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인점이야? 백화점이야?
  • 김은남 기자 (ken@sisapress.com)
  • 승인 2006.12.08 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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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 마트들, 고급화 경쟁 ‘후끈’…부대 시설 늘리고 패션 부문 강화

 
서울 양천구에 사는 박강희씨(39·가명, 학원강사)는 최근 재개관한 홈에버 목동점을 찾았다 가 깜짝 놀랐다. 홈에버는 대형 마트 까르푸의 새 이름이다. 지난 4월 한국까르푸 32개 점포를 인수한 이랜드가 지난 11월9일 리뉴얼 점포 1호로 선보인 것이 홈에버 목동점이다. 

그런데 재개관한 이곳 지하 매장에 들어선 순간 박씨 눈길을 사로잡은 것이 문화센터였다. 그 옆에는 유럽풍 인테리어로 꾸민 북카페도 자리 잡고 있었다. 매장 입구에 들어서면 줄줄이 늘어선 쇼핑 카트와 천장까지 물건을 쌓아둔 상품 진열대만이 눈에 들어오던 과거 까르푸 시절과는 확연히 달라진 모습이었다. 식품 매장에 가니 와인 전문 매장과 건강식품 전문 매장이 새로 꾸며져 있었다. 와인 매장 한쪽에는 와인을 서늘한 온도에서 보관할 수 있게끔 대형 와인셀러도 설치되어 있었다. 매장을 둘러보고 난 박씨는 헷갈리고 말았다. ‘이게 할인점이야, 백화점이야?’

대형 마트가 제2의 진화를 하고 있다. 이마트 등 국내 대형 마트는 지난 10년간 대량 구매·대량 판매가 가능한 업태 특성을 활용해 값싸면서도 질 좋은 상품을 공급하는 한편 백화점 수준에 근접한 서비스를 도입하는 등 ‘한국형 대형 마트’로 1차 진화함으로써 까르푸·월마트 같은 순수 외래종을 도태시키는 데 성공했다. 

경쟁에서 살아남은 강자들이 더 치열해진 생존 경쟁 속에서 새롭게 선택한 진화 전략이 바로 ‘고급형 할인점’ 전략이다. 백화점을 그대로 모방한 듯한 인테리어·부대 시설·서비스를 앞 다투어 도입하면서 대형 마트는 점점 더 백화점을 닮아가고 있다. 홈에버는 아예 앞으로의 지향점을 ‘백화점형 할인점’으로 잡았다.

 
홈에버 등장으로 가속도 붙어

지금까지 대형 마트의 성장을 견인한 것은 ‘최저가 신고제’로 상징되는 저가 전략(ELDP; Everyday Low Prices)이었다. 창고형 할인점 개념에 충실한 외국계 대형 마트에 비해 한국형 대형 마트들이 좀더 고객 친화적인 서비스와 인테리어를 도입해 성공을 거둔 측면이 있지만 핵심은 무어니 무어니 해도 낮은 가격이었다. 저가 경쟁은 특히 식품 부문에서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 질이 좋으면서도 동네 슈퍼마켓이나 재래 시장에 비해 가격이 20~30%가량 싼 대형 마트 식품에 소비자들은 민감하게 반응했고, 이를 사러 온 소비자들이 가전·생활 용품까지 덩달아 소비하면서 비식품 분야 매출이 동반 상승했다. 식품 부문은 대형 마트 매출의 50% 안팎을 차지한다.

그런데 식품을 미끼로 한 이같은 저가 전략으로는 매출을 늘리는 데 한계가 왔다는 것이 업계의 판단이다. “식품 마진율은 10% 남짓하다. 가격을 더 이상 내리는 데도 한계가 있다”라고 이마트 담당자는 말했다. 더욱이 대형 마트는 전국적으로 포화 상태에 이르렀다. 한국체인스토어협회에 따르면, 2006년 8월 현재 대형 마트는 3백14곳에 이른다. 민간 연구소들은 내년에도 대형 마트 성장세가 계속될 것이나 성장률은 10% 미만으로 다소 둔화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양적 팽창과 업체 간 경쟁 심화 때문이다. 

이에 따라 대형 마트들이 새롭게 눈독을 들이고 있는 것이 패션 부문이다. 패션의 경우 마진율이 25~40% 정도에 이르는 고마진 상품인 만큼 매출 대비 수익률 측면에서 식품을 월등히 앞선다는 것이 업계의 설명이다. 패션 부문을 통해 업체 이미지를 끌어올리는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 지난해 ‘메트로7’이라는 고가 의류 브랜드를 선보인 뒤 매출액 상승은 물론 브랜드 이미지까지 급상승한 월마트가 좋은 예이다. 

