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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가는 지금 ‘부정의 세월’

‘아버지’ 다룬 영화 줄줄이 개봉…<우아한 세계> 등 올해만 10여 편 이르러

김지은 (자유 기고가) ㅣ 승인 2007.05.07(Mon) 14:1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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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아버지는 위엄과 권위의 상징이었다. 가부장을 중심으로 하지 않는 가정은 결손 가정으로 손가락질받던 시절이었다. 아버지의 말 한마디가 집안 대소사를 결정짓던 시절, 영화나 드라마 속에 등장하는 아버지들 또한 흐트러진 자태를 보이는 법이 별로 없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아버지의 모습은 많은 변화를 겪어야 했다.
1997년 소설과 영화로 나온 <아버지>에서 아버지는 결국 병환과 함께 쓰러지며 지독한 외로움을 토로한다. 위엄 있던 모습 뒤로 얼마나 고립된 생활을 해왔는지, 또 가족을 위해 아버지의 실체를 드러낸 것이다. 영화는 흥행했고, 많은 관객이 영화 속 아버지에 공감하는 듯했다. 문화계 전반에 아버지를 화두로 한 논의가 잠시 활발해지다가 외환위기를 겪으며 아버지는 다시 고립된 자리로 돌아간 듯했다. 그러는 동안 영화와 드라마 속에서 아버지라는 역할의 중요성은 작아졌고, 대신 여권 신장의 바람을 타고 어머니 또는 아내의 목소리가 커졌다.
여성 단체들의 입김 또한 큰 작용을 했다. 우먼 파워를 과시하는 여성들이 스크린과 TV를 장악하는 듯한 양상을 보이며, 상대적으로 아버지는 무능력하거나 가정에서도 목소리를 크게 내지 못하는 사람으로 표현되었다. 왜곡된 여성상을 바로잡아가는 데 아버지를 비롯한 남자들이 일정 정도 희생해야 했을 수도 있다.
최근 수년간이 ‘모정의 세월’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집으로>와 <말아톤>이 흥행에 성공하고, <사랑해 말순씨> <아이스케키> <해바라기> <열혈남아> <허브> 등 다양한 영화 속에서 자식을 향해 헌신적 사랑을 보여준 어머니들이 큰 활약을 보여왔다. 모성을 키워드로 한 영화들이 충무로의 대세로 자리 잡는 듯했다. 가족 영화의 범주를 벗어나 <해바라기> <열혈남아> 같은 액션물에서조차 김해숙·나문희 등 관록 있는 중견 연기자들이 진한 모정을 그려내며 관객의 눈물샘을 자극했다. 올해 초 개봉한 <허브>는 배종옥·강혜정이 엮어낸 모녀 간의 사랑과 이별의 감동 스토리로 1백30만 관객을 동원했다.
2004년 주현과 수애가 주연해 딸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을 그린 <가족>이 있었다. 이 영화 속에서 아버지는 무기력했다. 부성애는 진한 감동을 낳았지만 숨어 사는 듯한 아버지의 이미지 때문에 이 땅의 아버지를 제대로 그려내지는 못했다.
지난해 상영된 것들만 보더라도 가족을 소재로 한 영화들에서 아버지의 모습은 아예 존재조차 없거나 우스꽝스럽기까지 했다. 장르가 대개 코믹물이라는 점 때문에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부성애를 그렸다고 하는 영화에서조차 아버지라는 인물의 설정은 괴팍하기만 하다. <원탁의 천사>의 아버지는 교도소 복역 중 공놀이를 하다 뇌진탕으로 죽고, <애정 결핍이 두 남자에게 미치는 영향>에서는 이웃 여인을 두고 아들과 사사건건 부딪치는 질투심 많은 아버지가 등장한다. <가문의 영광>을 잇는 <가문의 부활>에서 아버지가 잠깐 부활하지만, 바람둥이로 권위도 별로 없는 데다 어이없는 교통사고로 중도 하차한다. 가문을 위해서다. <구미호 가족>의 아버지는 가족의 구심점도 아니고 엽기적인 캐릭터로 나오는 가족 구성원 중 한 명일 뿐이다. 지난해 최대 흥행작 <괴물>에 나온 아버지(송강호, 변희봉)는 그나마 가족을 위해 희생하는 모습을 보이지만 사회 속 구성원으로서는 초라하기 그지없다. 평범한 아버지라고 하기에도 그렇고, 지극한 부성애를 연기했다고는 하지만 딸의 죽음 앞에서 아무런 힘도 못 쓰는 무기력함으로 끝맺을 뿐이다. 다들 아버지를, 아버지의 사랑을 전격적으로 다룬 영화는 아니다.
아버지를 내세운 영화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흥행에는 실패했지만 네티즌들의 반응이 비교적 좋았던
   
