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념 논쟁 ‘불꽃’, 실명 비판 ‘활활’
  • 안철흥 기자 (ahn@sisapress.com)
  • 승인 2006.11.24 1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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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우 논객들, 양보 없는 난타전…‘담론 시대’ 부활시킬지 관심

 
바야흐로 실명 비판의 시대다. 철지난 것처럼 여겨지던 이념 논쟁이 한창이고, 진보 학계의 원로들이 도마 위에서 벌거벗겨지고 있다. 강만길 교수가 그랬고, 리영희 교수가 그랬다. 그리고 백낙청 교수까지 호출되었다. 세 사람은 진보 학계의 삼두마차로 불린다. 흔히 ‘386의 스승’ ‘민주화 운동의 대부’로 불리던 이들이다. 그들을 비판의 장으로 불러내고 있는 이들은 이른바 뉴라이트 혹은 자유주의 진영에 속하는 논객들이다. 한때 이들과 생각을 공유했지만, 지금은 갈라선 사람들이다. 그래서 ‘정치 공세’처럼 보이기도 하는 이들의 실명 비판에는 더욱 날이 서 있다.

실명 비판의 물꼬는 뉴라이트재단 기관지인 계간 <시대정신>이 열었다. 지난 8월 말 이들은 ‘우리 시대의 진보적 지식인’이라는 제목의 연재 코너를 신설했다. 그리고 강만길 고려대 명예교수의 한국 근현대사 인식을 전면 비판하는 글을 게재했다. 강교수의 역사 인식이 “노예제 사회보다 더한 착취와 억압이 존재하는 전근대적 북한 정권의 독재와 인권 말살에 부역하는 결과를 낳고 있다”라는 것이다. 자유주의연대 최홍재 조직위원장이 썼는데, 필자가 운동권 출신이자 강교수의 제자였다는 선정성까지 곁들여지면서 큰 화제를 모았다.

리영희 한양대 명예교수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곳으로부터 화살을 맞았다. 리교수를 겨냥한 이는 중도 성향 학자인 윤평중 한신대 교수(철학). 윤교수는 최근 복간된 <비평> 겨울호에서 “조야하고 도식적인 리영희의 인본적 사회주의는 시장맹과 북한맹을 만들어내며 우리 시대를 계몽과 동시에 미몽에 빠뜨렸다”라며 리교수를 비판했다. 리교수가 보수 우파로부터 공격당한 것은 하루이틀 일이 아니지만, 비슷한 생각을 공유했던 후배 학자에게 정면으로 비판당한 것은 처음이다.

그리고 안병직 교수가 11월27일 발간 예정인 <시대정신> 겨울호에서 백낙청 교수의 분단체제론과 국가연합론을 조목조목 파헤치며 비판했다(00쪽 기사 참조). 백낙청 교수는 자타가 공인하는 국내 진보 학계의 대부다. 그가 1980년대부터 주장한 분단체제론은 국내 민주화 운동과 특히 통일 운동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는 계간 <창작과비평> 편집인과 남북 교류를 위한 민간 기구인 6·15 공동선언실천남측위원회 상임대표를 맡고 있다.

최근의 ‘진보 때리기’에 나선 이들 중 윤평중 교수를 뺀 대다수는 뉴라이트 쪽 학자들이다. 안병직 교수는 지난 4월 말 뉴라이트재단 대표를 맡으면서 “계간 <시대정신>을 통해 좌파 진영의 대표 매체인 <창작과비평>이나 <역사비평>과 치열한 사상전을 벌이겠다”라고 말했는데, 그때의 ‘약속’이 현실로 나타나고 있는 셈이다. <시대정신>은 강만길·백낙청 교수 외에도 리영희·한완상·최장집 등 진보학자들의 사상 체계를 비판하는 글을 계속 연재할 계획이다.

우파가 <해전사> 때리자 진보 학계 ‘집단 응전’

물론 실명 비판이 중도나 우파 학자들의 전유물은 아니다. 백낙청 교수는 이미 지난봄에 같은 진보 진영에 속한 최장집 고려대 교수의 통일관을 비판하면서 논쟁의 물꼬를 텄고, 다른 학자들에 대해서도 실명 비판을 활발하게 펼치겠다고 예고한 바 있다. 그리고 최근 출간된 <창작과비평> 겨울호에 ‘남남 갈등에서 한반도 선진 사회로’라는 글을 발표하면서 실명 비판을 재개했다. ‘어디가 중도며 어째서 변혁인가’라는 부제가 붙은 이 글은 자신의 통일론에 대한 좌우 학계의 오해와 몰이해를 반박하는 형식인데, 안병직·박세일· 이인호 교수 등 뉴라이트 성향 학자들뿐 아니라 손호철 교수 같은 진보 성향 학자들도 끼어 있다.

