끄는 선수는 추신수이다. 최희섭에 이어 코리안 메이저 리거 타자로는 2호로 지난해 메이저 리그 무대를 밟은 선수이다. 이미 부산고 재학 시절 투타를 겸비한 야구 수재로 관심을 모았고 메이저 리그 스카우트 관심을 끈 것은 1999년 세계청소년야구선수권 대회의 맹활약 때문이었다. 사실 당시 추신수는 대표팀의 에이스로 1백50km 이상의 강속구로 이름을 떨쳤지만 시애틀 매리너스와 타자로 계약을 해 세인들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메이저 리그 기준으로 1백80cm의 신장이 투수로는 작다는 판단이었고 타자로의 재능도 훌륭하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추신수는 지난해 데뷔했지만 시애틀에서 이렇다 할 기회를 잡지 못했다. 그러던 지난 7월 클리블랜드로 트레이드되어 젊은 팀을 표방하는 팀 컬러와 맞아떨어지며 이적 후 3할이 넘는 맹타를 휘두르면서 내년 시즌 주전의 꿈을 키워가고 있다.

역시 부산고 출신으로 2년 선배인 백차승은 고교 시절 1백50km에 육박하는 빠른 공을 구사하며 ‘제2의 선동렬’로 각광받다 1998년 시애틀 매리너스와 계약을 맺으며 진출했다. 초반 마이너 리그에서 기세 좋게 나가다 ‘토미 존 수술’로 불리는 팔꿈치 인대 이식 수술을 받으며 주춤했다. 2004 시즌 후반 메이저 리그에 데뷔하며 기대를 모았지만 지난해 어깨 부상이 발발하며 선발 경쟁에서 밀려났다. 하지만 최근 다시 올라와 2년 전보다 한층 안정된 경기 운영 능력을 선보이고 있다.

백차승·류제국, 성장 가능성 매우 높아

덕수상고 출신으로 현재 기아 타이거스의 김진우와 당시 고교 야구를 대표하는 강속구 투수로 이름을 날렸던 류제국. 그는 시카고 컵스와 계약한 후 물수리 사건으로 비난을 받았다. 그리고 어깨 부상 등 크고 작은 부침이 있었지만 꾸준한 성장을 거듭해 올해 마침내 빅리그 무대에 설 기회를 잡았다. 지나친 긴장감으로 첫 선발 등판에서 2회를 넘기지 못하고 강판당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하지만 박찬호 이후 신체적으로 가장 성장 가능성이 높은 투수로 꼽힌다.

이들 모두의 공통점은 고졸 출신으로 국내에서 뛰던 당시 초고교급 선수로 각광을 받았다는 점이다. 이 얘기는 국내 프로 야구팀에 입단했다면 당장의 성패를 떠나 입단 당시부터 스타 대접을 받으면서 평이하게 흘러갈 수도 있었다는 말과 같다. 하지만 이들은 조금 더 힘들고 어려운 길을 선택했다. 세 명 모두 마이너에 있던 기간이 5년 혹은 그 이상에 달한다. 그리고 마이너 리그에서 가장 초보 단계인 루키 리그부터 시작했다.

같은 야구 선수이지만 마이너 선수와 메이저 리그에서 뛰는 선수의 대접은 문자 그대로 하늘과 땅 차이이다. 루키 리그에서는 월급 1백만원이 넘는 선수가 드물다. 마이너에서 가장 높은 단계인 트리플A 팀에서 뛰어도 마이너에서 6년 이상을 활약한 ‘마이너 베테랑’ 선수가 아닌 이상 월급을 4백~5백만원 받는 선수 역시 많지 않다. 언뜻 보면 적지 않은 액수 같지만 실제로 월봉을 수령하는 기간이 6~7개월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연봉 차원으로 접근하면 그 액수는 프로 선수라는 명함이 부끄러울 지경이다.

또 흔히 ‘밀 머니(Meal Money)’라고 하는 식대 차이도 엄청나다. 메이저 리그 선수들의 한 끼당 밀 머니는 구단마다 차이가 있지만 평균 30달러에 가깝다. 하지만 마이너 선수는 한 끼당 5달러로 하루 15달러에 불과하다. 결국 추신수와 같이 결혼해서 아이까지 있는 경우 빠듯하게 생활을 해야 한다는 말이 된다.

