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조사에서 이명박 전 서울시장(당시에는 현직 시장)이 ‘차기 대통령감 1위’로 치고 올라오자 정치권 안팎에서는 ‘청계천 특수’라고 분석했다. 그즈음 청계천 복원 공사가 끝나고 이 전 시장이 한창 ‘뉴스’를 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 여론조사 전문가는 “차기 대선의 핵심 쟁점이 한반도 평화나 사회 통합 같은 쪽으로 옮아가면 그때는 지지도 순위에 변화가 있을 것이다”라고 전망했다.
하지만 1년이 지나 더 이상 ‘청계천 약발’을 운운할 처지가 아니고, 북한의 핵실험으로 ‘안보 이슈’가 첨예한 현안으로 떠올랐는데도 여전히 이명박 전 시장이 ‘차기 대통령감 1위’를 차지했다(30.2%). 그것도 다른 주자들과 훨씬 더 차이를 벌리면서 말이다. 2위인 고건 전 총리(12.1%)에게는 두 배 이상 앞서고, 일반인 여론조사에서 1, 2위를 다투고 있는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8.9%)보다는 무려 세 배 이상 앞서는 수치다.
전문가 조사에서 이처럼 ‘이명박 대세론’이 강화되는 양상을 보이는 까닭은 무엇일까? 정가에서는 크게 세 가지를 꼽는다.
첫째, ‘북핵 사태’가 터졌지만 전문가들은 여전히 차기 대선의 핵심 화두가 ‘경제’가 되리라는 점에 유념하고 있다. 아닌 게 아니라 요즘 각종 매체가 전하는 민심의 요체는 한마디로 ‘먹고 살기 어렵다’는 것이다. “일자리가 없다” “월급은 제자리인데 집값은 너무 올랐다”라는 식의 민생 관련 하소연은 결국 ‘차기 대선의 핵심 화두는 경제가 될 것’이라는 각종 여론조사 결과로 집약된다. 그런 마당에 이 전 시장이 현재 거론되고 있는 차기 대권 주자군에서는 ‘경제 대통령’의 이미지를 선점하고 있기 때문에, 그 후광 효과가 지지도에 반영되고 있다는 얘기다.
둘째, ‘북핵 사태’가 터지면서 오히려 강력한 리더십에 대한 요구가 더 세졌다. 한나라당을 지지한다는 한 정치학자는 “사람들은 안보 이슈가 터지면 박근혜 전 대표가 유리하리라고 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오히려 국가 위기 사태 때는 강력한 리더십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상대적으로 여자인 박 전 대표보다 남자인 이 전 시장에게 더 유리한 국면이 전개되고 있다”라고 분석했다.
셋째, 일반적으로 이 전 시장 지지층이 ‘고학력 고소득층’이라는 데서 비롯되는 특수성이다. 지금까지 나온 각종 일반인 여론조사를 분석해보면 ‘이명박 지지층’과 ‘박근혜 지지층’이 확연하게 구분된다. 이 전 시장은 수도권, 40대와 50대, 고학력 고소득층에서 지지율이 높고, 박 전 대표는 영남과 60대 이상, 저학력 저소득층에서 지지도가 높은 것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이번 조사의 모집단이라고 할 수 있는 전문가 집단이 외적 조건으로만 보면 대부분 ‘이명박 지지층’과 겹치기 때문에, ‘이명박 대세론’이 더 강화된 양상으로 나타나는 셈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박 전 대표측도 인정한다. 박 전 대표의 한 측근 의원은 “심지어 대구·경북에서도 여론 주도층은 박 전 대표에게 그리 우호적이지 않다. 보수 성향이 반영된 것으로 보이는데, 이를 어떻게 극복해내느냐가 관건이다”라고 고민했다.
지지층 이탈 부른 ‘고건 본색’
이 전 시장측은 이런 결과에 대해 짐짓 무덤덤한 표정을 짓는다. 올해 초 ‘황제 테니스 파동’과 지자체 선거 등을 거치며 지지도 순위가 크게 출렁거렸듯이, 언제 또 어떤 변수가 생길지 모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캠프 내부는 크게 고무된 분위기다. 무엇보다 한나라당 경선에서 유리한 구도를 만드는 데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기대감이 크다. 이 전 시장의 한 참모는 “한나라당 사람들은 이번에는 무조건 본선에서 이길 사람을 뽑겠다는 생각이 강하다. 따라서 지지율 조사에서 격차를 10% 포인트 이상 꾸준하게 벌릴 경우 한나라당 내부 분위기도 이명박 대세론으로 바뀔 수 있다”라고 말했다.
박근혜 전 대표와 함께 전문가 조사에서 유독 ‘약한 모습’을 보여온 고건 전 총리는 이번 조사에서도 역시 ‘약한 모습’을 보였다. 순위는 2등이지만, 1위와 상당한 차이가 나는 것이다. 고 전 총리는 범여권에 대한 지지도가 전반적으로 낮은 측면도 있지만, 이번 북핵 파동을 거치며 ‘보수 성향’을 명확히 드러낸 것이 지지율 하락을 가속화하고 있다는 평이다. 고 전 총리의 지지층이 ‘호남+개혁’이라는 범여권 지지층과 겹쳐 있는데, ‘북핵 해법’과 관련해 고 전 총리가 김대중 전 대통령과 전혀 다른 목소리를 내면서 ‘고건 지지층’이 떨어져 나가고 있다는 것이다. 한 열린우리당 의원은 “고건 본색이 드러나면서 고 전 총리를 범여권 통합 후보로 내세우는 데 회의적인 사람들이 늘어났다. 문제는 여권에 그를 대체할 만한 유력 주자가 없다는 점이다. 그마나 고 전 총리에게 머무르고 있던 여당 지지표가 떨어져 나가면서 여권 지지층은 더욱 엷어지고 있다”라고 걱정했다.
하지만 이명박 1위와 함께 이번 조사에서 가장 눈여겨볼 만한 대목은 손학규 전 경기도지사의 급상승이다. 손 전 지사는 전통적으로 전문가 집단에서 지지율이 높게 나타났지만 지난해 <시사저널> 전문가 조사에서는 1.8%의 지지를 얻는 데 그쳤다. 그런데 이번에는 11.2%의 지지를 얻어 고 전 총리와 오차 범위 내 접전을 벌이는 3위에 오른 것이다. 무엇보다 올해의 정치권 히트 상품으로 꼽히는 100일 민심 대장정이 도약의 발판이 된 것으로 보인다.
매년 ‘누가 한국을 움직이는가’ 기사를 마무리할 때마다 “내년에는 또 어떤 인물이 순위에 오를까”를 되뇌게 된다. 그런데 내년에는 정말 엄청난 변화가 있을 것 같다. 그때쯤이면 여야의 대권 후보가 이미 결정되었을 터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