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 개혁 요체는 국민중심주의”
  • 이숙이 기자 (sookyiya@sisapress.com)
  • 승인 2006.10.09 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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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승헌 사개추위 위원장 인터뷰
 
이용훈 대법원장의 이른바 ‘검찰·변호사 비하 발언’으로 촉발된 법조 3륜 간 갈등은 당사자의 ‘사과’로 일단 봉합되었다. 하지만 ‘공판중심주의’로 상징되는 사법 개혁은 이제부터라도 진지하게 논의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공판중심주의’ 등을 포함한 사법 개혁 법안을 만들어 국회에 제출한 한승헌 사법제도개혁추진위원회(사계추위) 위원장으로부터 사법 개혁의 핵심이 무엇인지 들어보았다. 인터뷰는 9월27일 사개추위 위원장실에서 진행했다.

사법 개혁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추진되었지만, 말만 무성하다 결론 없이 끝나곤 했다. 노무현 정권의 사법 개혁 추진이 다른 정권과 다른 점이 있다면 무엇인가?
사법 개혁 논의는 김영삼 정부 때부터 시작되었고, 그 후 역대 정권에서 비슷비슷한 이름의 위원회를 두고 논의했지만 결실을 거두지는 못했다. 노무현 정부에서는 지금까지 논의에 그쳤던 것을 체계화하고 완성도를 높여서 20여 개의 법안으로 만들었고, 정부안으로 국회에 넘겼다.

그럼에도 여전히 국회 통과는 더디다. 무엇이 가장 큰 걸림돌인가?
우리가 낸 법안을 국회가 제때 심의했더라면 아마 지난 4월이나 6월 임시국회 때 주요 법안이 통과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법안 심의를 무작정 미루거나 중단하는 섭섭한 현상이 벌어졌다. 사학법 재개정과 다른 법안을 연계한다는 이유에서인데, 그런 정략은 우리로서는 좀 이해하기 어렵다. 국회 안팎의 분위기를 보면 이 정부 들어 하는 여러 형식의 개혁에 대해 수용하고 밀어주기보다는 일단 거부하고 회피하는 경향이 엿보인다.

사법 개혁 법안이 단지 노대통령이 추진한다는 점 때문에 지연되고 있다는 얘기인가?
사법 개혁 법안이 실현하고자 하는 것이 국민의 권익이나 선진 사법을 위한 것이지 당리당략에 따라 달리 다룰 내용이 하나도 없다. 우리 위원회가 형식적으로는 대통령 자문기구로 되어 있지만 그 많은 법안을 1년 내내 심의·검토·완성할 때까지 청와대에서 단 한번도 어떤 사안을 부탁하거나 주문한 적이 없다. 만약 그랬다면 아무리 좋은 뜻으로 했더라도 내가 안색을 달리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떳떳하다. 야당도 이런 사정을 제대로 이해해서 이번 정기국회에서 꼭 통과시켜주길 바란다. 로스쿨만 해도 전국의 50여 개 대학에서 로스쿨 인가를 받기 위해 과열 경쟁이 벌어지고 있는데, 또 미뤄진다면 엄청난 혼란과 낭비가 발생한다.

사개추위가 추진 중인 사법 개혁의 목표가 궁극적으로 무엇인가?
우리나라의 민주화 수준, 또는 국민의 욕구 수준에 합당한 선진화된 사법 시스템을 정립하는 것이다. 공정하고 투명한 사법으로 국민 인권을 보장하고 국민의 신뢰를 받아야 한다. 법조인들만의 폐쇄적인 사법을 개방해서 국민으로부터 이해를 받을 수 있도록 모든 장치를 바꾸는 것이다. 여기에서 한발 더 나아가, 국민을 위한 사법에 그치지 않고 국민이 참여하고 국민이 견제하며 국민이 감시할 수 있는 사법 제도를 만드는 것이 목표다.

법안의 주요 내용을 소개해달라.
20여 개 법안이 모두 중요하지만 몇 가지만 소개하겠다. 우선 최근 들어 매우 관심이 높아진 공판중심주의를 핵심으로 하는 형사소송법, 국민이 형사 재판에 참여하는 배심원 제도, 로스쿨로 논의를 일으킨 법학전문대학원 설치법, 전관예우 등 법조 비리에 대응하기 위한 변호사법 개정안, 양형위원회나 고법 상고부 설치를 내용으로 하는 법원조직법 개정안, 군 사법의 독립까지 실현하고자 하는 군 사법관계 법안 등이 대표적이다.