이승학과 송승준, 여전히 불운의 나날

이런 금전적 문제보다 더 크게 다가올 수 있는 것이 문화적 접근의 차이이다. 위에 잠시 언급됐던 류제국의 ‘물수리’ 사건 때는 일의 발발 자체가 황당하게 시작됐다. 어깨 부상이 있기 전까지 1백50km 중반대를 쉽게 넘나드는 강속구의 소유자인 류제국에게 팀 동료 몇 명이 다가와 구장 근처 횟대에 앉아 있는 물수리를 공으로 맞추어 보라고 부추겼다. 살살 약까지 올리면서 류제국을 자극했고 결국 공에 맞은 물수리가 땅에 떨어져 비명횡사하는 사태로 발전하게 된다. 문제는 이 물수리가 보호조로 특히 그 지역에서는 마치 지역을 상징하는 하나의 아이콘으로 인정받고 있었다는 것이다. 나중에 류제국 선수는 옆에서 부추기던 동료들이 언제 그랬냐는 듯 모른 척했다며 씁쓸한 미소를 짓기도 했다.

 
빠르게 불어나고 있는 중남미 계열 선수, 기존의 본토 선수들이 끼리끼리 어울리는 경우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현상. 언어 소통에 불편한 데다 그나마 동양 사람이 많은 대도시를 프랜차이즈로 활용하는 경우가 거의 드문 마이너 리그 환경은 이들 선수들에게 엄청난 어려움으로 다가오기 마련이다.

힘든 한 해를 보내고 오프 시즌 동안 국내에 돌아왔을 때 이들을 기다리는 것은 언론의 무관심과 고교 당시 라이벌로 불렸던 선수들의 자리 매김이다. 속칭 자신들은 눈물 젖은 빵을 씹고 있을 때 어느덧 프로 야구 경험을 차곡차곡 쌓고 있는 과거의 경쟁 선수들이 대접을 받고 있는 모습을 보면 자신의 신세가 처량하게만 느껴진다.

35세 ‘노장’ 최향남의 의미 있는 도전

그나마 이들은 현재 주어진 팀 상황상 주전 혹은 선발 로테이션에 들어갈 수 있는 희망을 가지고 내일의 스타를 꿈꿀 수 있는 상황이라면 그런 상황마저 쉽게 다가오지 않는 선수들도 있다.
필라델피아의 이승학과 캔자스시티 로열스에 있는 송승준이 바로 이런 상황에 놓여 있는 선수들이다. 3년 전 좋은 성적을 거두면서 기대를 부풀리던 이승학. 그러나 특출한 유망주 몇 몇을 제외하고 빅 리그로 불러올리는 데 상당히 보수적인 팀 성향 때문에 기회를 놓쳤다. 이후 허리 부상으로 부진하며 2001년 필리스와 계약한 이후 아직 메이저 리그 마운드에 서보지 못하고 있다.

송승준은 한층 더 불운한 선수다. 백차승과 함께 국내 고교 야구를 양분하는 거물급 투수로 꼽히며 한때 원래 계약 팀 보스턴 레드삭스 마이너 최고 유망주로 꼽혔지만 메이저 리그에서 가장 가난한 구단인 몬트리올 엑스포스(현재 워싱턴 내셔널스)로 트레이드됐다. 마이너에서 맹활약을 보이며 9월 로스터가 확장될 때 승격을 노렸지만 선수들 연봉 지급에도 헉헉대는 몬트리올이 단 한 명의 마이너 선수도 불러올리지 않아 기회를 무산시키고 지금은 여러 팀을 떠도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여기서 특이한 이력의 선수가 클리블랜드 트리플A에서 뛰고 있는 최향남 선수이다. 35세의 나이로 박찬호를 포함해 미국 진출 선수 중 현재 최고령 선수이다. 국내 프로야구에서 잘 알려진 선수로 다른 동기들이 선수 생활을 이미 접었던지 정리하는 단계에 접어들었을 때 그는 홀연히 최고 무대 메이저 리그에 도전장을 던졌다. 선발과 불펜을 오가면서 꾸준한 성적을 보이고 있지만 최소한 올 시즌 빅 리그 진출은 이루어지지 않을 전망이다. 여기서 팀과 자신과의 궁합이 맞지 않은 경우가 다시 나오는데 아무래도 젊은 선수 위주로 새로운 출발을 노리는 클리블랜드가 최향남의 나이를 부담스러워했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이미 올라온 선수도, 혹시 9월의 부름을 기다리는 선수도 이번 가을은 또 한 번의 기회의 장이다. 남들보다 어려운 길을 선택한 만큼 그 역경은 실로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이겨냈을 때 돌아오는 보상은 너무도 크고 달콤하다. 수년에 걸친 눈물겨운 마이너 생활을 이미 이기고 또 아직 도전하는 이들이 가을 하늘만큼이나 아름답게 보이는 9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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