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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을 다시 생각한다

[시론]

이나미 (신경정신과 전문의) ㅣ 승인 2006.09.21(Thu) 15:5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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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나미  
 처음 의사 생활을 시작한 20여 년 전만 해도, 명절 전후에는 주로 며느리들의 정신적·신체적 증상이 악화됨을 관찰할 수 있었는데, 요즘에는 시부모와 남자들 중에 며느리 못지않은 스트레스를 받는 경우가 많아지는 추세이다. 더구나 올해처럼 긴 명절에는 아예 해외 여행을 떠나겠다는 젊은 부부들이 많아 명절을 자식 없이 보내야 하는 노인들이 늘어나고 있다. 정신적으로나 금전적으로나 독립적 노후 생활을 하는 당당한 노인들이야 자녀들의 휴가 계획에 대해 뭐라 간섭을 하지 않겠지만, 그렇지 않은 노인들로서는 1년 내 기다리던 명절을 쓸쓸히 보내면서, 말할 수 없이 서운한 감정을 삭혀야 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고 명절 때 꼭 친지들이 다 모이는 것이 좋다고 말할 수도 없다. 예전에는 당연히 제사 때가 되면 음식 장만은 여자 몫이라 강요했지만, 맞벌이가 늘면서 전업 주부건 맞벌이건 차례 준비와 명절 손님 맞이에 대해 아내들이 불만을 표시하게 된다. 명절이 오기 전 1주일 전부터 음식 준비를 해오던 시어머니로서는 그깟 하루 부엌일에 입을 내미는 며느리들이 마땅찮다. 친지들이 모이면, 쓸데없는 말들이 오고가면서 오히려 서로 의만 상하는 경우도 생긴다. 직장을 잃게 된 이들, 엉뚱한 곳에 투자해서 큰돈을 날린 이들, 자녀들의 성적이 좋지 않아 남 보기 창피하다고 생각하는 이들, 나이가 들어 시집 장가를 가고 싶어도 못 가는 이들, 돈 때문에 아이 갖기를 미루거나 포기하는 사람들, 다 하나씩 남들이 언급을 안 했으면 하는 사연들이 있는데, 친지들이 모이면, 남의 마음을 꼭꼭 쑤셔대는 가학적인 이들이 있으니 더 참석하기가 싫을 터이다. 빡빡한 살림에 제사 비용이라고 아끼며 보냈는데, 남아서 버리는 음식들을 보면, 도대체 이런 낭비를 왜 해야 하나 싶기도 하고, 찔끔 얼굴 내밀기 위해 꽉 막힌 도로에서 그 많은 시간을 보내야 했나 회의도 든다. 이래저래 즐거운 명절이 괴로운 명절로 변해가는 것은 어쩌면 시대의 추세가 아닐까. 가끔 매스컴에서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는 진부한 발언을 할 때면, ‘그러면 우린 다 죽어’라는 대답을 하고 싶을 것 같다.

명절을 명절답게 할 대안들

이렇게 명절이 충전과 휴식이라는 제 구실을 하지 못하고 오히려 사람들의 에너지만 빼앗아가고 있다면, 뭔가 대안이 있어야 할 것 같다. 1년에 열두 번의 제사를 지내고 식구들이 모이던 우리 집도, 몇 년 전부터는 제사 횟수를 확 줄이고, 음식의 양도 간소하게 만들었다(예전에는 떡까지 집에서 직접 했으니…). 아랫 동서들은 포트럭(Portluck) 식으로 각자 집에서 종류를 배당해 음식을 해왔으면 하는 눈치지만, 아직까지 정정한 시어머니로서는 명절이나마 부엌에서 대장 노릇하는 즐거움을 포기 못하시는 것 같다. 전에는 강보에서 빽빽 울고, 아장대며 여기저기 사고만 치던 조카들이 어느 틈에 멋진 장정과 숙녀가 되어 ‘큰엄마’ ‘외숙모’ 하면서 살갑게 굴고, 하다못해 그릇이라도 날라주니, 한결 집안일도 가벼워졌다. 어떤 집들은 빨리 차례를 끝내고 다 함께 영화나 공연을 구경 간다고도 한다. 단체로 전시회를 가거나 가까운 산이나 계곡을 찾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아무래도 집에 앉아 있으면 이런저런 말들이 오가고 술상치레만 하니 여자들은 다리 허리 아프고 남자들은 뱃살만 나오지 않는가. 또 명절 오후면, 웬만해서는 며느리들을 친정에 보내고 딸들을 맞이하는 것이 실은 모두가 평화스럽다. 

일본의 마쓰리나 브라질의 카니발, 미국의 세인트 패트릭 데이, 핼러윈 등은 아직도 많은 이들이 참가하는 즐거운 축제인 반면에, 인디언들의 축제는 많이 사라졌다고 한다. 인디언의 경제·사회적 지위가 열악해진 탓이 크지만, 특히 가부장제적인 요소가 많은 인디언 부족에서 축제 동안 며칠이고 계속되는 음식 준비를 젊은 인디언 여성들이 거부하는 까닭도 있다 한다. 가부장제에서 모계 중심 사회로 변하는 우리나라도 앞으로 이삼십 년 후, 과연 몇 명이나 지금처럼 명절을 지내고 있을까. 아, 그리고 내 며느리들은 명절 때 과연 우리 부부를 찾기나 할까. 자못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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