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 그림자 덮으며 거리 좁히는 북, 미
  • 유호열(고려대 북한학과 교수) ()
  • 승인 2007.03.19 09:56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관계 개선 '급물살'...수교까지는 오래 걸릴 듯

 
2·13 합의에 따라 북·미 관계가 급속히 진전되고 있다. 지난 3월7일 김계관 북한 외무성 부상 일행이 뉴욕을 방문해 개최된 1차 북·미 관계 정상화 실무그룹 회의에서 북·미 양국은 2·13 합의 이행 의지를 재확인하는 한편 한국전쟁 이후 지속된 양국 간 적대 관계를 종식시킬 북·미 관계 정상화에 대해 폭넓은 의견 교환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북·미 양국의 국교 수립까지 해결되어야 할 과제들이 적지 않으나 북핵 위기를 극복하고 한반도 안정과 항구적 평화를 정착시킬 수 있는 첫걸음을 내디뎠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 2002년 10월 북한의 우라늄 농축을 통한 핵개발 문제가 제기된 후 북·미 제네바 합의가 파기되고 급기야 2006년 10월 북한이 핵실험을 강행함으로써 한반도에 긴장이 고조되고 북·미 관계가 파국으로 치닫던 위기 상황을 상기하면 2·13 합의 이후 급물살을 타고 있는 북·미 관계 개선 정국은 북·미 양국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무척 고무적인 일이다.
북·미 관계가 이처럼 급속히 개선되고 있는 것은 2·13 합의와 같은 북핵 문제 해결의 돌파구가 마련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2·13 합의는 역으로 2006년 말부터 형성되기 시작한 북·미 관계에서의 정책적 변화에 기인했다. 북한의 핵실험 강행 등으로 한반도 주변의 위기가 고조되고 유엔 등 국제 사회의 대북 제재가 본격화되는 시점에서 미국이 돌연 북한과의 관계 개선을 통해 북핵 문제를 해결하기로 정책을 선회한 가장 큰 이유는 2006년 11월 미국 중간선거 결과 민주당이 압승을 거두었기 때문이다. 선거 패배 직후 럼스펠드 국방장관이 교체되는 것을 필두로 부시 행정부 내의 네오콘들의 입지가 급속히 퇴조하고 대신 라이스 국무장관을 중심으로 외교적 현실주의자들이 미국의 대외 정책을 주도하게 되었다. 따라서 이라크 문제가 해결 난망인 가운데 이란 핵문제가 부시 행정부의 발목을 잡는 상황에서 북한에 대한 강경 일변도의 압박 정책보다는 주고 받기 식의 거래를 통해 북핵 문제를 해결할 수밖에 없다는 현실적 판단을 하게 되었다.
미국 부시 행정부가 현실주의 외교 노선으로 변화하고 있음을 감지한 중국과 한국 정부는 북한 당국을 설득했고 결국 김정일 정권 역시 핵문제 해결을 통해 북·미 관계 개선, 북·미 관계 정상화를 통한 핵 폐기라는 전략적 결단을 내리게 되었다. 핵실험을 통해 오랜 숙원이던 핵무기를 보유한 북한으로서는 한층 유리한 입장에서 북·미 관계 정상화와 북핵 폐기에 따른 보상책을 논의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현실주의 외교 노선으로 선회하면서 획기적 업적이 필요한 부시 행정부의 유화적 입장이 변하기 전에 일단 협상에 임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전술적 판단도 했을 것이다.
북한과 미국이 북핵 문제 해결을 전제로 관계 정상화 협의에 착수했으나 궁극적으로 양국이 수교하기까지는 아직 많은 난제들이 놓여 있다. 우선 양국 관계의 정상화를 위해서는 북핵 문제가 해결되어야 한다. 2·13 합의 이후 60일간의 초기 조처 이행을 통해 영변 원자로 등 핵시설이 폐쇄·봉인되고 국제원자력기구(IAEA) 감시단의 감시와 검증 절차가 이루어지면 북한은 5만t의 중유를 공급받게 된다. 이후 북한은 중유 95만t 상당의 경제·에너지·인도적 지원을 받는 대신 모든 핵 프로그램의 내용을 신고하고, 동결된 핵시설을 불능화해야 한다. 종국적으로 북한은 2005년 9·19 공동성명에 언급된 핵무기를 포함해 이미 추출된 플루토늄·농축 우라늄 등 모든 핵물질과 핵 프로그램을 폐기해야 한다.


