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구하러 나선 ‘분홍색 여성’들
  • 이문재 (시인) ()
  • 승인 2006.11.24 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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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일의 책] <여기서 전쟁을 끝내라>/‘코드 핑크’의 메시지 소개

 
분홍색으로 ‘무장’한 여성 1만명이 백악관을 에워쌌다. 2003년 3월8일 세계 여성의 날, 부시 미국 행정부의 색깔 안보 체계가 교란당했다. 코드 옐로, 코드 오렌지, 코드 레드로 이어지는 미국의 전지구적 국방 시스템이 난데없는 ‘코드 핑크’에 포위당한 것이다. 분홍색 행진은 미국의 군사력으로 대표되는 폭력에 대한 여성들의 강력한 항의였다.

코드 핑크는 2002년 11월17일 ‘상상력이 풍부한’ 1백여 명의 미국 여성들이 설립한 반전 평화 단체다. 코드 핑크는 9·11 사태의 후폭풍 속에서 태어났다. 9·11 테러에 관한 대처가 전쟁으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일군이 여성들이 폭력의 악순환을 멈추기 위해 ‘여성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을 찾던 끝에 도달한 아이디어가 코드 핑크였다.

초국적 기업의 노동 착취에 반대해온 메데아 벤저민, 환경 문제와 정치적 정의 실현을 위해 투신해온 조디 에번스, 다섯 아이의 어머니이자 새우잡이 어부인 다이앤 윌슨, 공상가이자 점성술사인 캐롤라인 케이시 등이 엉뚱하며 기발한 상상력과 창의력을 발휘한 결과가 코드 핑크였다. 코드 핑크는 한마디로 ‘평화를 기원하는 여성들’이다.

코드 핑크는 어머니·할머니·자매·딸·노동자·학생·교사·치유사·예술가·작가·가수·시인 등 평범한 모든 여성에게 평화의 전사로 거듭나라고 촉구한다. 여성이 남성보다 더 훌륭하거나 순수해서가 아니다. 여성은 언제나 생명의 수호자였고, 남성들은 늘 전쟁을 만들어내느라 분주했기 때문이다.

이라크 침공 저지로 운동 시작

코드 핑크의 첫 번째 사업은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저지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백악관 외곽에서 넉달 동안 평화를 위한 밤샘 농성을 전개하며 대규모 대중 시위를 이끌었다. ‘책상에 앉아 전쟁 궁리만 하는 남성들’을 파면하라며 여성 속옷 모양의 분홍색 천을 건물 외벽에 내걸었다. 길이가 자그마치 12m에 달했다. 이라크 침공이 확정되기 전인 2003년 2월에는 15명의 대표단을 결성해 이라크를 방문하기도 했다.

 
<여기서 전쟁을 끝내라>는 책으로 만든 코드 핑크, 즉 활자로 만든 평화의 인간 띠이다. 코드 핑크의 공동 설집자인 메데아 벤저민과 조디 에번스가 함께 엮은 이 책에는 세계 각지에서 전쟁 기계를 평화의 생명체로 바꾸려는 선구자들의 목소리가 생생히 실려 있다. 모두 10장으로 구성되었는데, 앞부분에는 미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이라크 추가 복무를 공개적으로 거부한 퇴역 군인, 이라크 전쟁에서 양아들을 잃고 ‘군인 가족 스피크아웃’이라는 단체를 설립한 미국 어머니, 이라크 전쟁에서 아들을 잃고 유가족 협의회 ‘금성장 평화 모임’을 결성하고 활동 중인 어머니 등 평범한 시민에서 평화를 위한 지구적 저항군으로 다시 태어난 ‘인간’들의 육성이 실려 있다.

세계 지성을 대표하는 여성들 대거 참여

세계 지성을 대표하는 여성들도 참여했다. 세계적 소설가에서 활동가로 변신한 아룬다티 로이는 ‘우리는 스스로 교전 상태에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라는 머리말을 썼다. 국내에도 잘 알려진 <버자이너 모놀로그>의 작가 이브 엔슬러는 침략에서 초청으로 전환하는 패러다임을 주창했고, 평생을 활동가로 살아온 레슬리 케이건은 체험에서 우러나온 실질적 평화 운동에 대한 통찰력을 제시한다. 아프리카 생태계 파괴에 저항해온 노벨평화상 수상자 왕가리 마타이도 ‘분홍색 메시지’를 내놓고 있다. 이들의 문제의식은 “오늘 우리에게 닥친 문제들을 만들어낸 당사자들의 사고방식으로는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라는 아인슈타인의 선견지명과 맞닿아 있다.

코드 핑크는 두 가지 측면에서 주목되어왔다. 하나는 여성에 의한 평화 운동이고, 또 다른 하나는 그 운동 방식이다. 여성이 주도하는 평화 운동은 그 메시지나 영향력, 실천 가능성에서 앞날이 매우 밝다. 그러나 평화를 대중화·일상화하는 방식 또한 중요하다. 코드 핑크는 심각하지 않다. 상상력과 창의력을 ‘분홍색 무기’로 삼기 때문이다. 남북 분단, 남남 분열로 열병을 앓고 있는 한반도가 코드 핑크를 ‘수입’해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어 보인다. 남북의 여성들이 분홍색 옷을 입고 만나는 모습을 떠올려보자는 것이다. 국가 문제를 놓고 둘로 나뉜 남성들에게 여성들이 분홍색 넥타이를 매주는 도발을 해보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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