 
‘각개전투’만 벌어지는 것이 아니다. 올해 2월에는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재인식>)이 출간된 바 있다. 이 책은 1980년대 이후 대학생들의 교양 입문서 역할을 했던 <해방전후사의 인식>(<해전사>)을 겨냥한 우파의 공세로 받아들여졌다. 이영훈·김일영·김영호 교수 등 이른바 뉴라이트 소속 학자들이 대거 필진으로 참여했는데, 이들은 강만길·최장집·정해구·이만열 교수 등 <해전사> 필진들의 주장을 “좌파 민족주의자들의 실천적 역사 쓰기”(이영훈)로 폄했다.

<재인식>이 출간된 뒤 진보 학계는 울분을 토하면서도 한편에서는 반성했다. 11월20일 출간된 <근대를 다시 읽는다 1, 2>(역사비평사)는 이런 진보 학계가 8개월 만에 내놓은 응답이자, <해전사> 이후 진행된 한국 근현대사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결산한 결과물이다.

한국의 식민 경험과 국민 형성에 관한 논문을 모은 1권과 문화 연구, 하위 주체 연구 등 방법론적 문제의식을 부각시킨 2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윤해동·천정환·허수·황병주·이용기·윤대석 등 중도·진보 성향의 소장 학자 28명이 최근 발표했던 글을 모았는데, <재인식>과 분량이나 참여 학자들의 숫자를 거의 비슷하게 맞춘 점이 눈길을 끈다. 이들은 공동 서문에서 “<재인식>은 한국 학계와 사회를 냉전적인 진영 논리로 채색하고 말았다. 그런 퇴행성에는 논리적 빈곤과 역사 해석의 한계가 그대로 노출되고 있다”라면서 자신들의 책이 <재인식>을 겨냥했음을 숨기지 않았다.

하지만 <근대를 다시 읽는다>가 기존 <해전사>의 민족주의적 인식 틀을 이어받고 있지는 않다. <재인식>에 실린 탈식민주의 성향의 몇몇 논문을 높이 평가한 점이 눈에 띄기도 한다. <근대를 다시 읽는다>의 책임 편집을 맡은 윤해동 교수(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는 “개발 지상주의 및 국가주의로 요약되는 근대주의와, 제국주의의 쌍생아로서 민족주의, 이 양자를 모두 넘어서는 새로운 인식 틀이 등장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실명 비판이란 말은 오래 전부터 쓰였지만, 고유명사처럼 ‘주민등록’을 부여받은 지는 10 년이 채 안 된다. 강준만 전북대 교수가 지금은 없어진 계간 <인물과 사상>에서 실명 비판의 도마 위에 올린 인물은 거의 1백70여 명에 달했다. 김대중·노무현·김근태·박근혜 등 정치인은 물론 김동길·김용옥·손호철·송호근·윤평중 등 좌우 지식인들이 망라되었다. 하지만 실명 비판이 갖는 특유의 글 성격상 대상자는 곧 ‘외상’을 입기 마련이어서, 강교수에 의해 트인 물꼬가 이후 확산되지는 못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최근 좌우 논객들이 펼치는 실명 비판은 특기할 만하다.

이런 현상이 1980년대와 같은 담론 시대를 부활시키는 데까지 나아갈 수 있을지는 속단하기 어렵다. 실명 비판이 주로 ‘이념’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진보파에 대한 보수파의 책임 추궁 성격의 공세로 진행되는 양상 등 새로운 현상이라기보다는 ‘잔여적’ 성격으로 보는 것이 맞다는 주장도 있다.

강준만 교수는 “이른바 ‘1987년 체제’가 20년 수명을 끝내고 막을 내리는 전환기적 정리 과정이라고 본다”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서 “기존 보수-진보 구도의 의제 설정 자체가 다시 이루어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앞으로 훨씬 더 크게 나올 것이고, 그렇게 되리라고 본다”라고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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