대법원장 발언이 파문을 일으킨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공판중심주의에 대해서는 다들 공감하면서도 아직 준비가 덜 되었다는 의견도 만만치 않은 것 같다.
현행법으로 공판중심주의는 어느 정도 진전시킬 수 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이를테면 검찰이 증거를 공소장과 분리해서 따로 제출하겠다고 하는데 공판중심주의가 되려면 피고인 신문 순서부터 바꿔야 한다. 지금은 재판을 시작하자마자 검사가 피고인을 일방적으로 몰아붙이는데(피고인 신문), 그걸 다 겪고 나면 피고인은 이미 죄인이 다 되어버린다. 또 증거를 뒤늦게 내서 재판을 지연시키는 경우도 있는데, ‘증거개시 제도’라고, 상대방이 가지고 있는 증거를 미리 볼 수 있는 제도도 병행되어야 한다. 그렇게 되면 지금 단계에서 걱정하는 공판중심주의의 문제점이 많이 해소될 수 있다.

검사나 판사의 업무량이 많아져서 법조계 전체에 과부하가 걸릴 것이라는 지적도 있다.
이미 만들어진 조서, 즉 기록에 의존하는 재판은 어찌 보면 능률적이고 편하기는 하다. 그러나 재판을 하는 궁극적인 목적이 진실의 발견과 정의의 실현이라고 한다면, 편하고 능률적인 데만 안주해서는 사법의 기능을 다할 수 없다. 예컨대 조서에 의해 몇 줄 확인하고 재판을 끝내서 억울하게 유죄가 되고 무거운 처벌을 받았다고 한다면, 그건 간편한 재판 때문에 국민의 권리도 간편하게 침해가 되는 셈이다. 상품을 공장에서 찍어내듯이 자꾸 ‘원가절감이 최선이다’ 하는 것은 사법에서는 지양해야 한다.

그러다 보면 전체적으로 재판 기간이 길어질 염려도 있지 않은가?
신속한 재판을 위해서 경죄 처리 절차라는 시스템도 새로 만들었다. 다툼의 소지가 큰 것은 공판중심주의를 통해 훨씬 더 심도 있게 논의를 하되, 다툼의 소지가 없고 간단한 사건은 한 번에 다 증거를 제출하고 심리하며 선고까지 마치는 방식이다. 지금처럼 무거운 사건이나 간단한 사건이나 똑같은 처리 절차를 밟는 게 아니라 한 건에 집중하면 다른 한 쪽은 빨리 처리하는 효율적인 시스템을 도입해야 한다. 그래야 전체 법조계에 가는 부담을 조절할 수 있다.

국민이 법조계를 불신하는 원인 가운데 하나는 이른바 법조 브로커 같은 사건이 곧잘 터지는 탓이다. 사법 개혁 법안들이 통과되면 법조 비리도 근절될 수 있는가?
형사 사건에서 정실과 비리가 개입할 여지는 구속이냐 불구속이냐를 정할 때 매우 크다. 구속 수사가 일반화되는 데서 오는 나쁜 현상이다. 따라서 구속 실질심사 단계에서 모든 피의자가 국선 변호를 받도록 했으며, 앞으로 불구속 수사를 확대해나가야 한다. 또 하나 법조 비리가 개입할 여지는 형량을 정할 때다. 어떤 사람은 집행유예인데, 어떤 사람은 실형을 받고, 또 같은 실형이라도 어떤 사람은 터무니없이 가벼워서 균형에 맞지 않는 식의 문제가 생기는데, 이런 양형의 편차에서 오는 폐단을 막기 위해 양형 기준을 마련하도록 했다. 대법원 산하 양형위원회가 기준을 만들어 법관에게 권고하고 법관이 그 기준에 어긋나는 판결을 할 때는 이유를 판결문에 명시하는 제도다. 그 밖에 직업재판관(판사)에 의한 재판의 독점에서 오는 한계를 막기 위한 배심원 제도, 법조계 식구들끼리의 봐주기 처벌을 막기 위한 외부 인사들의 법관 또는 검사 징계위원회 참여, 전관예우의 폐해를 막기 위한 법조윤리위원회의 수임 내역 점검 등이 다 법조 비리를 방지하려는 사법 개혁 법안의 주요 내용들이다.

대법원장 발언에 대해 검찰이나 대한변협이 반발한 것은 결국 기득권이 침해당하는 데 대한 저항이라는 시각이 있다. 동의하는가?
사법은 신성하다고들 말을 하다 보니까 법조계의 있는 그대로 모습을 언급하는 것조차 대개 회피하곤 한다. 그러나 법조계도 사람 모인 곳이고, 특히 소추나 재판권을 행사하는 곳이라 특권 내지 기득권을 지키려고 하는 본능이 강하다. 하지만 개혁이라는 것이 어차피 자기의 불편이나 아픔을 감수하고 좀더 새로운 질서로 이행해야 하는 것이라면, 새 제도를 기득권과 대비해서 보지 말고 국민에게 어느 것이 더 크게 이바지하느냐를 척도로 생각해야 한다. 그로 인해 국민의 사랑과 신뢰를 받는다면 거기에서 얻어지는 이점이 더 크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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