때문에 이마트·롯데마트·홈플러스·홈에버 등 대형 마트 ‘빅4’는 최근 앞다투어 패션 부문 비중을 확대하고 있다. 업계 1위인 이마트는 지난해 대형 마트 중 최초로 패션디자인실을 신설한 데 이어 지난 8월 샵나인오투(#902)라는 자체 의류 브랜드를 새로 선보임으로써 패션 부문 사업을 대폭 강화하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했다. 샵나인오투는 이마트의 기존 의류 브랜드인 ‘이베이직’보다 품질과 디자인을 대폭 개선했을 뿐만 아니라 가방·신발 등 액세서리까지 망라한 프리미엄급 패션 브랜드이다.  

홈플러스 또한 전문 디자이너를 영입한 데 이어 ‘프리선샛’, ‘멜리멜로’, ‘이지클래식’, ‘스프링쿨러’ 등 자체 의류 브랜드를 잇달아 선보였다.

 
문화센터·소극장·놀이 시설 등도 다투어 갖춰

의류 회사로 출발한 이랜드는 홈에버 패션 부문에 특히 더 왕성한 의욕을 보이고 있다. 올해 안에 매장 10여 곳을 재개관할 계획인 홈에버는 패션 부문 매출 비중을 현재 5%에서 30% 이상으로 끌어올릴 계획이라고 밝혔다. 영업 면적 기준 6%에 불과했던 매장 비중도 35%로 대폭 확대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리뉴얼 1호관인 홈에버 목동점은 한 개층 전체를 패션 전문관으로 꾸몄다. 이곳에는 비아니·유솔 등 이랜드 자체 브랜드 상품 30여 개 말고도 푸마·데코·ENC 등 계열 브랜드와 국내외 유명 브랜드 상품 50여 개가 들어와 있다. 현재까지는 실적도 상당히 양호하다. 홈에버 목동점은 재개관 이후 3주일 동안 패션 부문 매출 비중이 9%(전년 동기)에서 27%로 대폭 확대되었다고 밝혔다.   

그러나 대형 마트의 이같은 패션 부문 강화 전략이 얼마만한 효과를 가져올지에 대해서는 전망이 불투명하다. 한 대형 마트는 지난해 캐시미어로 만든 고급 스웨터를 자체 브랜드를 붙여 출시했다가 호되게 실패한 경험이 있다. 백화점 판매가의 3분의 1이 되지 않는 저가였음에도 불구하고 ‘할인점에서 설마 진짜 캐시미어를 팔겠어?’라고 반신반의한 소비자들이 상품을 외면한 까닭이다. ‘싼 게 비지떡’이라는 생각으로 밑져야 본전 수준인 기본 제품만 구입하려 드는 소비자들의 인식을 바꾸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따라서 대형 마트가 변신에 성공하려면 단순히 외관을 고급화하고 프리미엄 브랜드만 내놓을 것이 아니라 소비자에 대한 접근법 자체를 달리해야 한다고 권오향 이마트 패션디자인실장은 말했다. 이제는 대형 마트가 고객에게 ‘가격’이 아닌 ‘가치’에 따른 편익을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인터뷰 기사 참조).

 
문화센터·북카페·패밀리 레스토랑 등 주로 백화점에서 만날 수 있었던 부대 시설을 매장 안으로 끌어들이려는 대형 마트들의 실험이 주목되는 것도 가치 지향적인 공간을 만들고자 하는 이들의 전략 때문이다. 지난 1999년 업계 최초로 대형 마트에 문화센터를 도입한 홈플러스는 현재 전국 42개 점포 중 37곳에서 문화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홈에버 목동점은 어린이를 위한 소극장과 놀이 시설까지 선보였다. “부모가 쇼핑하는 동안 아이들을 안전하게 맡아주니까 손님들이 아주 좋아한다”라고 담당자는 말했다. 이런 다양한 부대 시설을 통해 대형 마트를 단순한 쇼핑 공간에서 복합적인 문화·놀이 공간으로 업그레이드시키겠다는 것이 홈에버의 복안이다.

덕분에 소비자는 좋아졌다. 한 예로 “기존에는 빈 공간만 있으면 물건을 한 개라도 더 쌓으려 애를 썼다”라고 홈에버의 한 직원은 말했다. 자투리 공간은 있을 수 없는 낭비였다. 그런데 재개관한 홈에버에는 고객이 쉬어갈 수 있는 의자가 군데군데 눈에 띈다. 고도의 배려에서건 마케팅 전략에서건, 대형 마트는 가일층 고객 친화형으로 진화하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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