  <이대근, 이댁은>  
 
<잔혹한 출근>은 아버지를 주인공으로 등장시키고, 주제 또한 부성애를 내세운 영화였다. 시대를 반영하듯 이 영화 속의 아버지는 개인 파산 두 달째이고, 빚을 갚기 위해 유괴범이 되는 ‘정신 나간’ 인물이다. 이 영화는 세 명의 각기 다른 아버지상을 그려낸다. 그런데 아버지의 사랑이 어떤 상황에서 어디까지 갈 수 있는가를 그리려 한 작의는 영화의 상업적 전략에 묻히고 만 듯하다.
세 명의 아버지 모두 자식이 유괴당한 인물로써 연결 고리를 가지는데, 셋 다 부성애를 담아내기에는 부적절해 보이는 캐릭터들이다. 영화의 끝 무렵에 진한 부성애를 느끼며 가슴 찡한 여운을 던졌다는 호평도 그래서 빛나지 못했다.
아버지를 위한, 아버지에 의한, 아버지의 영화가 빛을 보지 못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이 시대 아버지들이 가족의 중심이 되지 못하고 희생만 강요당해서일까? 허겁지겁 살아가는 일상을 반영해보았자 칙칙한 영상만 보이기에, 아버지는 변두리에서 조용히 있거나 뒤틀어지고 망가져야만 하는 것일까?


유괴·입양 등 다양한 사회 문제와 결합


   
  <날아라 허동구>  
 
<잔혹한 출근>의 시나리오를 쓴 기승태 작가는 “한국에서 아버지의 삶은 굉장히 외롭고 희생적이다. 다들 공통된 생각을 하고는 있지만, 영화에 반영하는 데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아무리 부성애를 강조하려 해도 캐스팅이나 코믹한 설정에 가려 작가의 의지가 가려지기도 한다”라고 아쉬워했다. 하지만 “아버지란 사람이 어떤 상황에 처해 해서는 안 될 일도 저지를 수 있다. 또 그렇게밖에 할 수 없는 아버지의 본성을 그려낼 수는 있었다”라고 말했다. 모성애를 다룬 영화처럼 아버지가 가족을 위해 무조건적인 희생을 치르는 이야기를 그릴 수도 있으나, 인간적인 아버지의 이야기를 다루는 것이 의미 있다는 설명이다. 최근 벌어진 대기업 회장의 폭행 시비와 맞물려 비뚤어진 아버지의 자식 사랑이 회자하는 시점이라 아버지라는 정체성을 두고 폭 넓은 접근이 예상되기도 한다.
<그놈 목소리>를 시작으로, 2007년 들어 외로운 아버지들이 오래도록 참았던 울분을 터뜨렸다. 4월 <우아한 세계>가 아버지를 띄우더니, <눈부신 날에> <파란 자전거> <날아라 허동구>가 아버지를 주인공으로 모셨다. 5월 초 <아들> <이대근, 이댁은> 등이 개봉하면서 아버지를 소재로 한 영화들이 줄을 잇는 모습이다.
영화를 통해 2007년을 사는 다양한 아버지의 모습을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라면 먹으며 눈물 쏟는 기러기 아빠(<우아한 세계>의 송강호)를 볼 수도 있고, 딸 때문에 눈부신 날이 어떤 건지 깨닫는 아빠(<눈부신 날에>의 박신양)를 만날 수 있다. 젊은 시절 가족 부양과 자신의 꿈을 위해 밖으로 돌다가 가족과의 끈을 놓쳐버린 아버지(<이대근, 이댁은>의 이대근)가 좌충우돌하면서 감동과 웃음을 전하기도 한다. 입양아와 사형수인 아버지의 이야기를 그린 <마이 파더>도 올해 개봉을 앞두고 있다. 그렇게 아버지를 주인공으로 한 한국 영화만 10여 편이 선을 보인다.
   
  <잔혹한 출근>  
 
제작 편수만 보아도 뭔가 곪았던 부분이 터진 형국이다. 이 영화들은 소재 면에서 유괴, 조폭, 입양, 무기수 등 다양한 사회 문제와 결합해 새로운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영화 홍보 담당자들은 이 시대 아버지를 바라보는 시각의 변화 또한 반영하고 있어 하나의 문화적 트렌드로 눈여겨볼 만하다고 말한다. 또 올해 영화 속 아버지들은 집안의 가장 또는 사회 구성원으로서 기능적 역할만 담당하지 않는다. 때로는 친구처럼 다정하고 때로는 모정 못지않은 뜨거운 부성애를 선보이며 고립적인 위치에서 벗어나 관계 지향적인 존재로 자리 매김하고 있는 것이 눈에 띈다. ‘모정의 세월’을 지나 과연 잃어버린 아버지의 존재를 되찾을 수 있을까? 영화 구조상 가식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거나 도식적인 인물로 그려진 아버지는 빼고 말이다. 사랑을 강조하지 않더라도 한 사람으로서 인간적인 면을 드러내어 자신의 자리를 제대로 찾아가는 모습을 볼 수 있기를, 올해 ‘아버지 영화’들에게 기대를 걸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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