북한, 연락사무소 개설에 긍정적 자세 보여


 
마지막 단계에서 북한은 북·미 관계 정상화는 물론 경수로 건설을 비롯한 대규모 경제 지원 등을 조건으로 협상에 임할 것이지만 현재로서 핵무기를 여타 핵 프로그램과 분리 접근하는 것으로 보아 북한의 완전한 핵 폐기 의지나 정책에 대해 확실히 알 수 없으며 협상 전망 역시 불투명하다. 만약 북한이 핵 폐기를 향한 일련의 단계들을 성실하게 밟아나갈 경우 북·미 관계 정상화 협상 역시 순조롭게 진행될 것이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난관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북핵 문제 해결과 함께 북·미 관계 정상화에 임하는 북한과 미국의 입장 차이 역시 양국 간 수교에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 한국전쟁 이후 적대 관계를 유지해온 북한과 미국이 관계를 정상화하기 위해서는 양국 간 신뢰 구축과 상호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불과 얼마 전까지 ‘악의 축’이나 ‘철천지 원수’로 적대시하던 양국이 앙금을 털고 수교하기 위해서는 북핵 폐기는 물론 테러지원국 지정 철회나 인권 문제 개선 등 해결되어야 할 사항이 적지 않다. 지난 3월 초 1차 북·미 관계 정상화 실무그룹 회의에서 테러 지원국 지정 철회나 적성국 교역 금지법 해제 등에 대해 법적·제도적 문제들을 논의하기는 했으나 실제 테러 지원국 지정이 철회되기 위해서는 최소한 일본인 납치 문제가 해결되어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미국과 전쟁을 치렀던 중국과 베트남이 미국과 국교를 수립하는 과정에서 오랜 협상 기간이 소요되었던 점도 북·미 간 수교 과정에서 한반도 정전 체제를 종전 체제로 바꾸는 문제 등 적지 않은 난제들이 해결되어야 할 점을 예고하고 있다. 따라서 부시 행정부 임기 내 수교를 완료하거나 부시-김정일 정상회담이 개최될 가능성은 많지 않다.
1994년 제네바 합의에서 미국과 북한은 관계 정상화를 위한 협상에 착수했으나 양국 수도에 연락사무소를 설치하는 문제에서 북한이 소극적 입장을 보여 관계 정상화 논의가 중단된 적이 있다. 이번 북·미 관계 정상화 논의에서 북한은 국교 수립 이전 연락사무소 설치에 긍정적인 입장을 보였다고 한다. 2·13 합의에 따른 초기 이행 조처가 약속대로 이행될 경우, 4월 중순 이후 개최될 6자회담 외무장관 회담을 전후해 라이스 미국 국무장관의 북한 방문이 실현됨으로써 북·미 관계 정상화를 향한 협상이 탄력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북한으로서는 북·미 관계 정상화를 핵무기보다 더 확실한 체제 보장책으로 간주하고 있다. 미국과 국교를 수립할 경우 미국의 군사적 위협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남한을 비롯한 중국·일본 등 주변 강대국들의 간섭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동시에 미국과 관계 정상화를 통해 국제 사회로부터 경제 지원을 안정적으로 제공받을 수 있기 때문에 북한으로서는 향후 미국과의 새로운 협상에 총력을 기울일 것이다. 북한과의 관계 정상화에 대해 핵문제 이외 뚜렷한 이해관계가 부족한 미국으로서는 관계 정상화를 단순히 북한에 대한 시혜나 보상으로만 간주해 수교 협상에 최선을 다하지 못할 위험성이 있다. 북·미 수교가 한반도 장래에 새로운 도전과 과제를 던져줄 것이며, 동북아에 새로운 질서를 구축할 것임을 인식해 미국은 한층 신중하고 전략적으로 북한과의 수교 문제에 임해야 한다. 우리 정부도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 체제 구축, 그리고 통일 문제까지 감안해 남북 관계와 한·미 관계를 북·미 관계 정상화 논의와 연계해 추진해야 할 것이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